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적인 영화리뷰 2025 - <슈퍼맨>
마블에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3부작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후 DC로 넘어와 DC 유니버스의 수장이 된 제임스 건 감독이 연출한, DC 유니버스의 새로운 포문을 여는 영화 <슈퍼맨>은 돌아왔다는 수식어나 다른 별명 대신 단순명료하게 '슈퍼맨'이라고 이름 붙인 제목만큼이나 기본으로 돌아간 느낌입니다. 슈퍼맨이라는 히어로가 세상에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이 원했고 만든 이가 지향했을 이미지를 구현하는 것이죠. 여기에 머물지 않고 거기에 제임스 건이 자신의 슈퍼히어로물 영화에서 줄곧 (심지어 성인용인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에서마저도) 그려온 특유의 발랄한 휴머니즘을 더하고, 거기에 할리우드의 시대정신이라면 외면할 수 없을 작금의 나라 안팎 상황을 슈퍼맨의 정체성 문제와 절묘하게 결부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오갤' 3부작이 매우 좋았고 그의 버전 '수어사이드 스쿼드'도 마음에 들었기에 이번 제임스 건 버전 슈퍼맨은 우려보다 기대가 크긴 했지만, 다행히 그 기대에 부응하는 영화가 된 느낌입니다.
초능력을 지닌 메타휴먼의 등장과 활약이 자연스러워진 세계, 슈퍼맨(데이비드 코런스웻)은 일간지 '데일리 플래닛'의 기자 클락 켄트로 살아가면서 동시에 슈퍼맨으로서 인류를 수호하는 일 또한 수행하고 있습니다. 미국 바깥에서 일어난 어느 전쟁(이라고 쓰고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공격이라 해도 무방한)에 개입한 슈퍼맨은 그곳의 메타휴먼과의 대결 끝에 방금 생애 첫 패배를 경험한 참입니다. 슈퍼맨은 그저 자신의 의지로 전쟁에 개입했다고 하지만 세계에는 '미국의 영웅'으로 알려진 그를 두고, 스탠스를 믿을 수 없는 '외계인'이 국제 정세에 제멋대로 끼어드는 게 바람직한가에 대한 논쟁이 촉발됩니다. 슈퍼맨의 숙적인 천재 기업가 렉스 루터(니콜라스 홀트)는 이 타이밍에 슈퍼맨의 숨통을 막으려 하고, 슈퍼맨의 위험성을 강조하며 정부를 설득하는 동시에 뒤에서는 그를 향한 치명적인 덫을 놓습니다. 렉스 루터가 놓은 결정적인 덫에 슈퍼맨은 크게 좌절하여 지금까지의 삶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마저 품게 되는 한편, '데일리 플래닛'의 기자이자 슈퍼맨의 연인인 로이스 레인(레이첼 브로스나한)은 최근의 국제적 사태와 렉스 루터 사이에 숨겨진 비밀을 캐내기 시작합니다. 단지 육체적으로만 무력해진 게 아닌 슈퍼맨은 과연 다시 날아오를 수 있을까요.
1970년대 크리스토퍼 리브 주연의 <슈퍼맨> 이후 우리가 아는 실사영화로만 새로운 버전의 슈퍼맨이 두 번 더 등장해서인지, 이번 <슈퍼맨>은 익히 알려진 관계 서사를 위한 빌드업을 생략합니다. 켄트 씨 부부가 어떻게 슈퍼맨을 키우게 되었는지, 로이스 레인과 어떻게 만나 연인이 되었는지, 슈퍼맨과 뜻을 함께 하는 동료들과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렉스 루터와 어쩌다 그렇게 철천지 원수가 되었는지 같은 사연들은 그려지지 않고 그저 시작부터 부모이고 연인이고 동료이고 적인 이들만 있을 뿐입니다. '다 안다고 치고' 본론으로 진입하는 스토리가 처음에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게 할 수도 있지만, 전작들에서 워낙 캐릭터간의 유대와 교감에 대해서 인상적으로 그려왔기 때문인지 이번에도 감독은 각각의 관계가 어떤 양상을 띠는지를 시작부터의 빌드업 없이도 비교적 효과적으로 그려냅니다. 그렇게 거두절미하고 사건으로 진입하는 영화는 감독 특유의 활기를 담아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슈퍼맨의 액션을 시원시원하면서도 절도있게, 적당히 레트로적이면서도 지극히 감각적인 터치로 선보입니다. 슈퍼맨이 수직으로 비상 또는 낙하거나 창공을 가로질러 날아갈 때의 속도감, 도시 한복판에서 적과 싸울 때의 쨍한 채광은 우리가 익히 알고 기대하는 슈퍼맨의 액션을 충실히 구현하면서도 이전 슈퍼맨 영화들과 비교한다면 묵직한 무게감보다는 경쾌하고 리드미컬한 느낌이 더 두드러진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영화는 이런 액션의 질감과 같이 슈퍼맨을 그 어느 때보다도 인간적이고 친근하게 바라봅니다. 이는 앞선 연출작에서도 제임스 건 감독이 줄곧 표출해 온 선하고 인간적인 에너지가 슈퍼맨이라는 캐릭터의 본질에 대한 접근방식과 부합한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입니다.
첫 장면에서부터 숨을 몰아쉬며 힘겨워 하는 슈퍼맨의 고통스러운 패배로 시작하는 영화가 어떤 팬들에게는 썩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영화를 통해 익히 봐 온 슈퍼맨은 힘이나 지성, 인성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완벽에 가까운 전지전능한 존재였기 떄문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 속 슈퍼맨은 '전능'은 할지 모르나 '전지'까지는 아닌 듯 합니다. 그것은 그가 외계에서 온 초월적 존재이긴 하나 (영화 속에서는 대략 30년 정도로 추정되는) 평생을 인간 부모의 손에서 키워지고 인간들의 세계에서 자란, 그래서 타고난 힘과 초능력만 제외한다면 여전히 배울게 한참 많고 순진한, 그러니까 신보다는 인간에 가까운 존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혼자서 만능으로 모든 것을 해나가기 버거운, 전능한 동시에 불완전한 이 슈퍼맨에게는 연인과 동료, (사이드킥에 더 가까운) 반려견 크립토까지도 힘을 보탭니다. 그 팀플레이가 적재적소에서 발휘된 순간 그는 비로소 힘차게 비상하여 세상을 수호할 에너지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슈퍼맨이 이끌어가는 서사이지만 제임스 건 감독은 전작에서의 앙상블 연출 능력을 되살려 활기차고 온기 어린 팀워크가 슈퍼맨에게 마치 노란 태양처럼 치유 능력을 발휘하는 과정을 건강하게 그려나갑니다. 이런 팀워크와 더불어 슈퍼맨을 움직이는 또 하나의 동력이 있다면 그것은 (어쩌면 이것 역시 타고난 초월적 능력일지도 모를) 경계 없는 선의의 추구일 것입니다. 지금껏 봐온 슈퍼맨 영화들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현대 국제 정세에 대한 은유가 꽤 노골적으로 들어가 사건화되는 가운데, 국가의 의견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따라, 어디가 이기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다는 슈퍼맨의 외침을 통해 영화는 이 시대에 새삼 필요한 그의 또 다른 건실한 측면을 상기시킵니다.
슈퍼맨이라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영웅을 연기하는 중책을 떠안게 된 새 배우 데이비드 코런스웻은 만족스러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일단 피지컬은 합격점을 주고도 남는 가운데 이번 슈퍼맨이 보여줘야만 하는, 전능한 힘을 과시하면서 동시에 누구보다 인간임을 절실하게 토로하는 '비인간 존재'로서의 혼란과 불안, 그 끝에 일어나는 인간으로의 각성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비상을 설득력 있게 보여줍니다. 이전 슈퍼맨 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말썽의 체급이 다른 반려견 크립토와의 호흡도 흐뭇하고요. 한편 슈퍼맨의 숙적인 렉스 루터라는 캐릭터 역시 쉽지 않은 무게의 배역일텐데 니콜라스 홀트는 이 렉스 루터를 번뜩이는 천재성을 넘쳐흐르는 열등감으로 열화시키고야 마는 비뚤어진 인간으로서 빼어나게 그려냅니다. 슈퍼맨의 동료이자 연인 로이스 레인 역의 레이첼 브로스나한 역시 슈퍼맨을 무작정 따르기보다 그와 갈등하면서까지 그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이끌어주는 또렷한 주관의 인물을 활력 있게 연기해냅니다. 이 밖에도 바람둥이 기질을 이용해 취재 역량을 발휘하는 동료 기자 지미 올슨(스카일러 기손도), 렉스 루터의 (트로피 와이프에 더 가까워보이는) 여자친구 이브 테스마커(사라 삼파이오), 슈퍼맨의 히어로 동료들인 가이 가드너(네이선 필리온)와 미스터 테리픽(에디 가테지), 호크걸(이사벨라 메르세드) 등 처음엔 낯설어도 볼수록 매력과 재미를 느끼게 되는 캐릭터들이 여럿 등장합니다. 더불어 인상적이었던 것은 슈퍼맨에게 어쩌면 일생의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이들일 켄트 부부인데, 이전 영화에서는 다이앤 레인이나 케빈 코스트너 같은 소위 한때 '날렸던' 배우들이 등장했던 데 반해 이번에는 인지도보다도 진짜 엄마와 아빠의 모습을 고스란히 머금은 듯한 배우들(프룻 테일러 빈스, 네바 하웰)을 캐스팅한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제임스 건 감독은 DC와 연을 맺기 전 '슈퍼맨이 만약 악의 존재라면?'이라는 상상에서 출발해 빌런으로 흑화되어 가는 외계 소년을 주인공으로 삼은 호러물 <더 보이>의 제작을 맡은 적 있습니다. 그랬던 그가 이번에 연출한 <슈퍼맨> 속의 슈퍼맨은 그 소년과 완전히 반대로 간 경우일 것입니다. 외계에서 온 그를 인간으로 만들고 인간 세계의 영웅으로 날아오를 수 있는 것은 그가 혼자 잘난 신적 존재라서가 아니라, 인간의 애정을 받아 인간으로 성장한 존재로서 인간의 사랑과 슬픔, 두려움과 희망, 믿음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새로운 슈퍼맨 연대기의 첫 장이 될 이 영화는 불완전한 인간 공동체 속에 어울려 살며, 불완전하기에 서로를 두려워하고 사랑하고 믿으며 살아가는 인간 공동체를 늘 바라다 보며 살아가는 슈퍼맨을 명랑하면서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어쩌면 영화가 보여주는 슈퍼맨의 고군분투는 다른 한편으로 그처럼 '오해받은 존재'가 보여주는 치열한 자기증명이기도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