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적인 영화리뷰 2026 - <시라트>
2025년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과 사운드트랙상을 받은 스페인 영화 <시라트>는 쟁쟁한 수상 이력보다도 공개 직후 쏟아진 평가들로 인해 더욱 세간의 주목을 받아 왔습니다. 그 평가들에는 익숙하지 않은 조합의 단어들이 하나같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죠. 사막, 레이브, 지옥과 같은 키워드와 먼저 본 이들이 공통적으로 내놓은 '매우 충격적'이라는 평가는 영화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게 했고, 판타지 색채가 강한 영화인 걸까 하는 궁금증도 자아냈습니다. 하지만 이런 환상성 강한 개념들이 언급되는 이 영화는 오히려 현실을 정면으로 겨누고 있었고, 그렇게 현신한 지옥의 일면을 목격했기에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왔습니다. 표현 수위와 별개로 보는 이를 옴짝달싹못하게 할 충격과 두려움에 휩싸이게 할 영화였습니다.
모로코의 어느 황무지. 마치 성곽처럼 둔중하게 쌓인 스피커들이 일련의 레이버들을 맞이하고 지축을 흔들 정도로 강렬한 레이브 사운드와 함께 파티가 열립니다. 자신을 놓으려는 듯, 무언가를 잊어버리려는 듯 무아지경 속에서 춤추는 사람들 사이로 나타나는 한 중년 남자의 이름은 루이스(세르지 로페즈). 그는 집을 떠난 딸을 찾기 위해 아들 에스테반(브루노 누녜스 아르호나)과 함께 스페인을 떠나와 승합차에서 숙식하며 모로코를 떠돌고 있습니다. 듣기로 이런 황무지 레이브 파티에 딸이 있을 거라고 수소문하여 찾아왔지만 소득은 없었고, 루이스는 파티에서 만난 레이버 일행들과 함께 딸의 다음 행선지로 예상되는 사막 너머 새로운 파티 장소로 떠납니다. 때마침 바깥세상은 3차 세계대전을 방불케 하는 대혼란에 빠져 있고 군부대들이 몰려와 그들을 통제하려 하지만, 루이스 부자와 레이버 일행은 그곳에서 벗어나 사막으로의 여정을 떠나고 그 속에서 나름의 유대를 쌓아 갑니다. 그렇게 고독한, 그러나 견딜 만한 고난을 헤치며 가고 있다고 믿게 될 때 즈음 그들 앞에 지옥으로의 문이 열립니다.
영화의 제목인 '시라트'는 '천국과 지옥을 잇는 다리'를 뜻하는 이슬람어로, 보다 정확히는 최후의 심판의 날 이승을 떠난 모든 이들이 낙원으로 향하기 위해 건너야만 하는 지옥 위의 다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리는 '머리카락보다 가늘고 칼날보다 날카롭다'고 하죠. 영화 <시라트>는 바로 그 '시라트'를 건너는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말하자면 루이스가 에스테반과 함께 딸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레이브 파티 현장이 이승입니다. 그곳에는 고통과 환희가 공존하죠. 라디오 방송을 통해 세계가 파국으로 가고 있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지만 파티에 자리한 레이버들은 그 현실을 잊겠다는 듯 심장을 때리는 사운드에 몸을 싣습니다. 갑작스레 군부대가 들이닥치면서 그들은 현실로부터 도피했을 뿐 현실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퍼뜩 상기하게 됩니다. 그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여정을 떠나니, 루이스에겐 딸이 있고 레이버들에겐 새로운 파티의 장이 있는 그 목적지가 어쩌면 그들만의 낙원일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의 공포와 위협으로 가득한 세계로부터 벗어나 그렇게 자신만의 낙원을 찾아가려는 이들에게 마치 신의 뜻인 양 끔찍한 재앙이 닥치면서 눈앞이 막막해지는 공포가 닥쳐옵니다.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그 재앙이, 그 지옥이 신이 아닌 인간에 의해 창조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시라트>의 시공간적 배경은 아마도 명확할 듯 하지만, 굳이 그것을 명시하지 않습니다. 공간적 배경은 모로코의 황무지라는 것 정도로만 짐작되고, 스페인어를 쓰는 주인공 루이스를 비롯해 스페인어와 프랑스어, 영어를 섞어 쓰는 레이버들을 통해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정도만 가늠해볼 뿐입니다. 속세로부터 벗어난 그들만의 세계인 것만 같은 파티 현장에서 그나마 현실을 넘겨짚어 볼 수 있는 수단은 한번씩 들리는 라디오 음성인데, 전쟁이 발발했다는 그 라디오 속 소식에서도 언제 어디서 무슨 원인으로 그렇게 세계가 들썩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영화가 의도적으로 설명을 배제한 듯한 이런 배경 속에서 초현실적인 레이브 파티 현장에 불쑥 들이닥치는 현실의 면면들은 그래서 불안스럽습니다. 어떤 태세를 취해야 할지, 지금 눈앞에 들이닥친 현실이 어떤 물리적/정신적 파장을 가져다줄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혼란한 세계 속에서 자기들만의 낙원을 찾아 떠나는 이들의 고단한 여정을 따라가는 로드무비만 같던 영화가 어떤 사건을 기점으로 완전히 다른 국면을 맞이할 때, 그 불안은 공포로 번져나갑니다. 도무지 출처와 이유를 알 수 없는 공포가 들이닥치며 목적지에 당도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그들을 한없는 절망으로 떨어뜨리는데, 그것이 마치 신의 장난인 것만 같겠지만 지켜보는 우리는 필시 인간에 의한 것임을 알기에 더욱 끔찍하게 느껴집니다. 한때 그들은 레이브 사운드에 몸을 맡긴 채 마치 이 지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처럼 무아지경에 빠져 있었지만, 이제 그 레이브 사운드는 정신을 결박하는 북소리가 되어 그들을 '머리카락보다 가늘고 칼날보다 날카로운' 다리 위로, 지옥의 한복판으로 내몹니다.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를 무엇이 나타날지 모를 정글로 만드는 것만 같은 레이브 사운드는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입니다. 엄혹한 현실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하는 피난처이자, 동시에 지옥과의 대면으로 내모는 심판자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속 레이브 사운드가 품은 이 상충하는 두 가지 의미는 역설적이게도 상통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지옥 위의 다리를 건너기 위해, 꿈꾸는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오히려 자신을 놓아버리는 무아지경의 상태여만 가능할 것이라는 암시를 주기 때문입니다. 공포와 혼란으로 뒤덮인 현실은 거기로 편입되지 않으려는 이들의 저항을 말살하며 개개인의 모습을 세상으로부터 증발시켜버리니, 오히려 무아지경의 순례자와 같이 걸어갈 때 생존이 허용될 것이라는 그 암시는 잠시 희망적이지만 이내 한없는 절망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나마 허용되는 것 역시 '낙원행'이 아닌 '생존'일 뿐, 순전히 운에 기대야만 하는 그 생존의 심판대는 끝나지 않을 것임을 짐작하게 되기에 영화가 다다르는 결론은 무겁게 현실을 관통합니다. 자유와 분노를 외치는 이들에게 지옥의 불덩이를 내리꽂는 세상에서, 나를 놓아버린 순례자의 침묵 속 몸부림만이 겨우 허용되는 세상에서 당신은 그저 운이 좋아서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는 것이라는 현실 말입니다.
영화 속에서 인물들은 레이브 음악을 일컬어 '듣기 위한 음악'이 아닌 '춤추기 위한 음악'이라고 말합니다. 그 말을 증명하듯 어느덧 춤출 수 없게 되는 순간, 음악은 더 이상 우리에게 위안과 휴식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를 심리적으로 막다른 길로 내모는 존재가 되는 것만 같습니다. 아마도 '춤추기 위한 음악'이란, 불구덩이로 꽉 찬 지옥 같은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과도 같은 춤사위가 반드시 동반되어야만 한다는 뜻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시라트>는 박동하는 심장처럼 말초신경을 두들기는 음악을 이용해 이 땅 위에 지옥을 소환하고, 이게 어느 판타지 세계의 풍경이 아니라 우리가 직면하고 있고 언제 벗어날지 알 수 없는 아득한 현실임을 상기시키며 사면초가의 멘탈붕괴 상태로 내몹니다. 차라리 새해 액땜이라고 생각한다면 마음이 편할지 모를 이 감정은, 영화가 현실을 각성시키는 또 하나의 새로운 방식으로서 영화가 끝난 후에도 관객을 오랫동안 멍하게 내버려두고 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