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적인 영화리뷰 2025 - <8번 출구>
영화 <8번 출구>의 원작인 동명의 게임은 지하철 통로라는 일상적인 공간을 낯선 공포의 현장으로 탈바꿈시키며 '백룸 신드롬'의 중심에 서며 센세이션을 일으킨 바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게 영화화될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는데, 규칙을 따르며 반복되는 통로를 누빈 끝에 탈출하는 것이 전부인 게임에서 영화로 옮겨볼 만한 크리에이티브가 좀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일본 영화계에서는 '이런 걸 영화화한다고?!' 싶은 사례가 왕왕 등장하기 때문에 게임 '8번 출구'의 영화화도 흥미 반 걱정 반이었더랬죠. 하지만 영화는 생각보다 말끔한 모양새로 우리 앞에 나타났고, 어찌 보면 게임을 원작으로 한 '2차 창작물'임에도 단출한 게임의 형식은 미처 담아내지 못했거나 또는 부득이하게 숨어 있어야 했을 요소까지 끌어내며 더욱 풍성한 결과물이 되었습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듯한 남자(니노미야 카즈나리)는 오늘도 심드렁한 얼굴로 만원 지하철에 올라타 있습니다. 라벨의 '볼레로'로 귀를 틀어막은 채 번잡한 세상을 차단하려 합니다. 옆에서는 우는 아기를 안고 달래려는 엄마에게 무섭게 호통치는 몰상식한 남자가 있지만, 그런 남자에게 한 소리할 의지는 없으면서 아무도 그에게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더라며 다른 사람들을 힐난하고픈 마음은 있습니다. 얼마 전 헤어진 여자친구(고마츠 나나)가 임신 소식을 알려오는 와중에도, 차마 선택할 수 없어 '어떻게 할 거냐'고 선택의 키를 건네는 여자친구의 질문에 남자는 '글쎄' 하며 얼버무릴 뿐입니다. 그렇게 성가신 세상으로부터 멀어지려, 산적한 문제들은 치워두려 하던 남자의 앞에 갑자기 나타난 것은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면 영원히 끝나지 않을 지하도입니다. 규칙은 네 가지. 이상현상을 찾을 것이며, 이상현상이 발견되면 되돌아갈 것이며, 이상현상이 없다면 앞으로 나아갈 것이며, 그렇게 8번 출구까지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지금 그의 앞에 카운트된 숫자는 '0'이고, 이 숫자가 '8'이 될 때까지 남자는 언제 끝날지 모를 게임에 뛰어드는 수 밖에 없습니다.
먼저 게임 '8번 출구'의 특징을 살펴보면, 이용자는 1인칭 시점에서 끝나지 않는 지하도를 반복적으로 다니며 곳곳에 숨어 있거나 덜컥 나타나 놀라게 하는 이상현상들을 포착해야 합니다. 이상현상을 포착하고 뒤돌아 가거나 이상현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앞으로 가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으나, 이상현상이 있음에도 앞으로 가거나 이상현상이 없는데 뒤돌아가면 게임은 다시 처음 단계로 돌아갑니다. 영화 <8번 출구>의 초반은 주인공 시점을 충실히 따라가는 롱테이크샷으로 이러한 게임의 기본적인 재미를 재현합니다. 게임에서도 본 적 있는 익숙한 이상현상을 보여주던 영화는 곧 영화이기에 가능한 이상현상의 변주를 시도하면서 '어디까지가 이상현상인가'라는 의문을 낳기 시작합니다. 물리적 제약을 일정 부분 벗어나기도 하며 원작 게임보다 더 폭넓고 입체적인 혼란을 주면서 게임 본연의 재미를 확장-심화시켜 나가는 듯 하던 영화는 곧 그 이상현상들을 매개로 서서히 인물의 내면에 접근하기 시작합니다. 영화와 게임의 가장 큰 차이는 서사의 유무인데, 영화는 원작 게임에서 철저히 배제된 플레이어 즉 주인공의 서사를 영화 도입부에서부터 차곡차곡 쌓아올려 갑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런 처지와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이 이런 게임에 뛰어든다'는 전제가 성립되고, 그렇게 주인공이 맞닥뜨리게 되는 게임은 엔딩을 보기 위한 미션 이상으로 보다 심층적인 성질의 여정이 됩니다.
인간의 각성과 성장을 다루는 장르로서 특정한 시간이 반복되는 타임루프물이 종종 활용되곤 하는데, 영화 <8번 출구>가 원작 게임의 포맷을 바로 이러한 타임루프 장르의 장치 개념으로 활용합니다. 같은 공간을 무기한 반복해서 돌아다녀야 하고, 심지어 규칙을 지키지 못하면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가서 반복해야 하는 특성이 타임루프물하고 닮은 것이 사실입니다. 처음의 지하도는 주인공에게 보다 막연한 미지의 공포를 선사하지만, 통로를 다니는 횟수가 늘어나고 주인공의 '게임머리'가 늘수록 미지 투성이였던 지하도는 하나둘씩 구체적인 이미지로 채워집니다. 그 이미지들은 게임 시작 전부터 관객에게 넌지시 던져졌던 주인공의 서사와 오버랩되어, 주인공을 그저 말초적으로 자극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내면의 심연을 건드리는 데에까지 나아갑니다. 매사에 '글쎄'하면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은 물론 심지어 내가 당사자인 일에 대해서도 얼버무리고 회피하기 일쑤인 주인공의 모습은 사람으로 빼곡한 세상에서 스스로를 단절해 가는 현대인의 표상이기도 합니다. 이어폰을 꽂고 노이즈 캔슬링 모드를 켠 채, 세상만사 나와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스스로 고립되어 가는 과정이죠. 그런 인물에게 나타난 이 끝나지 않는 '정신과 시간의 방'은 도무지 피할 도리를 주지 않습니다. '이상현상을 발견하면 뒤돌아 갈 것'이라는 규칙은 언뜻 회피성 인간에게 딱 맞는 규칙처럼 보이지만, 규칙의 일부가 그렇더라도 이 통로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벗어날 수 없다는 대전제는 변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풀어내고 돌파해야만 나아갈 수 있는 세계는 회피와 단절이 편했던 인물을 비로소 각성하게 하는 촉매제가 되는 것입니다. 회피와 외면에 익숙해지는 순간, 나를 둘러싼 세계는 무엇이 이상한 건지 눈치 채지도 못한 채 나를 가두어 둘 것임을 깨닫게 하면서 말이죠.
프로듀서와 작가로도 알려진 이 영화의 감독 카와무라 겐키는 원작 게임의 심플한 구성과 몰입감을 영화적 서사와 성공적으로 결합시킵니다. 더 풍부한 서사를 위해 헤매는 남자와 '아저씨'라 불리는 걷는 남자 두 명만 등장하는 구성에 새로운 인물들을 추가했으면서도, 원작의 가장 특징적인 요소인 공간적 제약과 그 안에서 이상현상을 찾는다는 게임의 규칙을 훼손하지 않고 적절한 변주 속에 녹여냅니다. 영화의 시작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라벨의 '볼레로'는 마치 기차 소리를 연상케 하는 방망이질로 긴장감을 형성하는 한편 영화를 깔끔하고 도발적으로 열고 닫는 역할을 해냅니다. 한편 주인공인 헤매는 남자 역의 니노미야 카즈나리는 열연으로 자신이 이 영화에 캐스팅되어야 했던 이유를 납득시킵니다. 서사가 불분명한 인디 게임의 영화화 프로젝트에 그처럼 연기를 잘 하기로 정평이 난 배우가 캐스팅되었다는 것이 의외로 다가왔는데, 반복되는 공간과 비현실적인 현상들 속에서 무기력함과 절박함, 멘털 파괴와 결연함으로 이어지는 개인의 심리 변화를 표현해내기 위해서는 과연 그만큼의 연기력이 필요했음을 실감케 합니다. 원작 속 '아저씨'를 빼다박은 비주얼로 섬뜩함과 친숙함을 함께 안겨주는 코치 야마토의 강렬한 캐릭터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의외로 영화 <8번 출구>는 극장에서 보기에 꽤 적합한 듯한 영화입니다. 극장 안에 앉아서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지하도의 이미지 속을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꼼짝없이 누비는 듯한 긴장감도 즐길 수 있고, 앞과 뒤에서 들려오는 사운드의 공간감이 살아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또 다른 이유는 영화가 끝나고 난 뒤에 실감할 수 있는데, 대부분의 경우 영화를 보고 나오면 귀가할 때 지하철을 이용하게 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끝나지 않는 지하도를 헤매고 해맨 끝에 겨우 빠져나오면 맞닥뜨리게 되는 현실의 지하도. 절망적이고 위험해 보이지만 철저히 규칙성 아래에서 세팅된 게임 속 공간을 벗어나, 절망과 위험은 자취를 감춘 듯 해도 어떤 규칙도 세팅도 적용되지 않은 현실의 공간으로 뛰어들게 되는 듯한 감회는 새삼 새롭게 다가옵니다. 영화를 보고 난 후에 현실에서 느끼게 되는 그 기이한 감흥까지도 인상깊은 영화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