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적인 영화리뷰 2026 - <왕과 사는 남자>
장항준 감독의 새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비운의 왕으로 꼽히는 단종이 유배지에서 보낸 나날을 소재로 삼아, 기존의 조선 시대 왕실 배경 사극과는 다른 관점으로 역사의 다른 면을 비추고자 한다는 점에서 기대되었습니다. 우리가 그간 숱한 드라마나 영화에서 봐 온 것과는 어떤 다른 얼굴을 한 단종을 만나게 될 것인지, 그리고 그런 단종의 곁에 어떤 사람들이 함께 할 것인지가 '역사가 스포일러'라는 비극적 결말을 예감하면서도 무척 궁금했죠. 이런 기대감과 궁금증 속에 나온 <왕과 사는 남자>는 기대보다는 다소 평범한 연출 속에서도 배우들이 보여주는 혼신의 연기에 힘입어 그토록 기대하고 궁금했던, 우리가 몰랐던 '단종과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라도 알 수 있어서 무척 인상적인 영화였습니다. 설령 상상력이 한껏 가미된 이야기라 할지라도, 이것이 한껏 미화된 이야기라 할지라도 믿고 싶어지는 이야기였습니다.
15세기 조선,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이 온 조선을 뒤흔들었고 불과 10살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던 이홍위(박지훈)는 삼촌에 의해 왕권을 빼앗깁니다. 끝까지 자신을 지키고자 했던 충신들은 역모자로 몰려 숙청당했고, 이홍위는 그들의 역모를 인지했다는 죄로 '노산군'이라는 이름으로 강등되어 유배자의 신세가 됩니다. 마침 강원도 영월 산골 마을의 촌장인 엄흥도(유해진)는 유배자를 잘 들인 끝에 먹을 것 걱정 안하게 되고 글을 배우게 되며 형편이 폈다는 이웃 마을의 이야기를 전해듣고는, 자기 마을 안에 있는 '육지 안의 섬' 청령포가 최적의 유배지라고 관아에 어필하기 시작합니다. 마침 그 노력이 이홍위를 유배 보낼 곳을 찾던 권력의 실세 한명회(유지태)의 귀에 들어가고, 그렇게 이홍위와 그를 모시는 궁녀 매화(전미도)는 청령포로 유배를 옵니다. 엄흥도의 바람에 따라 유배자를 받게 되었지만 그가 바로 권력 찬탈의 희생자로 쫓겨난, 그로 인해 이득을 입기는커녕 그와 조금이라도 엮였다간 파국을 면치 못할 이홍위일 줄은. 영 마뜩잖은 와중에도 유배지를 지키는 보수주인으로서 이홍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야만 하는 엄흥도는 이홍위에서 느껴지는, 삶의 의지를 잃은 듯한 모습이 점차 신경쓰이기 시작합니다. 밥을 차려다 주는 것을 시작으로 엄흥도와 마을 사람들은 그렇게 외따로 떨어져 있던 이홍위를 점차 그들의 삶에 들이기 시작하고, 그 결과 엄흥도와 이홍위와 마을 사람들의 삶은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이 영화처럼 제목에 '왕'과 '남자'가 들어가는 사극 영화가 두 편 더 있었고, 그 두 편 모두 천만 관객을 넘기는 대흥행을 기록했었습니다. <왕과 사는 남자>가 앞선 그 두 영화만큼의 흥행을 기록할진 모르겠으나, 역시 흡인력 있는 이야기를 가지고 온 것만은 확실해 보입니다. 다만 장항준 감독의 연출이 그 이야기를 아주 세련되고 멋진 형태로 전하지는 않습니다. 이번 영화에서 그는 새로운 좋은 이야기를 전하는 데 공력을 집중한 듯 보이고 그 이야기를 아름답고 멋지게 전하는 데에는 크게 노력을 들이지 않은 듯, 무척 평범한 연출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단종이라는 역사 속 인물에 대한 색다른 이야기를 길어올린 효과는 뛰어납니다. 단종은 국사를 공부했다면, 하다못해 사극 드라마나 영화를 즐겨봤다면 누구나 알 만한 익숙한 인물이지만 그 익숙함은 특정한 수식어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계유정난의 패자, 피해자, 희생자라는 수식어였죠. 엄혹한 권력 투쟁의 참상을 보여주는 대상이었지, 그를 중심에 세운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전개된 적은 없습니다. 그런 단종이 이 영화에서는, 역시나 어느 이야기에서든 주요 배경이 된 적 없는 유배지라는 공간에서 비로소 희생양이 아닌 인간이자 왕의 얼굴을 하고, '단종'이라는 묘호가 아닌 '이홍위'라는 이름을 얻어 나타납니다. 영화는 그런 이홍위를 숙청의 공포 앞에서 벌벌 떠는 나약한 왕이 아니라, 단지 나이가 어렸을 뿐 왕으로서의 책임감으로 힘겨워 하고 또 결심하고 행하는 인물로 다시 묘사합니다.
자기가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누구보다 뛰어난 왕이 될 것 같아서가 아니라 그저 왕권에 대한 욕망으로 어린 조카는 물론 가족들에게까지 죄다 피를 몰고 온 수양대군과 한명회 무리의 권력 투쟁 앞에서, 정작 보살펴야 했을 이들은 철저히 외면당한 채 사지로 내몰려 굶주려 가고 있었을테죠. 엄흥도와 그가 이끄는 마을 사람들이 그런 희생양들이었을텐데, 영화는 이처럼 서로 다른 관점에서 희생양이 되어야만 했던 두 사람을 만나게 합니다. 태평성대였다면 서로 만나고 통할 일이 일절 없었을 두 사람이 하수상한 이 시국이기에 비로소 만나게 되고, 태평성대였다면 각자가 깨달을 일 없었을 것을 깨달아가게 됩니다. 엄흥도는 패자라는 이름을 달고 역사 바깥으로 내팽개쳐진 이가 품고 있었던 왕으로서의 너른 마음과 그만큼의 커다란 고충을 목격하며, 먹고 사느라 바쁘기에 알 길 없었던 '왕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홍위는 모두가 자신을 품을 엄두를 감히 내지 못하던 현실에서 비로소 자신의 가치를 알아준 백성들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면서 생애 단 한번도 자기 의지대로 살아온 바 없었던 자신에게 내재된 힘을 깨닫게 됩니다. 영화는 역사 기록에서는 '패자가 유배된 후 보낸 삶'에 대해 관심을 기울일 구석이 없었을테니 몰랐을, 그러나 후세의 우리들은 그 이름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궁금할 수 밖에 없는 이홍위의 진짜(라고 믿고 싶은) 삶을 상상력을 더해 그려냅니다. 덕분에 비극적 결말에 이를 것을 알면서도 그 결말에 무기력하게 당도하지만은 않는, 힘 있는 인물과 이야기를 얻었음으로 그 결말마저 힘주어 마주하게 되는 뜻밖의 감동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왕과 사는 남자>에서 무엇보다도 눈부신 것은 엄흥도 역의 유해진 배우와 이홍위 역의 박지훈 배우가 각자 발휘하는 역량과 함께 만들어내는 호흡이었습니다. 이 영화 속 유해진 배우의 연기는 그가 어떤 연기부터 어떤 연기까지 보여줄 수 있는지를 총망라한 필모그래피 쇼케이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극 초반에는 세속적인 면모와 촐싹맞은 성격으로 극의 웃음을 이끌어가는 역할을 하더니, 이홍위와의 만남 이후 변화하는 심경과 이후의 선택을 보여주면서는 자연스럽게 희극에서 정극의 영역으로 넘어와서는, 마지막에 이르면 그가 지금껏 정극 장르에서 보여준 가장 강력한 감정선을 보여주며 기어이 관객의 눈물을 뽑아내고야 맙니다. 그 모든 연기 스펙트럼이 어느 하나 작위적으로 느껴지지 않고 웃기든 울리든 관객을 속절없이 굴복시키니, 영화가 이 정도의 진정성을 지니게 만든 일등공신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공은 물론 박지훈 배우가 함께 만든 것이라고 봐도 좋겠고요. 죄책감과 패배감에 찌들어 무기력해 있떤 눈빛에 점차 총기가 채워지고, 어린 소년 같았던 이가 비로소 왕의 위엄을 뿜어내는 과정을 어쩜 그리 매끄럽게 보여주는지요. 영화 데뷔작이라는 것을 믿기 힘들 만큼, 그가 영화에서 얼굴과 목소리로 보여주는 감정선은 두터운 서사를 담고 있기에 충분했습니다. 드라마 [약한영웅]에 이어 이번 영화로 그는 연기 인생의 또 다른 큰 전환점을 맞게 될 듯 합니다. 더불어 기존에 여러 매체에서 그려진 한명회의 익숙한 모습에서 벗어나 기골이 장대한 모습으로 좌중을 압도하는 한명회를 카리스마 넘치게 그려낸 유지태 배우의 활약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영화 <황진이> 외에는 사극 출연작이 없는 배우인데 특유의 묵직한 저음에 말끔한 발성이 더해지며 무게감 충만한 사극 연기를 보여주었네요.
실제 역사를 창작물의 소재로 다룸에 있어서 왜곡이나 미화 논란이 심심찮게 따르기 마련이고, <왕과 사는 남자> 역시 포괄적으로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해석이 달라지는 역사 속 이야기에 대해 창작물인 만큼 어느 한 줄기를 택하다 보니 이게 실제 역사인지 아닌지 세간의 입에 오르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단종의 이야기만은 감히 아무렴 미화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이 실제 역사든 조미료 한껏 첨가하여 일종의 대체 역사물에 가깝게 만들어진 픽션이든, 이렇게 해서라도 그의 삶이 오롯이 제 모습을 찾을 수 있기를, 후세에 내려진 '단종'이라는 비극적 이름보다도 '이홍위'라는 본래 이름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죠. 그런 마음이 절로 들게 하는 이야기와 인물들의 얼굴이 깃들어 있어 깊은 여운을 남기는 영화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