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가 너의 울음을 듣기 전에

<곡성> - 나홍진 감독

by 김진만
968d0d0650332852d6c95ce241514f2ce93a47e4.jpg <곡성>(The Wailing, 2016)


- 스포일러 듬뿍 담겨 있습니다 -

필모그래피에 올라 있는 장편영화는 두 편 뿐이지만 나홍진 감독은 이미 한국영화계에서 무시무시한 감독으로 자리매김했다. 이제 막 경력이 발돋움하기 시작한 감독으로선 극히 보기 드문 완벽주의와 악착같은 연출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적당한 선에서 머무는 법이 없이 어둠의 끝까지 다다르는 지독한 묘사력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영화 속에선 늘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악의 존재가 세계를 점령했다. 힘없는 존재가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며 그런 악과 맞서지만, 결국 참극은 벌어지고 악과 맞서던 존재는 주저앉고 만다. <추격자>는 그나마 연쇄살인범과 피해자 측근의 추격전이라는 얼개를 바탕으로 범죄 스릴러 장르물의 전형을 갖고 놀며 관객의 심리를 쫄깃하게 하는 만큼, 감독이 비추는 악의 그림자와 그 아래 무릎꿇은 약자의 모습을 들여다 보는 부담감이 덜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다음 작품 <황해>는 도무지 수렴될 줄 모르고 파생되어갈 뿐인 폭력이 대하사극 못지 않은 러닝타임을 채우면서, 스릴러물로서의 쫄깃함보다 세상을 뒤덮고 약자를 짓밟는 폭력의 파장이 주는 공포감과 허무함이 더 컸더랬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황해>를 처음 봤을 때 그 질긴 악의 기운에 거부감이 좀 느껴지기도 했었다. (물론 그 거부감에는 이런 영화를 연말연시용으로 내놓은 배급사에 대한 감정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마도 나홍진 감독은 세상에 비집고 들어와 그 영향력을 확장해 가는 악의 존재에 대한 탐구를 지속하려는 듯 보이는데, 그러다 보니 이대로 가다간 기가 막힌 대중영화 데뷔작으로 부상한 그를 떠나가는 일반 관객들이 많아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던 그가 6년 만에 절묘한 합일점을 찾았다. 현실에 드리우는 악의 그림자를 조명하는 수단으로 심령 호러라는 초현실적인 장르를 가져온 것이다. 실제 사건, 실제 상황을 연상시키는 설정이나 사실적이고 근접적인 묘사 대신, 실제 사건을 떠올릴 수도 없는 설정과 실제 지역적 특성이 별달리 반영되지도 않은 환경 위에 현실에서 일어날 만한 가능성을 넘어선 수준의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다. 제목도 옛날 옛적 국산 공포영화를 연상시키는 <곡성(哭聲)>이다. (실제 지명을 연상시킨다는 우려가 적지 않았으나, 사실 개인적으로는 그 옛날 공포영화 <여곡성>을 먼저 연상시키는 제목이었다.) 그 덕분에 영화는 끔찍한 범죄 스릴러보다 극적 장치로서 비현실적 폭력이 어느 정도 수긍되는 호러물로 인정되었는지, 15세 이상 관람가 등급을 받으며 나홍진 감독의 영화로는 최초로 청소년도 볼 수 있는 영화가 되었다. 그러나 영화의 주요 키워드를 활용하면 이 영화가 받은 '15세 이상 관람가'라는 등급부터가 '미끼'에 가깝다. 이런 안전장치 위에서 감독은 그 거대한 손아귀를 뻗치는 악과 그 손아귀에 휘둘리는 약자의 관계를 작정하고 탐구한다. 그 결과 우리는 감독의 영화 중 가장 포용 관객층이 넓은 이 <곡성>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악의 축제를 목격한다. 그 중심에 똘끼 가득한 영화적 인물이 아닌, 우리 누구나와도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인물이 서 있어서 더욱 무섭다. 심령 호러물의 얼굴을 한 이 영화는 어째서 왠만한 호러물들을 봐도 재미있게 잘 봤다 싶은 나 같은 관객마저 오들오들 떨게 하는가.


a797cb05da093e559e2e9491d9765f265da1819d.jpg <곡성>(The Wailing, 2016)


곡성파출소에서 근무하는 경찰 종구(곽도원)는 여우 같은 아내(장소연)와 토끼 같은 딸 효진(김환희), 욕은 많이 하시지만 살뜰한 장모(허진)와 단란한 가정을 꾸려가는 평범한 가장이다. 느긋하게 이어지던 그의 일상을 깨뜨린 것은 마을에 갑자기 발생하기 시작한 연쇄 사건. 아내와 이웃집 남자를 끔찍하게 살해하거나, 집을 완전히 불태우거나 하는 식의 갖가지 끔찍한 사건이 마을 전체에 걸쳐 발생하는데, 공통점은 그 사건들을 저지른 이들의 몸에 하나같이 두드러기가 빼곡하게 돋아나 있었다는 것이다. 경찰은 이 일련의 사건들이 집단 버섯 중독에 의한 결과라고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리지만, 마을에서는 어느 날부턴가 외딴 숲속에 자리를 잡고 살기 시작한 외지인 때문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다. 그 외지인이 이 연쇄 사건을 퍼뜨린 주범이라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정체불명의 여인(천우희)이 종구에게 다가와 자신이 사건 현장을 목격했다고 주장하더니 홀연히 사라지고, 외지인에 대한 종구의 의심은 짙어져만 간다. 급기야 종구의 딸 효진까지 앞선 사건의 피의자들이 보인 증상과 유사한 증상을 보이며 앓기 시작하고, 마음이 다급해진 종구는 외지인의 집을 찾아가 행패를 부리는 한편 용하다는 무속인 일광(황정민)을 불러들여 굿을 벌이기로 한다. 과연 외지인이 이 모든 사건의 발단인 것일까. 그리고 효진은 무사히 일어날 수 있을까.

<곡성>은 국내외를 통틀어 근래 나온 한국영화들 중 보기 드물게 관객의 정신을 '장악'해 버리는 영화다. 어디까지나 간접경험일 뿐인 영화를 보면서 관객이 어째서 '지켜보는 자'로서의 쾌감을 느끼는 걸 넘어서 아예 정서적으로 장악되어 버린단 말인가. 그것은 영화가 보는 이를 혼란에 빠뜨릴 만큼 칠갑이 된 피와 황폐화된 정신의 장을 한껏 펼쳐놓은 후, 그 공간과 풍경을 정의할 수 있는 열쇠를 관객에게 완전히 넘겨준 채 퇴장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떡밥은 있는대로 던져 놓고 답은 주지 않는 무책임한 영화라고 힐난할 수도 있겠으나, 이런 방식이 아니었다면 영화를 보고 난 뒤 우리가 이렇게 자리를 쉽게 털고 일어나지 못한 채 한동안 멍한 여운을 안고 있는 게 가능했을까 싶다. 모든 답이 정해져 있었다면, 우리는 영화 속에서 인물들이 제아무리 '혼돈의 카오스' 속에서 난리법석을 떨어도 '사실 답은 이건데' 하면서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영화는 이야기를 파악하는 관객의 위치를 절대 영화 속 인물들보다 앞서 배치하지 않음으로써, 인물이 느끼는 혼돈을 관객도 똑같이 느끼게 한다. 영화 안과 밖에 존재하는 불안의 양은 대등하고 또 비례하며, 관객은 더 이상 인물들의 법석을 강 건너 불구경 하듯 지켜보지 못하고 스크린 방향으로 한껏 몸을 내민 채 들여다 봐야 하는 것이다.

(관객이 생각한 것이 정답이라고 밝힌 나홍진 감독의 말처럼, 아래의 해석도 설령 개인의 의견일지라도 답일 수 있는 것처럼 단정적으로 기술하였다.)


b6944976ee122d37006414981752738500300129.jpg <곡성>(The Wailing, 2016)


1. 미끼를 던지다

관객이 영락없이 영화에 집중할 수 있도록 <곡성>은 영민한 전략을 구사했다. 바로 '불분명한 묘사'와 '유머감각'이다. 전자의 방식으로 관객의 주목을 끌고, 후자의 방식으로 관객 마음 속에 걸쳐져 있던 빗장을 푸는 것이다. <곡성>이 많은 이들의 예상을 깨고 '15세 관람가' 영화로 나온 데 대해 나홍진 감독은 앞선 인터뷰에서 <황해> 때 한 여성관객이 눈을 가리는 걸 보고 많은 생각이 들었으며, 그로 인해 표현 방식을 좀 바꿔보고자 했다고 밝혔었다. 그리고 <곡성>이 실제로 보여주는 표현방식은 감독의 이 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니며 이 영화가 완성되는 데 적잖이 작용했음을 보여준다. <곡성>은 과정보다 결과를, 근경보다 원경을 보여주길 고집하면서 관객을 직접적인 자극으로부터 어느 정도 떨어뜨려 놓는다. 사람의 마음은 변덕스러워서, 눈앞에 직접 데려다 놓으면 기겁하여 도망가게 만들 광경을 또 막상 손톱만한 크기로 보일 만큼 멀찌감치 떨어뜨려 놔두면 몇 발짝 다가가서 확인하고 싶어 한다. 이런 대다수의 심중을 파악한 모양인지, <곡성>은 인물을 멀리서 풀샷으로 비춘 채로 한동안 내다보는 장면들이 더러 등장한다. 그 사람의 표정은 물론 행동도 제대로 확인하기 힘들 만큼 멀리 떨어져 있어서 불안과 공포를 자아내면서도 관객은 그게 대체 무슨 풍경인지 궁금함을 참지 못해 고개를 스크린 앞으로 들이밀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유머감각은 나홍진 감독의 전작들과 비교했을 때 특히 두드러지는 대목이다. 종구의 일상을 그리는 초반부에 기대 이상으로 웃긴 장면들이 여럿 등장하고, 심지어는 극의 긴장감이 극도로 치달아가는 후반부에 가서도 종구와 주변 사람들의 풍경 속에서 불쑥 우스운 장면을 만들어내며 관객을 당혹시키기도 한다. 감독이 관객들이 좋아할 요소이니 웃긴 장면들을 넣자고 할 사람이 아님을 감안하면, 예상 외로 이 영화에 풍성하게 들어앉은 유머감각도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표면적으로 유머감각은 만만치 않은 감독이 만만치 않은 이야기를 풀어냈을 거라는, 이 영화에 대해 관객들이 가지는 일종의 경계심을 어느 정도 상쇄시키는 작용을 한다. 갖은 비극들이 본격적으로 마을을 삼키기 전, 실없는 인물들이 웃음을 연출하면서 자칫 관객들이 보기 전부터 품었을 정서적 부담을 좀 덜어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영화가 관객들에게 얼마나 소구하느냐 하는 상업적인 측면에서 짐작해 볼 수 있는 부분이고, 영화가 뜻하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데 있어서는 유머감각이 좀 다른 역할을 한 것 같다. 이 영화가 심령 호러를 표방하고 있다 하더라도 영화 한복판에서 불쑥 튀어나온 가공의 인물이 아닌, 우리 같은 '가장 보통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일종의 선전포고처럼 보인 것이다.

<곡성>의 주인공 종구는 <추격자>나 <황해>의 주인공들처럼 선천적으로 어둠을 먹고 자란 것만 같은, 영화적 카리스마로 시작부터 관객을 압도하는 이들이 아니다. 사람이 죽었다는 신고가 들어왔는데도 서둘러 간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오냐는 장모의 말에 아침부터 챙겨먹고 볼 만큼 종구는 시작부터 허술한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사람 좋고 가족에게도 지극정성이지만 겁도 많고 감정에 곧잘 휩쓸리는 종구는 물론, 그가 일상을 보내는 친구들과 동료들까지도 시골의 평범한 '아재'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런 인물들의 넉살 좋은 풍경들이 그려지면서 관객은 영화에 좀 더 적극적으로 빠져들게 되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다. 영화가 무시무시하고 어두운 이가 아닌 유머러스하고 평범한 이를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것은, 그만큼 이런 사람마저 변하게 할 더욱 강력한 어둠의 폭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뜻임을 진작에 알아차려야 했다는 것이다.


b12fb8721488936ddb16b0fd6fe6a51fc3438707.jpg <곡성>(The Wailing, 2016)


2. 미끼를 물다

우거진 산과 숲, 걸핏하면 내리는 비 속에서 인간의 실루엣은 다른 곳보다 유독 희미하게 느껴진다. 모든 것이 불명확해서 관객은 게슴츠레 뜬 눈으로 인상을 쓴 채 그 모든 공간들을 둘러 살펴야 할 것만 같다. 그러던 차에 앞서 영화가 미끼로 던졌을 불안하고 당혹스런 풍경들, 그 사이에서 불쑥불쑥 나타나 마음을 주무르는 유머에 마음이 이끌리고, 이에 관객은 위치도 방향도 알 수 없이 수풀로 우거진 마을에 정신을 뺏긴 채로 돌아다니다가 불현듯 되돌아갈 수 없는 공간 안에 빠졌음을 깨닫게 된다. 종구를 따라 관객의 마음에도 의심의 싹은 돋아났고, 싹이 자라나 줄기를 뻗어 심중을 얽어매는 건 한 순간이다. 아름다운 곡성의 풍광과 인간적인 캐릭터들, 그 속의 신비로운 이야기들로 이루어진 미끼를 관객들이 마침내 물자, 영화는 낚싯대를 세차게 흔들며 챔질을 하기 시작한다.

'의심'은 영화가 본격적으로 관객을 휘두르게 되는 중요한 전환점이다. 마을에서 일어나는 연쇄 사건의 원인이 외지인일지 모른다는 소문 뒤, 어떤 일을 계기로 정말 그 외지인의 짓일지 모른다는 실질적인 의심이 두드러기처럼 확산되기 시작한다. 논리적으로 설명 불가능한 일련의 현상 앞에서, 인간은 그런 현상에 엄연히 원인이 있다고 믿을 때 점점 안심하게 된다. ("이렇게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거이유"라는 대사처럼 말이다) 이를 규명하기 위한 실재적인 노력이 아직 본격화되지 못한 상황에서, 인간은 불가사의한 위협이 주는 두려움을 어떻게든 해소하고자 성급하게 의심이라는 수단을 꺼내든다. 그 의심이 두려움을 애써 흩뜨리기 위한 고육지책이며 위태롭게 마음을 지탱하고 있는 모래성과 같은 것임을 알더라도 말이다. 사건의 원인으로 외지인이 지목되고, 효진의 증세가 악화되자 종구가 외지인의 집을 찾아가 행패를 부리고, 나아가 외지인을 내쫓고자 거액을 들여 살굿을 벌이는 것도 그렇게 두려움을 애써 가리기 위한 의심에서 비롯된 행위들일 테다. 살굿의 뜨거운 기운이 스크린을 가득 채울 때, 관객은 어느덧 이 굿이 실질적으로 효과가 있는지 따지는 수준을 넘어 불같이 타오르는 그 광기에 함께 몸을 벌벌 떨게 된다. 살굿은 이것이 정답이니까 하고 있는 행위라기보다, 나와 가족의 목을 조르는 공포를 꺼뜨리려는 노력을 그저 증명하기 위한 행위일지도 모르는 지점에 놓이게 된다. 나름 경계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처음 잠깐 안심한 사이에 관객이 만나는 것은, 불을 뿜는 의심과 옭아매는 두려움에 꼼짝없이 현혹되고 만 우리 자신이다. 종구의 앞에 펼쳐지는 걷잡을 수 없는 패닉의 연속은, 너흰 구경꾼이 아닌 연루자들이라며 우리에게 천연덕스럽게 손을 흔든다.


230bfdadad9b269bafe3dd92d0918fd3f1cb55a8.jpg <곡성>(The Wailing, 2016)


3. 챔질을 당하다

거부할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 그 틈새를 귀신같이 파고드는 어둠의 기운에 물리며 피묻은 생채기를 내기 시작한다. 영화가 그렇다고 극한의 상황에서 이렇게 분별력을 잃는 인간들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이건 인간의 나쁜 점이 아니라 오히려 슬픈 점이다. 이 영화가 주인공들을 '가장 보통의 사람들'로서 설정했을 거라는 앞선 말에서처럼, 두려움으로 인해 의심이란 안대로 자신의 눈을 가린 채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인간의 모습은 안타깝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본연의 성격이다. '나를 죽이지 않는 것은 그만큼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는 격언을 믿고 싶겠지만, 대부분의 인간들은 극한의 상황에 내몰렸을 때 이성을 놓치기 쉽다. 그리고 악은 이런 인간의 본성을 너무나 잘 알고는 그것을 인간을 통제하는 데 교묘하게 활용한다. 인간을 잡아먹는 형태로만이 아니라, 인간을 끌어안는 척하면서 바스러뜨리는 형태로도 접근하는 것이다. 그렇게 비로소 인간은 피할 곳 없는 어둠의 막다른 길 앞에 서게 된다.

여기서 또 한번의 비극이 생긴다. 악마와 수호자 사이에 선 인간이 수호자에 이끌리는 대신 악마에 현혹되기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단지 인간은 본능적으로 악에 이끌린다는 식으로 설명하긴 어려운 대목이다. 인간이 무엇에 잘 이끌리는지 악이 너무 잘 알고 있다고 하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악은 절대 우리가 있는 쪽으로 나서서 다가오지 않는다. 모처에 미끼를 쌓아놓고는 께름칙한 냄새를 풍기며 발길을 유혹한다. 누가 걸리든 상관없는, 누구라도 걸리면 그만인 개미지옥과도 같다. 반면 수호자는 경고를 위해 끊임없이 인간의 일상을 깨뜨리며 신호를 줘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신호를 곧잘 시끄러운 소란으로, 번잡한 돌팔매질로 판단하며 그만두라고 손사래친다. 스스로 악의 그림자로 이끌려 가는 이를 붙잡기 위해 수호자는 먼저 나서서 뭔가를 벌여야 하지만, 인간은 움직이는 쪽을 따르는 대신 가만히 있는 쪽에 스스로 현혹되기를 택하고, 이를 무척 잘 알고 있는 악은 끝까지 본래 얼굴을 숨긴 채로 어둠 속에서 두 팔을 벌리고 있다.


2e9bf728d05f8380f42e557db349e02e1973f8f5.jpg <곡성>(The Wailing, 2016)


4. 낚싯터에는 누가 있었나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의 정체를 명명백백히 알아채기에 인간은 너무나 유한한 존재들이다. 무자비한 챔질로 평범했던 인간도 사정없이 무너뜨리는 이 지옥과 같은 낚시터에는 대체 어떤 이들이 있단 말인가. 우선 악이 있다. 영화 속 외지인이 그런 존재다. 절대 먼저 나타나서 끌어들이는 법이 없듯, 절대 자신의 존재를 먼저 밝히지 않는다. 희생자를 선택하고는 그 희생자로부터 의심을 끊임없이 유발하지만, 최종 판단은 희생자에게 맡김으로써 '그것은 나의 잘못이 아닌 네 믿음의 잘못'이라고 책임 소재를 떠넘긴다. 한 인간의 영혼을 무너지기 직전까지 뒤흔들어, 그가 스스로를 부정하고 무너지기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든다. 그렇게 자신이 택한 희생자가 스스로 무너질 수만 있다면 그는 어떤 존재로도 변할 수 있다. 변태적인 외지인으로도 변할 수 있고, 죽음 앞에서 벌벌 떠는 범인으로도 변할 수 있다. 그리하여 희생자가 스스로를 무너뜨릴 수 있게 하는 판단을 유도해 내고야 만다. 악이 무서운 것은 희생자로부터 직접 무언가를 빼앗아가지 않고, 희생자가 스스로를 바치게끔, 스스로를 버리게끔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악의 하수인이 있다. 영화 속 일광이 그런 존재다. 그는 희생자가 혼돈에 빠지도록 일부러 외관상 악의 반대편에 선다. 그리고 인간들이 스스로 자신을 필요로 하고 불러오도록, 공공연히 자신의 평판을 적극적으로 쌓고 있다. 자신이 충성하는 악이 더 큰 목표를 실현하고 있을 때, 악의 하수인은 그 큰 목표를 위해 필요한 희생자들 사이에서 불거지는 소란을 막기 위해 개별적인 조치를 벌인다. 마음이 한껏 번잡해 있는 희생자들이 모든 것을 내걸고 자신에게 의지할 수 있도록 요란한 이벤트(이를테면 굿판)를 펼치며, 그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놔둔 채로 상황을 원하는 방향대로 종결시키려 노력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하수인인 만큼, 현재로서는 희생자들의 명을 빼앗는 데에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뿐, 악에 직접적으로 대항하는 수호자와 일대일로 맞닥뜨릴 거라는 상황은 미처 예측하지 못하고 그럴 경우 대처할 수 있는 능력도 마땅히 갖추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그가 있어 희생자의 몰락은 완성될 수 있다.

한편 이들과 맞서는 수호자가 있다. 영화 속 무명이 그런 존재다. 희생자가 될지 모르는 사람들의 소유물에 자신의 기를 입혀가면서 더 이상의 피해를 막고자 노력하지만, 희생자들 대부분이 악이 던지는 자극적인 미끼에 현혹되는 바람에 수호자의 경고를 신경쓸 겨를이 없다. 오히려 웬 정신 나간 놈인양, 성가신 존재인양 취급받는다. 악과 그의 하수인이 결코 무시못할 힘을 발휘할 수도 있지만, 그의 역량은 티도 잘 안나고 나도 빤한 형태로 나타나 보통 인간들의 주목을 끌지 못한다. 그렇기에 수호자가 제 뜻을 펼치기 위해서는 그를 향한 희생자의 믿음이 중요하다. 악이 자신의 힘으로 희생자의 믿음을 조종하는 존재라면, 수호자는 진실로 희생자의 믿음을 통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이쯤 되면 영화가 수호자를 너무 나약하게 그리는 것 아닌가 싶을 수도 있겠으나, 그만큼 인간이 악으로부터 구원받기 위해서는 그 누구에 대한 의존이 아닌 자신으로부터 우러나온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얘기하는 대목이기도 할 것이다.


83ab25f132c782a3ceca06e26590398337cc0ae9.jpg <곡성>(The Wailing, 2016)


5. 살굿의 정체

이들이 가장 공격적으로 뒤엉키는 순간이 바로 살굿 장면이다. 두 개의 굿이 동시에 일어나고 각각의 현장에서 효과 또한 발휘되다 보니 이 두 굿이 어떤 얼개로 이뤄지는지 궁금해하는 관객들이 많은 부분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이 두 개의 굿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악의 하수인'인 일광은 그 악질 중의 악질인 '허주'라는 존재에게 살을 날리고자 굿을 벌인다고 공언하지만 사실 이 굿은 앓아누워 있는 효진을 무너뜨리려는 굿이다. 일광이 벌이는 굿의 템포에 따라 효진의 고통 또한 심화되는 것이 컷과 컷의 연결을 통해 드러나지만, 여기에 외지인이 벌이는 굿이 끼어들면서 관객은 혼동하게 된다. 그나마 종구가 효진의 증상을 곁에서 계속 지켜봤기에 절정에 오르려던 굿은 끊어질 수 있었고, 효진은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얼핏 일광이 지키려는 효진에게 외지인이 쏜 살이 미치면서 두 개의 살이 맞붙는 장면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외지인은 앞에 사진으로 놓아 둔 박춘배라는 인물을 향해 굿을 벌이고 있다. 박춘배 역시 또 하나의 희생양이었으나, 그가 걸친 유니폼을 보고서 외지인은 범상치 않은 낌새를 차리게 된다. 사실 박춘배의 유니폼은 이 장면 훨씬 이전에 무명이 처음 등장할 때 이미 걸치고 있었다. 앞서 얘기했듯, 희생양이 될지 모를 인간을 지키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박춘배가 '수호자' 무명의 기운을 은연 중에 입었을지 모르는 바, 외지인은 박춘배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부리기 위해 보통의 희생양들에 대해서는 벌이지 않았던 굿을 구태여 벌였을 것이다. 그나마도 그를 계속 지켜보고 있던 무명의 방해로 굿이 미완에 그치면서 박춘배는 통제 불능의 상태에 놓이게 됐지만.

그렇다면 영화는 연관성 없는 이 두 개의 굿을 왜 굳이 교차로 보여준 것일까. 앞서 얘기한 바와 같이, 보통의 나약한 인간이라면 정신을 놓고 휘둘릴 수 밖에 없는 화려한 악의 축제를 보여주기 위한 것은 아닐까. 물론 이것이 곧 무속신앙 자체가 불순한 것임을 의미하진 않을 것이고, 다만 미약한 인간을 현혹시키기 위한 유인물로서 이용당한 것일테다. '역살을 맞을 수 있으니 매사에 조심하라'는 경고는 자신을 향한 의심을 차단하기 위한 연막일 뿐이다. 형언할 수 없는 혼란과 광기로 점철된 굿판이 시작된 순간 이성은 흩어지고 그 의식에 대한 절대적인 의존이 남을 뿐이다. 그 굿판 안에서 소용돌이 치는 광기를 관객들이 똑같이 느끼는 것도 당연하다. 벼랑 끝에 몰린 상황에서 악의 존재들이 또 한번 희생자들을 현혹하고자 만든 난장. 이 장면은 인간이 무기력하게 굴복할 수 밖에 없는 그 혼란을 체험해 보길 바라는 취지에서 생긴 장면인지도 모르겠다. 줄곧 이어지는 영화의 컨셉트와 마찬가지로 이 속에서도 '혼란은 당연한 것이다'.


f9b682af7eac99cb232d8b475a93dabe92bf1fb0.jpg <곡성>(The Wailing, 2016)


6. 그저 낚시일 뿐인가

결국 인간은 악의 챔질에 당하여 끌려나오고 만다. 인간을 향한 수호자의 경고이자 악을 향한 수호자의 덫이었던 금어초는 해골 모양으로 썩어지며 또 한 무리의 희생자들을 헤아렸다. 나홍진 감독이 만든 가장 넓은 연령대가 볼 수 있는 영화인지 모르겠으나, 결말은 가장 비극적이다. 그러나 이 비극이 과연 끝인가. 이 영화의 목적은 관객을 현혹시키고 의심케 한 끝에 이처럼 무자비하게 낚아올려, 수면을 벗어난 물고기처럼 관객들이 숨을 몰아쉬며 정신 못차리게 하는 것 뿐인가. 그렇기에는 마지막 종구의 되뇌임이 너무나 무겁게 내려앉는다. 흘러넘치는 피를 즈려밟고서 희생자들을 냉정하게 '기록'하는 악의 하수인 너머로, 종구는 마지막까지 아빠가 해결해주겠다는 말을 반복한다. 뒤늦게 자리잡은 신념, 끝내 지키지 못한 데 대한 후회가 뒤엉킨 이 말은 자책의 느낌이 강하다. 그러나 영화를 다 본 관객은 알고 있다. 그가 어떻게 노력으로 할 수 없는 일이었음을. 비록 무위에 그쳤지만,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음을.

악은 지독한 냄새와 미심쩍은 행동들로 두려움과 의심을 유발하여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곳에까지 유인해 놓고는, 여기까지 걸어온 네 발이 잘못한 거라며, 두려워하고 의심한 네가 잘못이라며 비난한다. 수호자는 끊임없이 경고의 메시지를 던지지만, 악이 펼쳐놓은 두려움의 장막에 그 메시지는 쉬이 보이지 않는다. 나약한 인간은 여기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지난 작품들에서 끔찍한 현실 범죄를 통해 현대 사회 전반에 잔혹하게 드리운 공포를 조망한 나홍진 감독은 <곡성>에 이르러 세상을 뒤덮은 이 공포 앞에서 힘없는 인간은 대체 어쩌란 말이냐고, 한탄한다. 그러나 그 한탄은 개선의 여지가 없는 세상을 향한 비관이라기보다, 이런 세상 속 불가항력적인 희생을 당한 이들 곁에서 함께 울어주는 행위에 가깝다. 적어도 한 사람의 울음소리만 듣고 악이 그를 정확히 찾아가 비집고 들어가서는 마지막 한 순간까지 무너뜨리게 놔두지 않도록. 악마가 누군가의 울음을 듣기 전에, 모두의 울음을 퍼뜨려 악이 혼비백산할 수 있도록 말이다.


a9c421ed040e21b260dd4d5e6c0c6d1b16be09bd.jpg <곡성>(The Wailing, 2016)


7. 우리는 잘못하지 않았다

<추격자>와 <황해>를 거쳐 <곡성>에 이르기까지, 악을 향한 나홍진 감독의 지독하리만치 끈질긴 연구가 거듭되며 어느 정도 결론이 보이는 느낌이다. 이건 악이 반드시 이긴다는, 악에 매혹되거나 탐닉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설령 우리가 그 악에 굴복당했다고 해도, 무참히 희생당했다고 해도 우리의 죄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과정에 가깝다. 그 증명을 위해 악이 얼마나 교활하고, 그 속에서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선택하는 것이 얼마나 혼란스러운 일인가를 악착같이 그려낸 것이다. 감독의 영화들 중 이 영화가 가장 무시무시하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가장 웃기고, 또 가장 아름다운(사건에 기겁하다가도 영화 속 곡성의 풍광은 때때로 숨이 막힐 정도다) 영화이기도 한 것 역시 변화를 당하기 전 인간의 원래 가치를 보여주려 한 것은 아닐까 싶다.

하루가 멀다하고 뉴스를 가득 채우는 각종 흉악범죄부터, 순식간에 많은 생명을 앗아가버리는 대형 참사까지. 굳이 이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는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라고 숱한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이 생각할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난다. 그러나 대개 그런 해악들을 저지른 자들은 모습을 교묘하게 감춘 채, 소중한 이들을 잃은 사람들에게 '네가 그때 그런 선택을 안했다면 이런 일이 없었잖아'라고 비웃으며 비열하게 올라간 입꼬리만을 드러낸다. <곡성>이 그리는 이야기도 어쩌면 그와 일맥상통할 것이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에게 전혀 맥락없이 들이닥친 악의 손길. 그 속에서 속절없이 겪는 변화와 희생이 같은 보통 사람의 입장으로서 당연히 지독하게 무서울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영화는 속으로, 그렇게 두려움에 휩싸인 우리들을 마지막까지 무너뜨리기 위해 악이 손을 뻗지 못하게 하려면 두려움을 남기지 말라고 말하는 듯 하다. 우리는 잘못하지 않았다는 믿음과 사랑했던 이들을 향한 마음만을 남기라고 말이다. 악마는 우리가 무너질 때에야 비로소 기록할 테니까. 장르를 탄탄하게 활용하면서 장르의 한계를 대담하게 뛰어넘으며 이런 풍성한 생각거리를 마련해 준 나홍진 감독과 제작진, 누구 하나 빠짐없이 강력한 연기로 영화의 이러한 질주와 초월에 엔진을 달아준 배우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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