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적인 영화리뷰 2025 - <28년 후>
<28년 후>는 대니 보일 감독과 알렉스 가랜드 각본가가 23년 만에 힘을 합쳐 만든 <28일 후>의 속편입니. 2002년에 나온 전편 <28일 후>는 좀비물 장르의 클리셰를 깨는 연출을 통해 21세기 좀비물 장르 르네상스의 포문을 연 역사적인 작품으로 기억되는데요, 그런 만큼 오리지널 창작진인 감독과 각본가가 다시 만나 강산이 두 번 바뀐 후 내놓는 속편에 전세계적인 기대가 모아졌더랬습니다. 예고편만 공개되어도 역대급 조회수와 화제성을 일으키며 높은 기대감을 반영했지만, 그렇게 오랜 기다림 후 선보여진 영화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습니다. 좀비물 장르의 새로운 방향성을 정립한 전편으로 인해 생겨난 속편에 대한 기대치를 보란듯이 배신한 것이 가장 크지 않나 싶습니다. 영화 한 두 편 만들어본 사람들도 아닌, 현재까지도 성공적인 필모그래피를 이어가고 있는 감독과 각본가의 이 선택은 고도의 전략인 건지 자충수인 건지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분노 바이러스'의 창궐로 영국 전역이 궤멸된 후 완전 격리된지 28년이 흘렀습니다. 외부로부터 철저히 차단된, 행여 외부로부터 들어온다고 해도 다시 꺼내줄 수 없는 곳이 된 영국의 시간은 다르게 흐르고 있습니다. 생존자들 일부는 본토로부터 멀리 떨어진 섬 '홀리 아일랜드'에서 그들만의 공동체를 이루었고, 더 이상 문명의 이기를 누릴 수는 없지만 그나마 평온한 삶을 이어가고 있죠. 물론 그 평온한 삶을 영위하는 데에 희생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고요. 이곳의 아이들은 청소년이 되면 본토로 나가 감염자들을 사냥하는 '첫 출정' 의식을 치르는데, 제이미(애런 존슨)의 아들인 12세 소년 스파이크(알피 윌리엄스)는 좀 이른 나이에 첫 출정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착하고 효심깊은 스파이크는 아픈 어머니 아일라(조디 코머)가 행여 만류할까 학교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아버지 제이미와 함께 첫 출정에 나서고, 그렇게 당도한 본토에서 다양한 형태의 감염자들과 마주하고 그들과 사투를 벌이면서 끔찍한 경험을 합니다. 그동안은 경험한 적 없던 죽음의 공포를 느끼며 세상은 너무나 무서운 곳임을 깨닫지만, 어쩐지 세상은 이 진실을 애써 모른 척 하는 것만 같습니다. 본토 멀리에 있는, 시체를 수집하는 미치광이 의사라는 켈슨 박사(랄프 파인즈)에 관한 소문도 듣습니다. 더는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 없는 스파이크는 섬과 본토 사이, 자신만의 결단을 내리기에 이릅니다.
2002년작 <28일 후>의 공식적인 속편이지만, 전편을 꼭 챙겨봐야 할 필요는 없고 저 또한 전편은 보지 않았습니다. 다만 전편이 어떤 의미를 갖는 영화인지 정도는 알아둔다면 좋을 것입니다. 전편 <28일 후>는 이제는 좀비물 장르의 또 다른 전형으로 정착한 '달리는 좀비'를 처음 선보이며 좀비물의 새로운 하위 장르이자 좀비물을 대중적으로 인식시키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좀비 액션' 장르를 정립한 영화로 평가됩니다. 그런데 그 장본인들이 다시 모여 만든 <28년 후>는 전편이 그렇게 정립한 것을 앞장서서 깨부숩니다. 영화는 진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12세 소년 스파이크를 중심으로 그가 아버지와 함께 하는 전반부와 어머니와 함께 하는 후반부로 나눌 수 있는데, 전반부는 영화에 대한 장르적 기대치를 훌륭히 충족시킵니다. 흐른 세월만큼 다양한 형태로 진화한 감염자들의 비주얼을 소름끼치게 재현하는 한편, 더욱 진화하여 가공할 광기를 품고 돌진하는 감염자들과의 전투를 보여주며 살떨리는 서스펜스를 제공하죠. 이는 이 영화에 대해 많은 관객들이 정확하게 기대했을 부분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후반부로 들어서며 영화는 전면에 나섰던 캐릭터가 후퇴하고, 물러서 있던 캐릭터가 전면에 나서면서 과감한 노선 전환을 시도합니다. 그리고 이 시도는 어쩌면 좀비 액션 장르에 대한 기대치를 품고 있던 관객이라면, 더구나 장르의 시초 격인 영화의 속편인 이 영화에 특히 남다른 기대를 걸고 있던 관객이라면 상당히 배신감을 느끼는 부분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영화의 시도에 잠시 당황했다가 이내 깨닫는 게 있는데, 왜 이 영화가 '28년 후'를 다루고 있는 것도 모자라 제목으로까지 내걸었으며 왜 12세 소년을 주인공으로 삼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스파이크는 바이러스 이전의 세계를 알지 못합니다. 외부와 철저히 차단되어 아날로그적인 공동체를 구축하고 외부의 위협에 맞설 준비를 항시 갖추고 있어야 하며 그 위협에 맞서는 능력이 세계에서 생존할 수 있는 필수적인 역량으로 간주되는 이 세계는 스파이크에게 불현듯 닥친 재앙이 아니라 태어나니 이렇게 되어 있는 '타고난 환경'입니다. 한 세대에 걸친 세월이라 할 수 있는 28년이 지난 후, 스파이크의 경우처럼 재앙은 일시적인 사건이 아니라 반영구적으로 지속되는 세계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재앙 이후 절멸된 것으로 취급받는 곳이 여전히 사람들이 살아가고 시간이 흐르는 세계로 남았을 때, 그곳에서의 삶은 끝나지 않는 전투일지도 모릅니다. 재난도 잠시여야 그 안에서 불꽃튀는 전투가 쉴 새 없이 일어나지 그 시간이 수십년 간 이어진다면, 전투는 더 강한 적이 나타나고 더 센 무기가 개발되어 치러지는 전면전의 형태만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형태로 살아남은 이들의 시간을 채울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남은 이들'은 '살아가는 이들'이 되어가는 것이겠죠. 이렇게 <28년 후>는 후반부의 노선 전환을 통해, 재앙을 목숨을 건 일시적 이벤트가 아니라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하는 것으로 마주하게 된 '재앙 이후 세대'의 생존기를 그리고자 합니다. 바깥 세상은 이미 궤멸되었다고 믿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그 생존담은, 폭발할 듯한 에너지를 뿜어내진 못하더라도 그 까마득함이 주는 절망과 공포감만은 선명합니다.
<28년 후>가 한 5년만 일찍 나왔다면 아마도 이런 이야기가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5년 사이 우리는 재앙이 일상이 된 세계를 현실에서 수년 간 겪었기 때문입니다. 몇 개월이면 지나겠거니 했던 전염병의 광풍이 세상을 집어삼키고는 기약없는 침체기로 우리를 몰아넣은 후, 언제 끝날지 모를 재앙 안에서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고민했던 경험을 우리는 공유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영화 속 재앙이 닥치고 28년이 지난 뒤 새로운 질서와 규율과 가치관이 형성된 세계에서 적응하는 사람들, 나아가 그 세계를 선천적인 환경으로 마주하고 태어난 세에 관한 이야기는 마냥 은유로만 머물지 않습니다. 좀비 장르의 쾌감에 몰두하는 것을 넘어, 재앙 이후 도덕 윤리가 파괴된 세계 안에서 다시 생명과 세계의 존엄을 마주할 가능성에 대해 들여다 보는 <28년 후>의 이러한 행보는, 시청각의 자극에 머물지 않고 그 안에서 생동하는 인간상을 포착하는 대니 보일 감독과 최근 자신의 연출작에서 다양한 형태의 재앙에 직면한 세계 속 인간의 태도에 대해 질문해 온 각본가 알렉스 가랜드의 고유한 시선이 만난 결과이기도 할 것입니다. 아이폰 15 프로 맥스로 상당 부분을 촬영했다고 하는 대니 보일 감독의 감각적 미장센은 이처럼 예상보다 더 진중한 영화의 자세에 리듬감을 더합니다.
예고편, 스틸컷 등 <28년 후>의 많은 홍보 자료에 등장한 이미지 중 하나가 많은 이들로 하여금 전편의 주연배우인 킬리언 머피가 아닌가 의심케 한, 노란 꽃밭 속 유달리 수척한 어느 감염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내 킬리언 머피가 아닌 것으로 밝혀졌음에도 이 모습이 영화를 대표하는 이미지 중 하나로 널리 활용된 것은, 아마도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라졌다고 믿은 세계에도 피어나는 꽃들, 죽은 존재라고 믿은 것에게서 느껴지는 끈질긴 생존 욕구 같은 것들이 액션과 결투의 장이 아니라 생존과 탐험의 장으로서 '28년 후의 세계'를 다루려는 영화의 의지를 투영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좀비 액션의 혁신을 가져온 장르영화의 속편을 기대한 이들에게 <28년 후>는 분명 배신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움에 가득 찬 모습으로 어쩌면 '아직 오지 않았을 뿐'일지 모를 어떤 세계를 이야기했던 전편에 이어, 이미 우리들 또한 설핏 마주했을지도 모를 '다음 세계'를 이야기하는 영화로 본다면 그 뚝심은 깊은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