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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만 Mar 17. 2024

세상 모든 유한했던 우정에게 전하는 안부인사

인상적인 영화리뷰 2024 - <로봇 드림>

<로봇 드림>(Robot Dreams, 2023)


어떤 영화들은 아카데미 시상식에 후보로 오르는 순간부터 비로소 우리의 시야 안으로 들어오기도 하는데,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 장편애니메이션상 후보에 오른 영화 <로봇 드림>이 아마 그런 경우일 것입니다. 쟁쟁한 후보작들과 함께 나란히 후보에 오른 이 초면인 스페인산 2D 애니메이션은 결국 아카데미가 괜한 영화를 후보로 올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또 한번 입증합니다. 왜 이제 알게 되었을까 싶을 만큼 시청각적 즐거움과 사려 깊은 감동을 함께 선사하는 이 영화는, 애니메이션이기에 가능한 상상력과 웬만한 실사 영화들도 이르기 힘든 낭만과 공감을자아내며 우리 삶을 반추하게 하고, 그 반추에서 비롯되는 헛헛한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집니다.


1980년대 9월 어느날 뉴욕을 홀로 무료하게 살아가던 '도그'는 여느 때처럼 쌓아둔 마카로니 앤 치즈를 먹으며 TV를 보던 중 한 광고에 눈길이 머물게 됩니다. 외로운 이들의 친구가 되어줄 '로봇'에 대한 광고였죠. 도그는 그 길로 바로 로봇을 주문하고, 기다림 끝에 택배로 도착한 로봇을 정성들인 조립 끝에 완성해 냅니다. 전원이 켜지는 즉시 도그의 하나뿐인 절친이 된 로봇은 도그가 평소에 홀로 보내던 일과들을 함께 하면서 더욱 풍성한 즐거움을 주는 한편, 홀로라면 해보지 못했을 일들을 함께 하며 이전엔 느끼지 못했던 기쁨까지 선사합니다. 센트럴 파크에서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신나게 춤을 추는 일, 해변에 가서 다이빙하고 스노클링하며 원없이 물놀이하는 일 같은. 그렇게 소중한 시간들을 나누던 중, 로봇이 그만 방전되어 몸을 가눌 수 없게 됩니다. 움직일 수 없는 무거운 로봇을 집까지 이끌고 가는 것은 역부족이었고, 도그는 바로 다음날 장비를 챙겨 다시 찾아와서 로봇을 고쳐주겠노라 약속합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날 이후 해변은 시즌 종료로 폐쇄가 되었고, 도그는 로봇에게 어떻게든 다가가려다 경찰서에서 머그샷까지 찍는 등 상황이 여의치 않게 됩니다. 해변은 이듬해 6월이나 되어야 다시 문을 여는데, 도그는 6월에 꼭 로봇을 찾으러 가겠다는 다짐 아래 로봇이 없는 하루하루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노력하고, 그동안 해변에 남겨진 로봇은 다시 일어나 휘파람을 불며 도그에게 돌아가는 꿈을 몇 번이고 꿉니다.


이른바 디즈니체, 드림웍스체, 지브리체 등 어느 유명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식 작화법과도 비슷하지 않은 <로봇 드림>의 2D 작화는 생각보다 더 매력적입니다. 1980년대에는 대표적인 랜드마크였을 세계무역센터를 비롯해 센트럴 파크, 타임스 스퀘어 등 1980년대 뉴욕은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고, 그런 도시를 가득 채우고 있는 다양한 동물들이 저마다 가진 생김새와 행동의 디테일 또한 살아있습니다. 이 속을 해사하게 누비는 동글동글하고 선한 그림체의 도그와 로봇은 사랑스럽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이러한 영화 속 뉴욕은 온갖 동물들이 어울려 사는 (이 영화의 원작 그래픽 노블이 먼저 나왔지만) 흡사 '주토피아' 같은 환경이지만 인간의 말을 하지 않고 감탄사나 추임새 정도만 소리내며 나름의 리얼리티를 챙겼습니다. 그러나 심플하지만 감정의 미세한 결을 파고드는 작화와 더불어 적재적소의 OST 사용으로 대사가 없는 아쉬움은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 유명한 Earth, Wind & Fire의 'September', 꽃들의 화음으로 채워지는 'Flowerland' 등 80년대 뉴욕의 그루브를 구현함은 물론 도그와 로봇의 마음에 채워지는 행복감 혹은 공허감, 갈급함까지 대변하는 음악들이 말이 필요없이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듭니다.


<로봇 드림>(Robot Dreams, 2023)


이렇게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요소들이 풍성해서인지, 도그와 로봇이 겪는 만남의 시간은 특히 눈부시고 이별의 시간은 더욱이 쌉쌀합니다. 영화가 더욱 깊고 섬세하게 어루만지는 것은 둘이 함께 나누었던 우정의 추억보다 떨어져서 겪어야 하는 헤어짐의 나날들입니다. 서로 없이는 못 살 것 같던 두 친구에게 어떤 요란한 징조나 예고도 없이 찾아온 이별은 그들의 감정이 어긋나서도, 각자에게 어떤 잘못이 있어서 일어난 게 아닙니다. 그렇게 갑자기 찾아온 이별 뒤에도 누군가는 꿈에서도 몇번을 떠올리며 상대방을 그리워 할 것이고, 누군가는 그리는 마음 한켠으로 외로움을 달랠 다른 인연을 찾아보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덜컥 찾아오는 드라마틱하지 않은 이별은 사실 우리가 살아오면서 숱하게 경험했던 인연들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특히 연인보다 친구 사이라면 더 많이 겪었겠죠. 지난날 단짝으로 늘 붙어다녔었지만 지금은 잘 지내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영화는 각기 다른 처지에서 서로의 존재를 그리워 하는 도그와 로봇의 모습을 통해, 그처럼 이유 없이 찾아온 헤어짐 앞에서 내가 취했었던 모습들을 하나둘씩 떠올리게 합니다. 그 회상이 과거형이 된 온갖 추억들을 불러들이며 우리를 울적하게 만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 이야기는 우리를 울적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 영화는 그처럼 유한할 수 밖에 없는 인연의 와중에도, 언제나 무한한 기억의 힘을 소환합니다. 그리고 더 많은 이별을 겪으며 관계의 유한함을 절감하게 될수록, 아무리 돌이켜도 바래지 않는 기억의 빛깔을 깨달으며 그 기억들로 채워져 가는 삶을 긍정하게 된다고 말하죠.


서로였기에 가능했던 만남은 이제 과거형이 되었어도 그때 나누었던 추억은 언제나 현재처럼 남아있고, 기척도 없이 찾아온 이별은 우리의 탓이 아니었기에 불가항력이었을지언정 슬픈 일은 아닐 것입니다. 영화는 부인할 수 없는 인연의 유한함을 받아들이는 한편, 꽃피는 추억 뒤에 밀려오는 외로움에 하염없이 앓게 되더라도 다시 그 추억을 고이 품은 채 다시 흘러갈 시간 앞에 서는 우리들 누구나를 다독입니다. 그리고 사라지지 않은 채로 저 멀리에 있을 그 지난 우정들에게 잘 지내냐는 안부인사를 건네며 우리들을 위로하죠. 영화를 보고 나면 앞으로 더욱 저릿하게 들리게 될 노래 'September' 속 가사처럼 우리는 다만 그때를 기억하는지 가끔 묻게 될 것임을, 그리고 기억한다고 답함으로써 우리들이 잘 지내고 있다는 위안을 얻을 것임을 느끼게 됩니다. 말이 필요 없이 음악으로 나누며, 꿈으로 상상으로 그리며 서로의 존재를 되새길 도그와 로봇처럼. 지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80년대 뉴욕을 살아가던 이들의 추억 속에서는 어느 순간을 가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영화 속 세계무역센터처럼요. 이렇듯 사라지지 않는 추억을 품고 숱한 시간들을 지나가게 될 우리들을 끌어안는 <로봇 드림>은 '지나간 시절'을 이야기하는 영화로서 <라라랜드>, <패스트 라이브즈> 등의 영화와 나란히 놓일 만합니다.


<로봇 드림>(Robot Dreams,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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