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이렇게까지 역지사지하게 만들었나

인상적인 영화리뷰 2026 - <직장상사 길들이기>

by 김진만
<직장상사 길들이기>(Send Help, 2026)


샘 레이미 감독은 MCU 이전의 <스파이더맨> 3부작과 MCU 이후의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를 연출한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블 데드>와 <드래그 미 투 헬> 등 호러 영화 전문 감독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감독의 상반된 두 가지 스타일 중 이번 신작 <직장상사 길들이기>는 후자에 가깝습니다. (물론 그가 연출한 히어로 영화들에도 호러적 요소가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겠습니다만) 감독은 과거 <스파이더맨> 3부작을 끝낸 뒤 내놓은 저예산 호러 영화 <드래그 미 투 헬>로 여전히 (심지어 피칠갑을 하지 않고도) 살아있는 호러 감각을 과시한 바 있는데, 이번 <직장상사 길들이기>로 또 한번 생생함은 물론 동시대적이기까지 한 호러 감각으로 팬들을 만족시킵니다. 직장 내 로맨스를 그린 로맨틱 코미디물 같은 이 제목의 영화가 어째서 호러 장르로 분류될 수 밖에 없는지도 영화를 보고 나면 새삼 신통하게 느껴집니다.


컨설팅 회사 '프레스턴'에서 7년째 근무중인 전략기획팀의 린다 리들(레이첼 맥아담스)은 그간 묵묵히 성실히 일해 온 덕에 그 성과로 임원 승진을 약속 받았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에 이어 회사를 물려받은 아들 브래들리 프레스턴(딜런 오브라이언)이 신임 대표로 부임해서는 원래 린다가 가기로 했던 자리에 자신의 대학교 동기를 앉히면서 린다의 기대는 좌절되고 맙니다. 그뿐인가요, 안하무인 성격의 브래들리는 가뜩이나 회사에서 별난 캐릭터로 기피 대상인 린다에게 냄새가 난다느니 하는 이유들로 직원들 다 보는 앞에서 망신을 주고, '서바이버' 같은 야생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린다의 취향을 두고는 그녀도 보는 앞에서 부하직원들과 '앞담화'까지 합니다. 밀려오는 서러움을 꾹 참고 혹시 모를 승진의 기회를 위해 린다는 브래들리 이하 주요 직원들과 방콕 출장행 전용기에 오릅니다. 그런데 비행기가 그만 극심한 난기류에 휘말리고, 창문이 뜯기고 추락하는 과정에서 다른 직원들은 모두 목숨을 잃고 린다와 브래들리만이 살아남아 무인도에 당도합니다. 정확히는 먼저 자신의 생존을 깨달을 린다가 뜻하지 않게 발견한 브래들리를 살려줬다고 봐야겠죠. 린다는 다행히 사지가 멀쩡한 데다 평소 '서바이버' 덕에 익혀 둔 야생 생존법을 제대로 써먹을 수 있게 된 반면, 브래들리는 다리 부상을 당해 거동이 자유롭지 않은데다 이런 야생에서 살아남는 법은 알 턱이 없는 성질 고약한 도련님입니다. 회사에선 비웃음거리였던 린다의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브래들리가 회사에서 그렇게 중요하다던 사교성이 전혀 필요 없는 곳. 여기서 린다는 더 이상 부하직원이 아니고, 브래들리는 더 이상 보스가 아닙니다.


<직장상사 길들이기>(Send Help, 2026)


별장으로 간 청춘남녀들이 악마의 책을 발견했듯, 대출 심사 일을 하는 평범한 여성이 지옥에 갈 것이라는 저주를 받았듯, 샘 레이미 감독은 늘 배경 설명이 필요없는 평범한 세상에 불쑥 공포스런 상황을 던져 놓음으로써 '마니아'가 아니더라도 호러 장르에 금방 몰입할 수 있게 해 왔습니다. 이번 <직장상사 길들이기>에서 감독이 배경 삼은 세상의 단면은 바로 '직장 내 갑을 관계'입니다. 돈을 벌고 생계를 꾸리기 위해서라면 누구라도 다니게 되는 곳이 직장이지만,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악몽보다 더 악몽 같은 곳으로 변할 수도 있는 곳 역시 직장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가능한 감독의 선택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무인도 생존'이라는 키워드까지 더해지고, 이것이 또 호러라는 장르의 자장 안에서 전개될 것이라고 하니 그야말로 어디로 튈지 모를 이야기가 그려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또 영화를 좀 봤다면, 샘 레이미 감독을 안다면 이야기가 대략 어떻게 흘러갈지 짐작하게도 됩니다. 무대가 회사에서 무인도로 옮겨지면서 갑을관계가 뒤바뀌었고, 포스터를 보면 주인공 린다의 얼굴이 피칠갑되어 있는 데다 한손에 칼을 들고서 포효하는 듯한 모습도 나오니 대략 '미저리'의 무인도 버전이 아닐까 예상하게 되는 것이죠. 영화는 이런 예상마저도 경쾌하게 빗나갑니다. '어 이야기가 왜 이렇게 흘러가지' 하면서 따라가던 이야기가 또 그새 방향을 틀면서 당최 어떤 결말에 이를지 예측할 수 없게 하는 것이죠. (표현 수위와 별개로 샘 레이미 감독이 또 갈 때까지 가려면 갈 수 있는 감독이라 더욱 가늠이 어렵기도 하고요.) 그러면서도 감독은 영화가 (미국에서는 R등급이지만) '15세 관람가'인 것에서 알 수 있듯, 자극적인 표현 일변도로 관객을 옴짝달싹못하게 하는 편리한 전략을 구사하기를 거부합니다. '갑이 된 을'이 '을이 된 갑'을 고통스럽게 고문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죠. 샘 레이미 감독은 예전부터 '고문 호러' 같은 걸로 관객을 고통스럽게 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어 왔고, 그것이 이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합니다.


회사에선 미운털 같았던 여직원이 야생에서 다방면으로 생존 능력을 발휘하는 모습을 보며 그녀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던 남상사가 새로운 감정에 빠져들게 되는, 무인도 위에서의 '오피스 로맨스'를 떠올려 볼 법 하지만 샘 레이미 감독은 그런 로맨스는 그야말로 '개나 주라'고 합니다. 이전 호러 영화들과 달리 초자연적 존재 없이 오직 사람들만 등장하는 이 영화에서, 가장 긴장감을 유발하는 것은 처지가 뒤바뀌었을 때 인간이 품게 되는 고약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다수는 그 고약한 마음에 손가락질을 할 수 없는데, 그것이 바로 무자비한 직장 내 갑질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회사에서 린다는 자신의 능력과 무관하게 갑질을 당합니다. 냄새 난다는, 자리에서 뭐 먹는다는, 사교성 없다는, 골프 안 친다는 이유로 손쉽게 승진 대상에서 누락 당하죠. 물론 회사 생활의 태도적 측면에서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지만 그녀의 역량을 판단할 근거까지 되는지는 의문입니다. 브래들리가 미모의 여직원들을 대하는 태도로 봤을 때 린다가 자기 관리에 전혀 관심없는 여성이라는 점도 아마 그녀에 대한 브래들리의 대접에 영향을 미쳤을테고요. 이처럼 영화는 우리나라 뿐 아니라 바다 건너 미국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모양인, 역량과 무관하개 회사에서 형성되는 관계와 그로 인한 부당한 갑을 관계를 신랄하게 풍자합니다. 린다와 브래들리가 지닌 능력의 우위가 완전히 역전되는 무인도를 배경으로 하여, 애초에 조리 있고 논리적으로 회사 내 관계가 형성되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섬뜩하고도 우스꽝스러운 사건들을 전개하며 이들이 얽힌 부조리한 갑을 관계를 말하자면 '미러링'하는 것이죠.


<직장상사 길들이기>(Send Help, 2026)


호러 코미디 장르를 표방하지만 이처럼 인간의 요동치는 감정을 중심 축에 두고 이야기를 끌어가야 하는 만큼, <직장상사 길들이기>는 두 주연 배우의 역량이 빛을 발하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린다 리들 역의 레이첼 맥아담스가 보여주는 극도의 '도른자'화가 감탄을 절로 자아내는 부분입니다. 20여년 전 웨스 크레이븐 감독의 스릴러 <나이트 플라이트>로 킬리언 머피와 불꽃 튀는 스릴러 연기를 보여준 바 있는 나름의 경력자답게, 레이첼 맥아담스는 이번 영화에서 뒤바뀐 처지와 그로 인해 손에 쥐게 된 주도권 앞에서 생존과 권력을 위한 치밀한 전략을 짜 나가고 이를 위해 때로 광기 또한 불사하는 인물을 힘이 넘치게 연기해 냅니다. 그가 <노트북>과 <어바웃 타임> 같은 주옥같은 로맨스 영화들을 필모그래피로 거느린 배우라는 것을 믿기 힘들 정도의 변신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레이첼 맥아담스와 '대적'하는 브래들리 프레스턴 역의 딜런 오브라이언 역시 인상적인 변신을 보여줍니다. <메이즈 러너>의 과묵하고 믿음직한 리더 이미지가 익숙한 그인데 이번 영화에서는 멀쩡한 허우대와 달리 입만 살고 야비하고 저열하기 그지없는 2세 경영자의 모습을 무척 능청스럽게 보여주며 팽팽한 대립각을 세우는 역할을 충실히 해주었습니다.


이렇듯 <직장상사 길들이기>는 직장 내 부조리한 남녀 및 상하 관계에 대한 미러링식 풍자라는 사회적 함의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그저 오락영화로 즐기기에도 충분히 즐겁습니다. '어떤 상황에 떨어질지 모르고 어떤 능력이 쓰일지 모르니 뭐든 열심히 배워놔야 한다'는, '무슨 업보로 돌아올지 모르니 죄짓지 말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보편타당한 가르침을 샘 레이미식 반전 플레이를 통해 통쾌하고도 매콤하게 전달하고 있으니 말이죠. 오랜 파트너 제작진들과 함께 한 덕분에 촬영 구도나 연출, 특유의 악취미식 장면 등 곳곳에서 샘 레이미 감독의 친숙한 인장 또한 느껴지는 가운데, <직장상사 길들이기>는 긴장되지만 공포에 떨게 하지 않고 자극적이지만 불쾌하지 않은, 보는 이의 이마를 치게 하는 새로움과 무릎을 치게 하는 공감대를 함께 지닌 오락영화로서 부쩍 더 새로운 것을 찾게 되는 요즘 극장가에서 충분히 반가울 만한 영화입니다.


<직장상사 길들이기>(Send Help,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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