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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만 Jun 29. 2024

고요 속에서 비로소 들리게 된, 살고 싶다는 외침

인상적인 영화리뷰 2024 - <콰이어트 플레이스: 첫째 날>

<콰이어트 플레이스: 첫째 날>(A Quiet Place: Day One, 2024)


'콰이어트 플레이스' 시리즈의 프리퀄 성격을 띠는 첫 스핀오프작인 영화 <콰이어트 플레이스: 첫째 날>을 보았습니다. 흥행과 비평 면에서 모두 성공한 전작의 세계관이 처음 시작된, '재앙의 첫 날'을 다루는 영화는 그래서인지 이전에 나온 1,2편과 꽤 상반되는 듯 하면서도 비슷한 면을 공유합니다. 인적이 드문 외딴 시골이 아닌 대도시 뉴욕을 배경으로 하는 만큼 시퀀스의 규모감이 한층 커졌다는 점은 전편과 상반되지만, 재앙 속에서 살아남으려 하는 인간들의 강인한 의지과 연대를 다룬다는 점은 전편과 통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시리즈 고유의 정서나 장르적 쾌감을 적당히 계승하면서도, 감독이 특유의 시선을 적절히 투영해 휴먼드라마적인 접근을 했다는 점에서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론 만족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 샘(루피타 뇽)은 뉴욕에 사는 암환자입니다. 현재 호스피스 센터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보아 머지않아 작별을 기약하게 될 것 같습니다. 때문에 세상의 그 어떤 것에도 애착이나 관심조차 없던 그녀는, 공연 단체 관람에도 심드렁해 하다가 피자를 먹으러 가자는 간호사 루벤(알렉스 울프)의 제안에 선뜻 시내 나들이에 나섭니다. 그러나 그렇게 바깥으로 나오자 그녀가 목격한 것은 종말의 시작이었습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셀 수 없이 많은 괴물들이 쏟아지더니, 소리를 내는 것은 무엇이든 쫓아와 절멸시키기 시작한 것입니다. 더구나 이곳은 평균 소음이 90데시벨이라는 뉴욕인 만큼, 참상은 순식간에 도시를 뒤덮습니다. 아비규환 속에 홀로 남겨진 그녀는 도시를 헤매다 낯선 청년 에릭(조셉 퀸)을 만납니다. 로스쿨을 다니러 영국에서 건너왔다는 그는 잔뜩 불안에 휩싸여 있는데, 샘은 그런 에릭과 서로 의지하며 여정을 시작합니다. 봉쇄된 도시 바깥으로 탈출시켜줄 배가 있다는, 그리고 그녀의 그리운 고향이 있는 곳으로, 어쩌면 그녀 생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여정을 말이죠.


<콰이어트 플레이스: 첫째 날>(A Quiet Place: Day One, 2024)


<콰이어트 플레이스: 첫째 날>은 전작인 <콰이어트 플레이스 2> 초반부에 잠시 등장했던 재앙의 첫째 날을 본격적으로 다루며 우리가 알던 세계가 어떻게 그처럼 고요한 곳으로 하루아침에 뒤바뀌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앞서 나온 1,2편이 눈에 띄었던 것은 팝콘 씹는 소리마저 용납할 수 없을 만큼 조용한 환경에서의 팽팽한 긴장감도 있지만, 생에 대한 의지로 치열하게 내달리는 한 가족을 중심으로 생존을 향한 열망을 강하게 불태우는 인간들의 이야기로 영화가 서늘하지 않고 뜨겁게 박동하게 만들었다는 점도 클 것입니다. 이런 재난영화에 으레 등장하게 마련인, 재난 피해자들 사이에서 빌런의 등장과 그로 인해 일어나는 도덕적 혼란 같은 요소들을 걷어낸 것이죠. 전작의 이야기와 연관성은 없으면서도 재앙의 시작을 다룬다는 점에서 시리즈의 정통성을 띠는, '스탠드얼론 프리퀄'이라는 독특한 위치에 있는 이번 영화는 영화 속 디스토피아가 어째서 그토록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뜨거운 심장을 잃지 않게 되었는지 그 기원을 보여주려는 듯 합니다. 전편과는 정반대의 환경인, 평균 소음 90데시벨로 끊이지 않는 비명소리를 듣는 수준과 같은 소음이 이어진다는 뉴욕을 배경으로 영화는 볼거리 면에서 일단 전편과는 차별점을 둡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괴물들은 환한 대낮부터 도시에 들이닥치고, 도시를 채우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비명횡사 하는 모습은 호러에 가까워 보였던 전편과는 확실히 다른 재난영화 같은 인상을 줍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주인공들의 처지 역시 전편과 상반됩니다. 끈끈한 가족애로 극한의 상황을 버텨나갔던 전편의 가족들과 달리, 이번 영화에서 주인공 샘과 에릭은 철저히 고독한 인물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두 사람이 하루아침에 고요 속에 뒤덮인 도시를 위태롭게 누비면서, 이 영화가 우리에게 보여주려 했던 이야기가 비로소 펼쳐집니다.


세상을 삽시간에 혼돈으로 이끄는 재앙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뒤, 영화는 그 폐허를 통과하는 인물들 각자의 내면과 서로 간의 유대를 내밀하게 들여다 봅니다. 호스피스 센터에 머물러야 할 만큼 더는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인 암환자 샘은 그래서인지 세상의 모든 것에 애정이나 관심이 없어 보였습니다. 오늘 저녁에 죽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 같았던 그녀는 그러나 이 뜻밖의 재난 속, 험난한 길을 함께 해 줄 낯선 동료를 만나면서 잊고 있었던 삶의 빛을 다시 느끼기 시작합니다. 지금 이 상황을 버티어 낸다 한들 여전히 내일을 기약할 수는 없겠지만, 지난날의 추억이 깃든 피자를 먹겠다는 결심으로 이어가는 걸음은 그녀가 지나온 찬란했던 삶을 다시 상기시킵니다. 한편 꿈을 위해 낯선 도시로 날아와서는 난데없는 객사의 위험에 처하게 된 청년 에릭은, 공황장애로 과호흡하며 불안에 떨던 모습이 샘과의 동행으로 점차 변화해 갑니다. 자기 목숨도 지켜내지 못할 것 같았던 나약한 이는, 자신을 지켜주고 이끌어주려는 낯선 이와의 동행을 겪으며 자신 또한 다른 생명을 기꺼이 지킬 수 있을 만큼의 용기를 얻어갑니다. 여기에 그들이 느끼는 인류애의 또 다른 매개체라고 할 수 있는, 호스피스 센터에서 환자들의 심적 안정을 위해 길러진다는 '서비스 캣' 프로도의 존재까지. 서로를 의지하고 믿으며 마침내 자기 자신까지 성장해 가는 이들의 여정은 괴물들의 강력한 공격을 은은하지만 깊게 제압하며 예기치 않은 감동의 파문을 불러옵니다.


<콰이어트 플레이스: 첫째 날>(A Quiet Place: Day One, 2024)


전작 <피그>에서 잊고 있었던 내면의 진실을 발견하고 회복에 나서는 인물을 그리며 감동을 주었던 마이클 사노스키 감독은 '콰이어트 플레이스' 시리즈의 정체성과 인간을 향한 감독 자신의 시선 사이에서 적절한 절충점을 찾은 듯 합니다. 그 혼란한 괴물들의 공격 속에서도 인물의 감정선과 그들이 교차하며 빚어내는 감정의 그물을 그리기를 소홀히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영화는 재난영화의 틀 안에서도 배우들의 깊고 풍부한 연기를 보여줍니다. 특히 아카데미 수상에 빛나는 루피타 뇽이 보여주는 샘의 모습은 장르의 한계를 뚫고 섬세하고 진한 울림을 전합니다. 자칫 지극히 전형적이고 위화감을 일으킬 수 있는 인물의 변화와 각성을 생생하게 그려내며 예상보다 더 진한 감동을 전합니다. 한편 '기묘한 이야기' 시리즈로 스타덤에 오른 신예 배우 조셉 퀸 역시 불안에 떨던 청년이 점차 강인해져 가는 과정을 빤하지 않은 터치로 표현하며 두 주인공의 유대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줍니다. 이에 더해, 투실투실하게 생겨서 무심할 것 같으면서도 친절하고 활동적인 고양이 '프로도'를 연기하는 두 마리의 고양이 '슈니첼'과 '니코'의 마스코트 이상의 존재감 또한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끊이지 않는 비명만큼 커다란 소리를 백색소음처럼 떠안고 살아가던 도시에서는 심장 박동이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심장이 뛰고 있지 않아도 나는 살아있다고 적잖은 사람들이 착각했을지도 모르죠. 그러나 도시가 조용해지자 비로소 심장 박동이 들리기 시작하고, 사람들은 그 박동에 반응해 열렬한 생의 의지로 스스로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콰이어트 플레이스: 첫째 날>은 꾸준한 스펙터클로 볼거리를 제공하는 재난영화를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도 있겠으나, 재난 이후 세상을 뒤덮은 고요 속에서 비로소 박동하는 심장을 안고 움직이는 인물들의 감정선은 여느 재난영화 수준을 뛰어넘어 짙은 여운을 남깁니다. 도시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적막 속에서 울려퍼지는 마음으로부터의 외침은 비로소 그들 자신에게 들리기 시작하듯,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까지 전해 옵니다.


<콰이어트 플레이스: 첫째 날>(A Quiet Place: Day One,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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