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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만 Mar 28. 2024

희석된 진실의 바다에서 길을 잃은 우리들

인상적인 영화리뷰 2024 - <댓글부대>

<댓글부대> (Troll Factory, 2024)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로 반향을 일으켰던 안국진 감독이 9년만에 내놓은 신작 영화 <댓글부대>는 장강명 작가의 동명소설이 원작으로, 도발적인 제목에서부터 전격적인 사회고발극이 될 것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업영화로서는 보기 드문 문법을 취한 채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직선적인 사회고발극보다는 입체적인 사회투영극에 가까운 느낌입니다. 문제가 되는 현실을 고발하는 데에 만족하지 않고 그 문제가 어떤 양상인지, 무엇이 그 문제를 일으킨 것인지를 돌이켜본달까요. 그렇게 영화에 투영된 멍하고 혼돈스러운 현실 속에는 진실과 거짓의 불확실한 경계 사이를 헤엄치는 위태로운 우리들이 비쳐 보입니다. 


신문기자 임상진(손석구)은 저널리즘 정신이 무척 투철해 보입니다. 취재해야 하는 진실이 있다면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서라도 취재에 뛰어들고야 마는 대쪽 같은 고집이 있는데, 이게 기자로서의 사명감인지 아니면 그런 고집을 부리는 자신의 모습에 내심 우쭐해 하는 허세인지 때때로 분간이 되지 않기도 합니다. 그런 특유의 저널리즘 정신으로 상진은 어느날 공기업 입찰 과정에서 굴지의 재벌 대기업 '만전'의 입김이 작용했을 수 있다는 의혹을 취재합니다. 정의 구현의 순간과 저널리스트로서 지닌 자신의 진면목이 만천하에 알려지리라는 기대도 잠시, 해당 기사는 오보로 판명되고 그로 인해 상진은 엄청난 후폭풍을 맞음과 동시에 정직을 당하게 됩니다.문자와 댓글로 쏟아지는 비난에 떠밀려 재취업이 힘들 만큼 직업적으로도 매장당한 거나 없던 상진을 온라인에서 누군가가 호출합니다. 그 제보자는 상진을 매도한 온라인상의 댓글들이 누군가의 저의에 따라 고도로 조작된 것이며, 상진이 쓴 기사 또한 오보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런 댓글조작이 바로 자신들의 소행이라 주장하는 것이죠. 닉네임 찡뻤킹(김성철), 찻탓캇(김동휘), 팹택(홍경)으로 이루어진 이 이른바 '댓글부대'가 어떻게 치밀하게 임무를 수행해 왔는지를 찻탓캇이 상진에게 소상히 설명하는 가운데, 상진은 이 제보를 바탕으로 과거의 오명을 완전히 떨쳐버릴 새로운 진실을 세상에 전파할 준비를 합니다. 


<댓글부대> (Troll Factory, 2024)


<댓글부대>를 연출한 안국진 감독의 장편 데뷔작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수습하고 벗어나려 할수록 혼돈으로 빠져드는 성실하고 빈곤한 이들의비극적 아이러니를 잔혹극이라는 장르적 형식에 빌어 재기발랄하게 꼬집으며 평단의 호응을 얻은 바 있습니다. 그런만큼 <댓글부대> 또한 이러한 감독의 발칙한 현실 비판적 요소를 계승하지 않을까 예상하기도 했죠. 다만 원작이 따로 있고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하는 만큼 전작보다는 다소 유화된 느낌으로요. 과연 <댓글부대>는 감독의 전작보다 한층 유화된 표현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 외의 지점들에서는 예상을 꽤나 빗나갑니다. 첫째로 <댓글부대>는 직관적으로 현실을 고발하는 대신 겹겹이 싸인 내러티브의 층위와 관점의 변화를 통해 입체적으로 현실을 투영하는 방식을 택합니다. 비판 대상의 실체를 까발리는 데 온 주의를 집중하고 이를 통해 비판 대상과 주인공의 일대일 대립구도를 분명히 하려는 건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더라는 거죠. 영화를 보기 전 상상한 인물 구도는 양지 매체인 신문사 소속의 기자 임상진과 음지에 있는 여론조작 당사자인 비밀조직 '팀알렙'의 세 멤버 '찡뻤킹', '찻탓캇', '팹택' 세 명이 3:1 형태로 협력하거나 대립하는 구도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영화를 보면 구도가 꽤 묘합니다. 팀알렙의 행태는 세 멤버 중에서도 찻탓캇을 통해서 임상진에게 전해지므로, 예상한 3:1 구도와는 다릅니다. 비밀은 찻탓캇의 입을 통해서 전해지고, 심지어 그렇게 비밀을 전하는 찻탓캇의 정체도 불분명합니다. 그렇다고 임상진이 거대한 비밀을 객관적이고 투명하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기자인가 하면 그것도 아닌 듯 합니다. 이전부터 진실을 전하는 저널리스트로서의 자신에 도취된 느낌도 없지 않았던 인물인데다, 현재는 오보에 대한 누명을 벗는 것과 직장을 되찾는 것과 같은 개인적인 문제까지 얽혀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죠. 무엇보다 극중에서 임상진이 여론조작의 희생자이면서도 직업적으로 여론형성에 참여하는 당사자라는 점이 전개의 구도를 더욱 흩뜨립니다. 이쯤 되면 결백한 주인공이 명백한 진실과 대면하는 이야기가 맞는지 슬슬 의심이 들게 됩니다. 


찻탓캇이 임상진에게 폭로하는 여론조작의 메커니즘은 예상보다 훨씬 복잡하고 교묘합니다. 진원지가 어디며 의중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조작되는 여론들은 뱀처럼 몸둥이를 감춘 채 시야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가며 대중 사이를 누빕니다. 그만큼 치밀하며 악질적인 방법으로 만들어지는 '조작된 여론'은 누구라도 정보 생산이 가능한 온라인에서 무한대로 확대 재생산되면서 그야말로 왜곡된 정보의 해일로 진화해 가는 것이죠. 이렇게 돌고 돌아, 비틀고 비틀어 조작되는 진실을 객관적으로 지켜볼 수도 없고 마찬가지로 소비하거나 재생산하는 위치에 설 수 밖에 없는 우리는 그럼 과연 정신을 차릴 수 있을까요. 영화는 진실과 왜곡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임상진을 화자 삼아, 마치 팩트체크 여부를 거듭 묻는 신문사 편집국장처럼 우리가 향해 가는 것이 정말 진실이라 장담할 수 있는지 수시로 제동을 겁니다. 그리고 진실의 정의에 관한 질문들을 던집니다. 단 1g의 거짓도 없어야만 진실인가, 진실을 가리는 것은 모두 진실이 아닌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가 마주하는 것 중에 재론의 여지가 없는 진실이란 과연 무엇인가. 평범한 우리들 또한 진실을 찾아내기보다 셀 수 없이 많은 버전의 진실들을 생산-재생산하기를 거듭하기 마련인 현실에서, 영화는 우리가 진실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 희석된 진실 속에서 헤엄치다 오히려 길을 잃어가는 게 아닌지 묻는 것이죠.

<댓글부대> (Troll Factory, 2024)


배우들의 연기에 추진력이 충만하지 않았다면 이 생각보다 더 기이한 이야기를 따라가기 더욱 힘들었을 것입니다. 화자 역할인 기자 임상진 역의 손석구 배우는 시작과 결말부의 내레이션으로 극을 카리스마 있게 열고 닫음은 물론, 진실을 좇는 자이자 진실 속에서 헤매는 우리들과 가장 가까운 처처지의 인물로서 우리들을 힘있게 대변합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분투하지만 여러 약점들로 인해 흔들릴 수 밖에 없는, 이상적이지 않은 기자이자 동시대의 현실적인 정보 생산자의 모습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죠. 한편 여론조작 집단 '팀알렙'의 세 멤버 찡뻤킹, 찻탓캇, 팹택을 연기한 김성철, 김동휘, 홍경 배우의 호흡은 기대보다 더 만족스럽습니다. 앞장서서 리스크를 감수하는 리더로서의 찡뻤킹, 속내를 알 수 없는 크리에이터로서의 찻탓캇, 공격적인 한편 몹시 유약한 아이 같은 팹택까지. 여론을 형성하고 조작해 가는 이들의 어두운 에너지를 보여주는 그들의 모습에서 군래 한국영화에서 보기 드물었던 성실하고 유능한 젊은 배우들의 활기가 느껴집니다. 


여러 층위를 이루고는 이를 뚫고 파고들다 불현듯 안과 밖을 뒤바꿔놓기도 하는, 뫼비우스의 띠처럼도 느껴지는 <댓글부대>의 입체적 모양새는 분명 호불호를 타겠으나 확실히 도전적으로 다가옵니다. 감독의 전작과 비교했을 때 어쩌면 수위만 '15세 관람가'로 낮아졌지 (그마저도 최근 여타 15세 관람가 영화들에 비해서는 수위가 낮은 편입니다) 전개 방식의 대담성은 오히려 (심지어 예산이 현저히 적었던) 전작보다도 높아졌다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영화가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게 가능한 것은 영화가 다루고 있는 소재가 온라인을 통해 이뤄지는 여론조작 세태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당하는 입장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은 그렇지만도 않기에, 우리가 지금 이 온라인 환경에서 은연중에 드러내는 단어 하나 문장 하나까지도 진실의 농도에 영향을 미치기에,그런 식으로 세상의 수많은 '썰'들이 거짓을 머금고 진실의 이름으로 위세를 떨치는 데 일조하기에 가능한 안과 밖, 앞과 뒤가 구분되지 않는 이야기가 <댓글부대>에 담겨 있습니다. 


<댓글부대> (Troll Factory,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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