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적인 영화리뷰 2025 - <이사>
<이사>는 일본의 소마이 신지 감독이 연출한 1993년작 영화로 국내에는 32년이 지난 이제서야 정식으로 개봉하게 되었습니다. 2001년에 세상을 떠난 소마이 신지 감독을 저 역시도 최근에야 알게 되었고, <이사>는 그렇게 해서 처음 보게 된 소마이 신지 감독의 영화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비범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감독의 영화를 왜 진작 발견하지 못했을까, 이 뛰어난 감독은 왜 일찍 우리 곁을 떠나서 동시대를 호흡할 기회를 일찍 놓치고 만 걸까 하는 아쉬움 섞인 감탄을 하면서 영화를 봤습니다. 마치 그 시절로 뛰어들어간 것처럼, 그 시절을 온전히 겪은 것처럼 펼쳐지는 이야기와 요동치는 감정이 쏟아내는 에너지의 조화 속에서 영화는 30여년의 세월을 건너 실은 우리들 저마다가 기특하게 통과했을 성장의 시기를 장난스럽고도 애정 가득 담긴 손길로 어루만집니다.
6학년 소녀 렌(타바타 토모코)는 다정한 대화가 오고 가는 화목한 가정을 꿈꾸었지만 아빠 켄이치(나카이 키이치)가 집을 나가고 엄마 나즈나(사쿠라다 준코)가 이혼을 선언하면서 렌의 꿈은 물거품이 될 처지에 놓입니다. 엄마는 렌의 속도 모르고 이제 새로운 시작이라며 자축하더니 일방적으로 작성한 둘만의 가정을 위한 2자 계약서를 들이밀고, 아빠는 제발로 집을 나가 놓고서는 그 이유를 물어보니 숙제처럼 답을 미루기만 하는데, 렌은 이런 엄마와 아빠가 모두 야속하기만 합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렇게 된 집안 상황이 행여 학교 친구들에게 들킬까봐 걱정도 되는 한편, 처지가 처지다보니 한부모 가정의 별난 아이라면서 그동안 멀리 하던 급우에게 절로 마음이 가는 건 또 어쩔 수 없습니다. 마음이 한껏 뾰족해진 채로 소리치고 내달리며 이런저런 말썽을 피우던 렌은 엄마와 아빠에게 가족의 오랜 추억이 담긴 '비와 호수'로의 여행을 불현듯 제안합니다. 세 가족의 빛나던 순간들이 남아 있는 이 추억의 장소에서라면, 렌은 꿈꿔왔던 예전의 가족을 다시 되찾을 수 있을까요.
소마이 신지 감독 작품 중 첫 관람작으로 <이사>를 보면서 무엇보다 가장 놀랐던 것은 영화에 담긴 예측불허의 에너지였습니다. 이 에너지는 어린이가 주인공이라고 해서 으레 보여주기 마련인, 어른의 시선에서 어른이 바라는 모습을 투영한 '천진난만 순진무구한 어린이'의 전형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엄마와 아빠라는 생애 첫 어른들과의 관계와, 학교 친구들이라는 생애 첫 사회 공동체에서의 관계를 거쳐 비로소 자신만의 가치관이 정립될 무렵, 순전히 나의 의지로 지향하는 바가 생겨났건만 현실이 그 의지를 언제나 뒷받침해주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의 실망감, 섭섭함, 허탈감, 분노, 원망, 절박함 같은 것들이 한 데 뒤엉켜서 표출되는 에너지입니다. 이 에너지는 어른들이 바라는 아이들의 모습처럼 마냥 해사할 수 없으나, 어른들도 어느 때든 겪었을 아이 때의 모습이기에 우리 마음에 파워풀하게 돌진해 옵니다. 럭비공처럼 여기저기로 튀어나가는 대화부터 돌발적으로 나타나는 갖가지 소동까지, 영화는 사건의 중심에 선 렌과 인물들 간의 갖가지 상호작용을 롱테이크로 빈번히 가져가면서 소용돌이치는 감정의 양상을 고스란히 전달합니다. 어른으로서의 가치 판단을 일절 배제한 영화의 시선이 좇아가는 렌의 좌충우돌 행보는 단지 치기 어린 말썽으로만 보이지 않습니다. 내 의견도 물어보지 않고 나 역시 그 구성원인 가정을 쪼개려는 엄마와 아빠가 영 마뜩찮고, 그렇다고 그 시름을 홀로 감내하기엔 버거워 그저 반항을 뿜어낼 따름인 렌의 처지에 이입하지 않을 수 없죠. 어떤 방향으로든 자신이 결정한 삶에 대해 무척이나 심플하게 임하는 듯한 엄마와 아빠의 태도에 비하면 시끄럽지만서도 끊임없이 분투하고 다른 길을 모색해보는 렌의 모습이 외려 성숙해 보일 지경입니다.
그러나 영화는 이렇게 격랑에 휩싸인 유년기의 풍경을 들여다 보는 것에만 머물지 않고, 나아가 그 시절이 어떻게 극복되고 성장으로 나아가는지를 초현실적이고 강렬한 이미지들로 구현하기에 이릅니다. 영화 후반부 렌이 엄마와 아빠를 이끌고 당도하는 '비와 호수'는 바로 그런 성장의 분기점이 되는 장소입니다. 어릴 때 엄마와 아빠의 손을 붙잡고 왔을 때, 렌이 지켜보았을 호수의 모든 전경은 마냥 축제였을 것입니다. 펑펑 터지는 불꽃, 아저씨들의 함성을 동반한 가마 행렬, 거세게 타오르는 불길까지 렌에게는 모든 것이 신나고 흥분되는 축제 풍경의 일부분이었겠죠. 그러나 시간이 지나 홀로 서서 목격하는 이 모든 것은 마냥 축제가 아닙니다. 무거운 짐을 이고지고 발걸음을 옮기며 그 무게를 못이긴 채 가라앉는 듯한 어른들은 힘겨워 보이고, 무서우리만치 자기 앞의 흔적들을 증발시켜버리는 불길은 위협적입니다. 그 모든 것은 더 이상 마냥 축제가 아닌 것이 되며, 그 많은 것을 짊어지고도 나아가야 하는 부담감, 불사르든 가라앉든 커다란 변화를 담대하게 받아들여야만 하는 책임감이 됩니다. 쉴새없이 달리고 소리치고 불태우고 뛰어들던 과정을 지나, 그렇게 렌은 '어른이 된다는 것'이 '더 완전한 존재가 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하고 파편화된 나를 끌어안고서도 부단하게 나아가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리얼리즘에 기반한 현실 묘사가 아니라 꿈과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몽환적 이미지를 통해, 불안한 현재를 탐험한 끝에 불완전한 성년기와 마주하며 성장해나가는 과정을 그리는 후반부는 처음엔 살짝 당황스럽다가도 이내 매혹시키며 보는 이의 정서에 힘있게 배어듭니다.
성장은 유순하지만은 않으며 부수고 태우고 해체한 끝에 다시 일어나는 요란스럽고 복잡한 과정을 거치게 마련입니다. 소마이 신지 감독은 그렇게 성장이라는 프로세스에서 분출되는 영화적으로 오롯이 재현하고자 하며, 이는 어른의 시각에 의해 재단되고 해석된 것이 아니라 철저히 성장의 주체인 6학년 소녀의 시선에서 이뤄지기에 불친절하고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독이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집요하게 좇는 그 방황과 성장의 이미지 속을 명석하고도 예리한 눈빛으로 누비는 어린 배우가 있어, 자초지종을 다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온전히 몰입하고 공감할 수 있게 됩니다. 그 중심에 선 렌 역의 타바타 토모코가 보여주는 연기는 그야말로 눈을 번쩍 뜨이게 합니다. 순진무구함이나 천진함 같은 어린이 캐릭터의 스테레오타입에 갇히지 않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거침 없는 도발을 감행하는 동시에 부모와 친구에게 자신의 절박한 처지를 꾸준히 호소할 수 밖에 없는, 성장의 분기점에 서서 세상을 내 뜻대로 살아가고픈 의지와 세상에 불안한 내 존재를 기대고픈 마음을 함께 품은 어린이의 정제되지 않은 활력을 반짝이게 표현해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명감독이라도 어린 배우의 이런 연기는 디렉션만으로 구현하기 힘들었을 터인데, 안절부절못하게 하다가 웃음과 슬픔을 번갈아 주다가 끝내 기특한 감동을 주는 이 천연 그대로의 연기가 영화가 그려내는 세계에 온전히 합치되면서 만들어내는 울림이 각별히 크게 다가옵니다.
영화의 제목이 '이사'인데 언뜻 보면 영화에서 이사를 가는 사람은 아빠 켄이치뿐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실 진짜 이사하는 사람은 주인공인 렌일 것입니다. 대개의 경우 이사는 더 좋은 집, 더 좋은 환경이 마련된 곳으로 나아가는 경우에 해당됩니다. 사람은 달팽이가 아니어서 집을 이고 살면서 더 큰 집으로 바꿔 가는 존재도 아니고, 곤충이 아니어서 번데기를 깨뜨리거나 허물을 벗고 새로운 형상으로 거듭나는 존재도 아닙니다. 다만 내가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경험할 때가 됐다 싶을 때, 더 넓은 곳을 내 환경으로 삼을 준비가 되었다고 느낄 때 있던 공간에서 나와 새로운 공간으로 '이사 가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 이사의 순간이 비록 내 의지와 상관없이 다가왔다 할지라도, 적어도 어떤 집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는 내 의지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유별난 소녀의 각별한 성장통처럼 보이던 이야기가 실은 지금의 어른이 되기까지 각자의 방식으로 몇번의 이사를 가곤 했던 우리들의 이야기임을 깨달을 때, 끝내 이 이사의 과정을 기꺼이 즐겁게 받아들이기로 한 렌의 마지막 표정은 더욱 대견하게 다가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