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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만 May 26. 2024

액션의 천의무봉 위에서 쏟아내는 포효

인상적인 영화리뷰 2024 -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Furiosa: A Mad Max Saga, 2024)


2015년 개봉해 세계적으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던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의 프리퀄인 영화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는 전편을 연출한 조지 밀러 감독이 그때 그 에너지 그대로 담아 다시 선보인 작품으로, 전편에서 타이틀롤인 맥스보다도 더 뜨거운 반응을 일으켰고 창작자 자신도 타이틀롤보다 더 중점을 두어 연출한 핵심 캐릭터 퓨리오사의 전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에너지로 내일이란 없다는 듯이 질주하던 퓨리오사의 모습 자체가 이미 당위였던 만큼, 그가 그러한 삶을 살게 된 기원에 대해 되짚을 필요가 굳이 있겠는가 하는 이의 제기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달리는 것이 그 에너지를 어디서 얻는지 알 필요가 있듯, 퓨리오사의 분노 어린 여정은 어디서부터 출발했는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더구나 이 뜨거운 여정의 기반에 깔려 있는 휴머니즘을 인지한다면, 휴머니즘의 뿌리가 어디인가를 깨달을 때 비로소 그 휴머니즘은 더욱 굳건해진다는 것을 영화를 보고 난 뒤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문명이 붕괴된 후 45년이 지난 시점. 황폐해진 세상 가운데에도 푸른 숲이 울창하고 먹을 것을 경작할 수 있는 땅이 일부에는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녹색의 땅'이라 불리는 그곳에는 '부발리니'라는 모계 부족이 기반을 두어 살아가고 있었죠. 부발리니의 일원인 어린 퓨리오사(안야 테일러-조이)는 어느날 과실을 따러 갔다가 디멘투스(크리스 헴스워스)가 이끄는 폭력적인 바이커 군단의 눈에 띄어 납치되고 맙니다. 퓨리오사의 어머니가 퓨리오사의 흔적을 쫓아 끈질기게 추격해 오지만, 어머니는 그만 퓨리오사가 보는 앞에서 디멘투스와 그 일당들에게 잔혹하게 살해 당하고 맙니다. 자원이 풍부한 가스 타운과 무기 공장, 시타델 등을 하나씩 점령하려는 야심을 품은 디멘투스는 마치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퓨리오사를 끌고 다니며 황무지 곳곳을 누비던 중, 시타델을 찾아 그곳의 지도자인 임모탄 조(리치 험)와 혈맹에 기반한 거래를 맺습니다. 혈통을 보존하기 위해 많은 여성들을 자신의 '신부'로 거느리고 있는 임모탄 조에게 퓨리오사를 신부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타델에서 고통받는 여성들의 현실에 경악한 퓨리오사는 신부로서의 삶 대신 화물꾼 병력으로서의 삶을 택하고, 그 능력을 점차 인정받아 근위대 역할을 맡게 됩니다. 그렇게 퓨리오사는 시타델에서 점차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면서도,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고향인 '녹색의 땅'으로 돌아가겠다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고자 디멘투스를 향한 복수의 칼날을 갑니다.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Furiosa: A Mad Max Saga, 2024)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는 제작 소식이 들려왔을 때 크나큰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자아냈습니다. 전편에서 처음 등장해 결코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긴 퓨리오사는 지난날 혹은 앞날이 궁금한 캐릭터였고 영화 한 편에서만 만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인물이 분명했습니다. 때문에 그를 주인공으로 한 또 다른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소식은 분명 반가웠으나, 문제는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가 영화적으로 남긴 족적이 너무나 강렬했다는 점입니다. 미쟝센에 대한 지독한 애착과 진보적이면서도 명료한 메시지, 혼신의 연기로 구축된 살아 숨쉬는 캐릭터가 결합된 영화는 설령 창조한 당사자인 조지 밀러 감독조차도 다시 그대로 재현할 수 있을지 의심될 만큼의 역작이었습니다. 그런 기대와 우려를 함께 안고 등장한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는 전작이 보여준 그 정신 나갈 듯한 에너지의 액션은 반드시 창조자 본인만이 재현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보여줍니다. 팔순의 거장 조지 밀러 감독이 세월에 전혀 풍화되지 않은 활력 그대로, 9년 전 세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황무지의 폭풍 같은 액션은 다시 현현하기 때문입니다. 전편이 보여준 액션 시퀀스의 스케일과 독창성이 워낙 독보적이었기에, 이번 영화가 보여주는 액션의 신선함이 전편에만큼 미치지 못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둔중한 트럭들이 좌우 위아래로 춤을 추듯 드넓은 사막을 휘저으며, 하늘과 모래 밖에 남지 않은 황무지를 꼭 채우며 만들어내는 무자비한 충돌과 폭발의 시퀀스는 여전히 다른 어떤 영화들도 넘볼 수 없는 독보적인 위치를 점합니다. 인해전술이나 CG의 트릭에 기대지 않은, 사람의 땀 냄새와 탈 것의 기름 냄새가 뜨겁게 부딪히며 빚어내는 순수한 아드레날린의 쾌감은 9년 전 운때를 잘 만나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조지 밀러라는 '마스터'가 시네마를 향한 멈추지 않는 열정과 탐구 끝에 빚어낸 필연적 노력의 산물임을 다시금 입증해 냅니다. 


다만 이번 영화가 전편과 확연히 다른 점이 있다면 서사가 한층 두터워졌고 감정이 한껏 진하게 끓어오른다는 점일 것입니다. 전편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속 이야기의 중심에는 퓨리오사가 임모탄의 신부들을 탈취한 후 벌어지는 며칠 간의 '사건'이 있었다면, 이번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속 이야기의 중심에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15년에 걸친 퓨리오사란 인물의 '서사'가 있습니다. 이 서사를 영화는 5개의 챕터에 걸쳐, 시간을 때로는 적당히 흘려 보내거나 떄로는 적당히 건너 뛰어가며 다루죠.  때문에 내내 지뢰밭처럼 깔려 있던 액션이 수시로 폭발하던 전편과 달리 액션이 주가 되지 않는 시퀀스들도 자주 등장하며, 그래서 호흡이 좀 더 차분하고 느릿느릿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영화가 이처럼 15년의 세월을 취사선택하는 와중에도 놓치지 않고 집중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주인공인 퓨리오사의 분노와 슬픔입니다. 그녀로 하여금 극악의 상황 속에서도 결코 생에 대한 애착을 놓지 않게 하는 것은, 혹독한 사회 속에서도 시타델 최고의 사령관 자리에 오르게끔 하는 것이 그의 내면에 알알이 맺힌 바로 그 분노와 슬픔의 감정일 것입니다. 퓨리오사의 분노는 단순한 감정에 머물지 않으며 그의 마음과 행동과 세계가 서로 손을 맞잡고 움직이게 하는 동력원이 됩니다. 야만적인 존재들로부터 어머니를 잃은 슬픔, 소중했던 사람들을 잃고 터전을 떠나와야만 했던 현실이 자아내는 울분은 반드시 되갚아주겠다는 복수심과 함께 그렇게 빼앗기고 도망쳐 나온 '녹색의 땅'으로 다시 돌아가고 말겠다는 불굴의 의지를 일으켜 세웁니다. 야만으로 뒤덮여 생명력을 잃은 세계에서, 그 분노와 슬픔의 감정이 퓨리오사를 홀로 질주하게 하고 그 질주의 목표 지점은 파괴와 파국이 아니라 생을 향한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미래라는 것이 종적을 감추고 세상 모든 존재들이 스스로의 존엄이 그저 자연히 파괴되기만을 기다리는 듯한 시간 속에서, 슬픔으로부터 태어난 그녀의 분노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인간적이고 존엄한 것으로서 무력한 세상 한 가운데를 휘몰아치게 되는 것입니다.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Furiosa: A Mad Max Saga, 2024)


인물이 하나의 거대한 세계관을 움직이는 장기말 역할을 하는 게 아니라 거대한 세계를 움직이는 중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이처럼 퓨리오사라는 인물의 서사를 힘과 공을 들여 다루는 조지 밀러 감독의 솜씨는 각별히 귀하게 다가옵니다. 그만큼 그런 인물을 그려낸다는 것은 배우에게는 고난이도의 과제가 될지도 모르겠는데, 타이틀롤 퓨리오사 역의 안야 테일러-조이는 그 어려운 과제를 박력 넘치게 완수해 냅니다. 거물 선배 배우인 샤를리즈 테론이 이미 완성형으로 보여줬던 만큼 부담도 매우 컸을 퓨리오사라는 캐릭터에 각성과 성장의 결을 더하고, 삶의 전반부 시점에서 아직은 선연히 끓어오르는 분노와 슬픔의 감정을 생생히 그려내며 우리가 아는 퓨리오사가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강렬하게 만들어냅니다. 물론 몸을 사리지 않고 다수의 격렬한 액션 스턴트를 소화하는 역량 또한 뛰어나고요. 한편 퓨리오사의 숙적이자, 어쩌면 지금의 퓨리오사를 만들어낸 일등공신이기도 할 복잡다단한 존재인 디멘투스 역을 연기한 크리스 헴스워스 또한 인상적인 연기 변신을 보여줍니다. 악랄하고 이기적이기 이를 데 없는, 그래서 한편으로 무척 나약하고 비루해보이기도 하는 인물의 입체적인 면모를 표현하며 1차원적인 빌런 이상의 '안타고니스트'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속 퓨리오사는 전편에서와 마찬가지로 말이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디멘투스 등 그와 대립하는 자들이 더 말이 많죠. 퓨리오사는 몇 마디 말을 더 얹을 시간에 자기 몸을 혹사시키면서까지도, 소중한 팔 하나를 잃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도 광활하고 혹독한 결투의 현장으로 스스로를 내던지기를 택하는 듯 합니다. 그런 선택을 감행하는 것은 어쩌면, 분노에 찬 외침마저도 가차없이 삼켜버리는 내일 없는 황무지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한 또 다른 형태의 '포효'가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게 전편에서 불현듯 혁명의 아이콘처럼 등장했던 퓨리오사는 이번 영화를 통해 세상이 끝난다 해도 식을 수 없는, 세상이 존재하는 한 식을 수 없는 분노를 일생동안 품어온 이로서 필연적으로 탄생할 영웅이었음을 스스로 보여줍니다.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Furiosa: A Mad Max Saga,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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