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적인 영화리뷰 2024 - <메이 디셈버>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본상 후보에 오른 영화 <메이 디셈버>를 아카데미 기획전을 통해 개봉 전에 미리 보았습니다. <캐롤>의 토드 헤인즈 감독이 연출하고 나탈리 포트만이 제작과 출연을, 감독의 오랜 페르소나인 줄리안 무어가 함께 출연한 이 영화는 실제로 있었던 충격적 사건을 바탕으로 했지만 이를 자극적으로 소비하지 않고 신중하게 다루는 한편, 세속적 욕망과 얽힌 인간 본연의 진실에 관해 이야기하며 생각할 거리를 톡톡히 남겨줍니다. 보고 나서 명쾌한 감정이 남아야 하는 영화가 있는 한편 그렇지 않을 때 더 좋은 영화도 있게 마련인데, 이 영화는 후자에 속할 것입니다. 결코 명쾌하지 않은, 마지막에 남는 아프고 어지러운 감흥이 이 영화가 말하는 '진실'일테니까요.
유명 배우 엘리자베스(나탈리 포트만)는 새로 준비하는 영화를 위해 영화가 다룰 사건의 실제 모델인 이들의 곁에서 한동안 머물며 그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합니다. 그들은 20여년 전 '36세 여성과 중1 소년의 스캔들'로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그레이시(줄리안 무어)와 조(찰스 멜튼) 부부입니다. 지금도 간간히 배설물이 담긴 택배를 받는 등 세상의 시선에서부터 완전히 자유롭진 않지만 그들은 아이들을 대학에까지 보내며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던 터입니다. 엘리자베스는 한때 황색 언론들이 신나게 떠들었던 스캔들의 이면에 어떤 진짜 감정이 있었던 건지 들여다 보고자, 자신이 연기하게 될 그레이시의 일거수일투족을 포착하고 조와 어울리는 한편 그들과 연관이 있었던 이들을 인터뷰하기도 합니다. 화장하는 법까지 배우려 자신을 따라다니는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시는 불편하면서도, 자신들의 본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엘리자베스에게 자신에 대해 보여줄 수 있는 만큼 보여주려 합니다. 한편 엘리자베스는 그런 그레이시의 속내는 조가 무엇이 좋아서 그레이시와 그런 '금기의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지 몹시 궁금합니다. 그러는 사이 조는 현재의 자신과 동갑이자, 자신과 처음 관계를 맺던 시절의 그레이시를 연기하게 될 엘리자베스에 관심이 가기 시작합니다.
<메이 디셈버>가 소재로 삼은 사건이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더 자극적으로 소비되거나, 세상 물정과 동떨어진 사색의 도구로 활용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화는 엄연히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그렇기에 다행히도 자극적 소비와도 세상과 유리된 사색과도 거리가 멉니다. 영화 속에서 그레이시와 조의 사건은 이미 수많은 타블로이드 언론에서 온갖 호기심을 유발하며 자극적으로 다뤄졌고, 이는 이미 시도가 된 것 같은 영상화 과정에서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영화는 그레이시와 조의 관계를 자극적으로 다루는 것은 그들이 영화 속에서 20여년의 세월을 보내며 접해야 했던 온갖 매체들의 몫으로 남겨둔 채, 겉으로는 여느 부부와 다르지 않은 일상을 보내는 이들의 모습으로 비춥니다. 처음 엘리자베스의 의지를 따라 영화 역시 그들의 관계가 얼마나 충격적인지보다 그 외적인 충격 뒤에 숨은 감정적 진실에 주목하는 것이죠. 영화 속 그레이시와 조의 삶은 들여다 보고 그 진의를 알아내야 하는 것이지 몰입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영화는 난데없이 볼륨을 키우는 음악이나 뜻하지 않게 포커싱하는 카메라처럼 의도적으로 몰입을 방해하는 장치들을 심어놓기도 하죠. 처음엔 엘리자베스 역시 이런 관객들과 비슷한 관점에서 그레이시와 조를 들여다 볼 것이라 예상하게 되지만, 그 예상은 곧 빗나가게 됩니다. 이는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시와 조의 이야기를 추적하는 저널리스트가 아니라 그 당사자 중 한 명을 연기해야 하는 배우라는, 그녀의 처지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그녀가 (특히 실존했던) 인물을 연기하는 방식은 그런 식으로 온전히 인물을 이해하고 그에 이입하는 것인 듯 한데, 그러려면 인물을 명확히 파악하고 그렇게 파악된 인물에 자신을 동기화해야 하는데 그것이 객관적으로 가능할까요. 어쩌면 대중의 소구와 자신이 짐작하고 바랐을 방향으로 은연중에 모방하게 될지도 모르는 노릇인 겁니다. 진실은 그렇게 편의적인 게 아닌데 말이죠.
수많은 타블로이드 언론의 게으르고 말초적인 재생산과 이에 길들여진 (혹은 이를 자극한) 대중의 호기심이 비윤리적인 스캔들을 비윤리적으로 소모할 때, 진실은 시간 저편으로 자취를 감추었고 자극과 상처만이 남아 20여년을 떠돌았을 것입니다. 윤리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그렇게 행할 때에야 비로소 진실은 찾아오지만, 때가 늦은 만큼 진실은 그만큼 아프고 또 혼란스러울 것입니다. 엘리자베스의 방문을 계기로 다시 찾아온 진실의 분기점 앞에서 영화는 진실 앞에 서로 다른 태도를 취하는 세 인물을 제시합니다. 본심을 드러낸 건지 감춘 건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진실을 이끌고 있는 인물, 진실을 캐내겠다고 하지만 한편으론 그 진실을 편의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모방하려 할 수 밖에 없는 욕망이 내재된 인물, 숨겨진 진실 위에 덧칠해진 감정이 자신의 것이라 믿었던 인물까지. 누구 한 명에게 몰입할 수 없는 상황에서 관객은 보다 멀리 떨어져 진실을 가늠하는 자리에 서게 되고, 그렇게 관객은 그레이시와 조의 관계에 대하여 영화가 쥐어주는 진실에 수긍하는 대신 보다 능동적으로 진실을 찾아나서고 고민하게 됩니다. 영화는 영화배우라는 엘리자베스의 포지션을 통해 윤리를 망각한 채 욕망을 좇는 대중문화의 스토리텔링을 지적하는 한편, 그런 욕망으로 인해 인간을 조명하는 데 써야 함에도 외면당하고 마는 진실의 문제까지 함께 다룸으로써 대중의 일원으로서 곱씹어 볼 만한 화두를 던집니다.
충격적 사건을 자극적으로 다루지 않고도 시종일관 긴장감을 잃지 않는 것은 그만큼 한껏 불꽃을 틔우는 배우들의 열연 덕분입니다. 이 영화가 제작되는 데 가장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는 나탈리 포트만은 그 열의에 걸맞게 어느 순간 현실과 역할의 경계를 넘게 되는 엘리자베스의 혼돈스런 내면을 역시 파워풀한 연기로 보여줍니다. 처음엔 무난한 관찰자인가 싶던 인물이 관찰하던 대상에 점차 이입되는 과정은 관객으로 하여금 엘리자베스를 향한 몰입을 오히려 중단하게 하고 거리를 두게 하는 한편, 그 거리감으로 인해 아이러니하게도 진짜 추구해야 할 진실을 좇게끔 하는 힘을 발휘합니다. 한편 토드 헤인즈 감독과 여러 작품에서 호흡을 맞춰 온 줄리안 무어는 이번 영화에서도 한껏 벼린 연기로 명불허전의 활약을 펼칩니다. 세간의 시선에 아랑곳 않는 강인한 인물처럼 보이지만 그 뒤에 숨은 불안으로 얼마든지 무너질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그의 연기는 순간순간 관객을 옴짝달싹 못하게 합니다. 그런데 이런 베테랑 배우들 사이에서 조 역을 맡은 한국계 신예 배우 찰스 멜튼이 보여주는 연기는 놀랍습니다. 대상화될 수도 있는 인물의 입지를 떨치고 고뇌와 경계, 각성으로까지 나아가는 과정을 그려내는 연기의 힘이 만만치 않았기에,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 후보 자격도 충분했겠다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메이 디셈버>는 관찰자 엘리자베스의 시선을 통해 그레이시와 조의 이야기를 미화하지도 단죄하지도 않으며, 그러므로 어떤 쪽으로든 진실이 명쾌하게 남지 않는 영화입니다. 그저 진실을 감추거나, 진실을 찾거나, 진실에 관하여 혼란스러워 하는 이들로 채워진 이야기죠. 때문에 보고 나면 물음표를 한껏 남기지만, 욕망 앞에 흐려지고 가려지고 더럽혀지기 마련인 인간의 진실에 관한 문제를 고민하게 하는 날카로운 영화임에 틀림 없습니다. 영화의 제목인 '메이 디셈버'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커플을 일컫는 표현입니다만, 꽃피는 5월의 봄과 얼어붙는 12월의 겨울이 공존하는 모양새로서 그처럼 따사로움과 차디참 사이쯤 어딘가에 있는 삶의 진실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