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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만 Jan 07. 2024

개인적인 2023년 영화 베스트 10 - 한국영화 부문

인상적인 영화리뷰 2023

2024년 갑진년, 푸른 용의 해가 밝았습니다. 작년 한 해는 실내에서도 마스크를 벗는 진정한 '엔데믹' 시기에 접어들며 극장가도 예전의 활기를 되찾으리라 기대가 컸지만 익숙해진 안방극장 환경과 비싸진 영화 관람료로 인해 관객들이 확실히 보증된 영화에만 몰리며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두드러졌습니다. 하지만 변함없이 극장가를 찾았던 영화 팬의 한 사람으로서, 잘 만든 영화들을 극장에서 만날 때의 뿌듯함은 여전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뿌듯한 마음을 안겨준 2023년의 개인적인 영화 베스트 10을 꼽아보았습니다. 제가 본 영화들을 대상으로 하였기에 완성도와 상관없이 보지 않은 영화들은 포함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한국영화 베스트 10입니다. 2023년 1월부터 12월까지 국내 정식 개봉된 한국영화들을 대상으로 했습니다. 아래는 그 리스트이며, 간단평도 함께 싣습니다.



10위 <노량: 죽음의 바다>


출연: 김윤석, 백윤식, 정재영, 허준호, 김성규, 이규형, 이무생, 최덕문, 안보현, 박명훈, 박훈, 문정희

감독: 김한민


김한민 감독의 '이순신 3부작'은 그 시작인 <명량>이 워낙 크게 성공했고 그 장단 또한 워낙 뚜렷했던지라 기대와 우려를 함께 자아냈습니다. 그러나 그 대단원인 이 영화를 통해 이 3부작은 나름의 진정성을 품고 안정적으로 마무리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성웅 이순신'에 대한 천편일률적인 찬양과 후세를 향한 교훈적 메시지에만 매달리지 않고, 7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자신의 많은 것을 희생시키며 전투에 임해 온 그의 내면이 어땠을지를 들여다보며 전쟁이라는 참혹한 행위의 의미에까지 접근하는 데 성공합니다. 매편마다 다른 배우가 연기한 이순신이란 캐릭터는 김윤석 배우의 터치를 통해 진중하고 진심어린 초상으로 마무리되었고, 해전 장면 연출은 10년새 무르익은 기술력으로 폭발력과 디테일을 모두 확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교훈을 좀 더 직접 떠먹여 주는 듯한 쿠키 영상에 대한 호불호는 있을 수 있어도, 적어도 보고 나면 이순신 장군과 그가 임한 임진왜란의 한 가운데를 잘 들여다 보며 느끼고 온 보람은 확실할 마무리였습니다.



9위 <거미집>


출연: 송강호, 임수정, 오정세, 전여빈, 정수정, 박정수, 장영남

감독: 김지운


김지운 감독이 오랜만에 필모그래피의 출발점인 코미디로 돌아온 이 영화에는 외부로부터의 숱한 검열 위협 속에서 때론 정신나간 사람처럼 창작열을 불태우던 옛 영화와 영화인들에 대한 경의를 듬뿍 담고 있습니다. 우당탕탕 돌아가는 스크린 밖 현장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슛을 외치는 순간 일사불란하게 직조되는 스크린 속 장면의 대비는 웃음과 더불어 경탄을 자아내고, 그 장면 곳곳을 눈여겨 들여다 보게 만드는 배우들의 재치 넘치는 연기는 끊임없이 다음 장면을 기대하게 만듭니다. 기대만큼의 예측불허 전개는 아니고 인물들의 내면과 현장을 넘나드는 과정에서 다소 늘어지는 부분도 없지 않지만, 요즘 관객들에겐 미지의 세계나 다름없는 1970년대 영화 제작 현장의 기묘한 분위기를 생생하게 재현하며 별난 고집들이 충돌하는 와중에서도 작품 같은 영화가 탄생하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자면 묘한 감동을 주기도 합니다. 프로 영화인들의 뚝심이 만들어낸, 한동안 한국영화에서 쉽게 만날 수 없었던 난장 코미디라 좋았습니다.



8위 <화란>


출연: 홍사빈, 송중기, 김형서

감독: 김창훈


느와르라는 익숙하면서도 피로한 장르에 성장물로서 접근하면서 꽤 새로운 느와르의 얼굴을 보여준 영화입니다. 가정보다 더 살가운 울타리가 되어주는 어둠의 세계에서 멘토와 멘티의 관계를 형성하는 두 주인공의 모습은, 여느 느와르물 속 한껏 폼잡은 우정의 관계보다 비슷한 생채기를 입은 어린 청년들이 서로에게 의존하는 것처럼 느껴져 비애감을 한껏 풍깁니다. 몸담는다고 찰나의 영화마저 주어지지 않는, 어른들의 무책임 속에서 소년들은 더 큰 어둠 속으로 스스로 걸어들어갈 수 밖에 없는 비정한 세계는 느와르의 허울 안에 머무르지 않고 현실에 보다 직접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듯 합니다. 과묵하게 스크린을 이끌어가는 홍사빈 배우와 기대 이상으로 중량감 있는 연기를 보여주는 송중기 배우의, 멱살과 포옹 사이 독특한 호흡을 동력으로 끝까지 에너지를 잃지 않는 영화는 또 하나의 가공된 '겉멋의 세계'가 아닌, 현실 어딘가 존재할 것만 같은 절망의 세계와 분투하는 소년을 그리며 적잖은 여운을 남깁니다.



7위 <잠>


출연: 정유미, 이선균

감독: 유재선


익숙해 보이는 장르도 어떤 시선으로 접근하는지에 따라 전혀 새로운 모습을 띠게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또다른 좋은 예입니다. 남편의 몽유병으로 인한 공포에 휩싸이는 여인의 이야기를 그리는 영화는 현상의 원인을 규명하기보다 영문을 알 수 없는 현상 앞에서 요동치는 인물의 내면이 형성하는 공포의 도미노에 집중합니다. 의학과 무속신앙 사이에서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않고 줄타기 하는 이야기는 뚜렷한 한 가지의 진실이 아닌, 무엇도 진실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안개가 더 큰 공포를 자아낼 수 있음을 입증합니다. 비선형적이고 일방향적이지 않은 그 공포는 좀처럼 만나본 적 없는 낯선 형태이기에 더 공포스러우면서 동시에 더 매혹적입니다. 너무나 기묘해서 때로 헛웃음까지 나올 정도인 이 괴담에 광기의 리얼리티를 부여하는 배우들의 연기 또한 뛰어나서, 90여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즐기는 장르의 맛은 충분히 강렬합니다. 감독의 다음 행보는 더 크고 넓을 수 있겠다는 기대를 품게 하는 비상한 장르물입니다.



6위 <밀수>


출연: 김혜수, 염정아, 조인성, 박정민, 고민시, 김종수

감독: 류승완


누군가는 그간의 류승완 감독 영화에 비해 영화가 지니는 파워가 약하다고 평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파워가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상당히 강했다고 봅니다. 버디무비로서 여느 남성 중심의 영화들보다도 뜨거웠고, 해상액션 영화로서는 전에 없던 기가 막힌 볼거리를 선사했죠. 영화가 흔한 케이퍼 무비에 머무르지 않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영화의 중심에 있는 해녀들의 연대입니다. 남성들을 대신해 생계를 책임지며 위험한 바다로 뛰어들었던 해녀들의 힘과 끈기, 각별한 우정이 영화 내내 중요한 기반을 이루고 있었고 덕분에 영화는 범죄 액션 장르를 표방하고서도 어둡고 찝찝한 기운이 아닌 밝고 경쾌한 기운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다소 취향을 탈 수 있는 후반부 수중 액션신은 그런 해녀들의 세계를 완전히 존중한 끝에 완성된 개성 넘치는 결과물이었던 셈이죠. 기존 류승완 영화 팬들의 기대에 훌륭히 조응하는 호텔 액션 신, 시대와 서사에 흠뻑 젖어든 OST까지 개성과 보편적 재미를 모두 잡은 일급 오락영화였습니다.



5위 <비밀의 언덕>


출연: 문승아, 임선우, 장선, 강길우, 장재희

감독: 이지은


할리우드에 비해 한국영화에서 어린이는 좀처럼 서사의 중심에 서기 어렵지만, 독립영화에서라도 매년 어린이가 중심에 있는 빼어난 영화들이 나와 무척 흐뭇합니다. 가족의 현실이 부끄러워 비밀과 거짓말로 자신을 포장하던 소녀가 겪는 이야기를 보며 부끄러움과 미안함에 공감하고 애정어린 눈빛을 보내게 되는 것은, 그런 과정을 실제로 겪으며 부끄럽고 시끄러운 마음이 우리에게도 있었음을 깨닫던 우리의 유년기가 떠오르기 떄문일 것입니다. 그런 부끄러우면서도 미안한 현실과 희망하면서도 조심스러운 거짓말 사이에서의 고민은 어린 시절에 시작되어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것이기에, 어느 초등학생의 일상 한토막을 엿본 듯한 이 이야기는 그로부터 수십년을 지나왔을 어른들의 마음에도 여전히 메아리칩니다. 나라는 개인과 세상을 연결해주는 듯한, 지나온 시간과 현재를 이어주는 듯한 영화를 만날 때 각별히 반가운데, 이 영화가 바로 그런 영화였습니다.



4위 <콘크리트 유토피아>


출연: 이병헌, 박서준, 박보영, 김선영, 김도윤, 박지후

감독: 엄태화


승자도 희생자도 확실했던 지난 여름 한국영화계에서 가장 빼어났던 영화였습니다.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재난군상극은 여러 플랫폼을 통해 접하면서 어느덧 꽤 익숙하고 피로한 장르가 되었음에도, 아파트라는 한국 특유의 공간을 배경으로 한국인이기에 형성할 수 있는 공감대 위에서 날카로운 풍자를 매끄럽게 녹여내는 데 성공한 영화입니다. 이미 대재앙을 맺지 않아도 사는(live) 곳이기보다 사는(buy) 것으로서 집을 바라보는 현재 우리의 기저에 깔려 있을지도 모를 재앙의 씨앗을 들여다 보게 하는 이야기는, 극단적인 선악의 대립보다 저마다의 처지와 입장에 따른 갈등을 통해 우리의 입장은 어떨지 보다 저돌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많진 않지만 강력하게 연출되는 재난 시퀀스, 모든 캐릭터들에 분명한 호소력을 부여하는 배우들의 연기까지 더해져 영화는 시각효과, 내러티브, 연기, 메시지까지 어느 한 측면도 끝까지 일관된 리듬감을 유지하는, 뛰어난 밸런스의 블록버스터가 되었습니다.  



3위 <서울의 봄>


출연: 황정민, 정우성, 이성민, 박해준, 김성균

감독: 김성수


이 영화의 가장 놀라운 성과는 다 아는 결말, 그것도 몹시 암울한 결말의 이야기를 기어이 끝까지 보게 만드는 마력의 연출입니다. 강렬하고 리드미컬한 연출이라는 김성수 감독의 장기는 그 어떤 장르물도 아닌 실제 역사 기반의 이 정치 드라마에서 뜻밖에 빛을 발합니다. 제한된 시간동안 들고 나는 수많은 인물들의 입지와 서열, 관계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함은 물론, 초유의 군사 반란이 전개되는 과정을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처럼 주도면밀하게 펼치고 파고들며 관객을 몰입하게 만듭니다. 일단 관객이 몰입부터 해야 분노를 하든 탄식을 할 수 있다는 걸 정확히 알고 있는 셈이며, 과연 그렇게 몰입한 끝에 마주하게 되는 이 사건의 진정한 의미에 관객은 분노에만 머물지 않는 깊은 사유에 이르게 됩니다. 봄을 눈 앞에 두고 야만에 의해 그 봄을 뺏기기를 반복하는 시대에 우리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고민 말이죠. 모티브가 되는 인물들이 이미 갖고 있는 명확한 캐릭터성에 기대지 않고 그들의 드글대는 욕망을 있는대로 발현하며 연기력의 정점을 갱신한 배우들에게도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2위 <다음 소희>


출연: 배두나, 김시은

감독: 정주리


영화라는 수단을 통해 현실에 목소리를 낼 수 있다면,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근래 가장 인상 깊은 사례라고 할 만합니다. 특성화고 현장실습생에 대한 비인간적 처우를 고발하려는 영화의 취지는 명확합니다.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영화적으로 구현해내는가인데, 영화는 현실을 겪어내야 했던 당사자와 현실을 되짚어 보는 관찰자의 시선을 교차함으로써 영화가 고발하고자 하는 세계의 안과 밖을 오롯이 체험하게 합니다. 주인공 소희의 시점에서는 이제 실습생으로서 세상을 체험해 보려는 소년소녀들에게마저도 무자비한, 인간을 노동자원으로 인식하고 실적만으로 그들의 가치를 판단하는 세계를 마주하게 함으로써 시스템의 비인간성을 실감하게 합니다. 한편 소희의 사건을 추적하는 형사의 시점에서는 가운데 휘말려 있다면 미처 인식하지 못할 시스템의 총체적인 문제를 조망케 함으로써, 영화의 메시지에 이성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모두 동조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두 주인공이 찰나의 만남만 있을 뿐 바통 터치하듯이 주도권을 바꿔 쥐는 독특한 전개는 결과적으로 이 영화에 반드시 필요했던 방식임을 깨닫게 됩니다.



1위 <너와 나>


출연: 박혜수, 김시은

감독: 조현철


마음을 장면장면마다 꾹꾹 눌러담은 영화를 만날 수 있다면, 이 영화가 바로 그런 경우일 것입니다. '내일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나는 안산의 고등학생'이 주인공인 영화가 어떤 이야기를 다룰지는 능히 짐작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영화는 사건의 크기보다 더 짙은 사람들의 아픔이 남은 이야기를 통해 미처 풀어내지 못한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데 집중합니다. 넘치는 마음만큼 전하지 못한 사랑을 향한 후회가 순간순간을 가득 채우는 하루를 따라가며, 우리는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는 보통의 나날들에도 실은 빼곡하게 자리하고 있었을 소중한 웃음과 눈물, 애타고 야속하고 간절한 마음들을 만나게 됩니다. 어쩌면 지속되는 삶과 끝난 삶이 만나는 어느 지나간 찰나를 비추는 듯도 한 영화 속에서, 우리는 영원히 지속되기에 저 너머에도 언젠가 닿을 사랑의 고백을 속삭이는 어떤 숭고한 의식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렇게 삶과 죽음으로 갈라진 우리가 다시 '너와 나'로 이어짐을 느끼며 말이죠. 계산과 정제보다 진심 가득한 헤아림으로 이루어진, 말로 표현할 수 없어 보여줘야만 알 수 있는 그 마음을 기어이 보여주고야 마는 올해의 발견작입니다. 


여기까지가 제가 개인적으로 꼽아본 2023년 한국영화 베스트 10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2023년 외국영화 베스트 10을 꼽아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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