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는 차갑게, 심장은 뜨겁게

인상적인 영화리뷰 2026 - <휴민트>

by 김진만
<휴민트>(HUMINT, 2026)


실화극, 복고풍 케이퍼무비, 프랜차이즈 형사물 등 액션이라는 장르의 자장 안에서 매번 변신을 거듭해 온 류승완 감독이 이번에 선보이는 새 영화 <휴민트>는 <베를린> 이후 오랜만에 만나는 그의 첩보액션물입니다. 언론 매체에서 여러 차례 들어본 듯 하지만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몰랐던 이 영화의 제목 '휴민트'는 'Human Intelligence'(휴먼 인텔리전스)의 약칭으로, 사람을 통해 벌이는 정보 활동을 일컫습니다. 포스터에도 그 의미가 기재되어 있는데, 의외로 이 '휴민트'라는 제목은 영화에 담긴 정서를 함축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철저히 이성적으로 접근해야만 하는 정보 활동 한 가운데에 '사람'이 있다는 것, 거기서 오는 차가운 공기와 뜨거운 공기의 공존이 영화의 핵심이었고 그것이 무척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20년 넘게 액션 장르라는 한우물을 파 온 류승완 감독이 또 한번 선사하는 새로운 감각이랄까요.


국정원 블랙 요원인 조 과장(조인성)은 동남아에서 휴민트 작전을 수행하던 중 탈북자 정보원 김수린(주보비)으로부터 북한과 러시아가 얽힌 중대한 국제 범죄의 단서를 얻게 됩니다. 조 과장은 그 단서를 쫓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고, 그곳에서 북한 식당의 종업원으로 있는 채선화(신세경)를 만나 새로운 휴민트 작전의 정보원으로 택하고 비밀리에 접촉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채선화와의 접촉을 통해 국제 범죄를 추적해 가던 몇달 후, 북한-러시아 접경 지역의 연쇄 실종 사건을 조사하고자 북한 보위성 조장 박건(박정민)이 블라디보스토크로 파견됩니다. 박건은 이내 이 사건의 배후에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 황치성(박해준)이 얽혀 있음을 알게 되는 한편, 과거 그와의 잊지 못할 인연으로 얽혔던 채선화의 행적 또한 알게 됩니다. 국제 범죄를 추적하는 조 과장과 조 과장의 정보원인 채선화, 채선화의 옛 연인인 박건과 박건이 추적하는 황치성. 이들은 서로 다른 것을 추적하는 듯 하지만 결국 하나의 지점에서 만나게 되고, 물러설 수 없는 대치 상태에 놓입니다.


<휴민트>(HUMINT, 2026)


'사람을 통한 정보 활동'이라는 뜻처럼, 영화 <휴민트>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사람'을 정보의 '자원'으로 사용하는 데에서 오는 윤리적 딜레마입니다. 그 딜레마처럼 영화는 냉기와 열기가 공존합니다. 등장인물들의 외면에서는 일단 냉기가 한껏 느껴집니다. 주인공 조 과장은 국정원 블랙 요원이라는 신분답게 영화가 끝날 때까지 이름을 알 수 없고 (이는 그의 파트너인 임 대리(정유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도 당연히 알 길이 없습니다. 생사의 갈림길이 될지도 모를 현장으로 뛰어드는 일을 그는 매일같이 반복되는 업무로 받아들여야만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멘탈이 여간 단단해선 안됩니다. 북한 보위성 조장인 박건도 사정은 다르지 않아서, 언제 어떤 감시와 배신이 들이닥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감정을 흘릴 수 없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싸늘한 공기까지 더해져 그렇게 감정을 걷어낸 얼굴로 종횡무진 누비는 인물들의 모습에선 지금까지 류승완 감독의 영화에서 본 가장 건조한 냉기가 느껴집니다. 하지만 액션 장르를 고집하면서도 늘 인물들을 병기 취급하는 법은 없었던 감독답게, 이번 영화 역시 이러한 환경과 상황 속에서도 중심에 서 있는 건 인간임을 잊지 않습니다. 인간이기에 '사람을 자원처럼 필요할 때 실컷 써먹다가 필요없어지면 내버려둬도 되는가'라는 윤리적 질문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고, 인간이기에 뜨거운 감정을 발판삼아 그 질문의 장벽을 뛰어넘게 되는 것이죠.


그런 인간된 감정의 표출 수단으로 바로 액션이 활용된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직선의 이미지들과 삭막한 한기로 가득한 블라디보스토크를 내내 정적으로 비추는 카메라 안에서도, 액션 장면만은 마치 그 한가운데 피가 흐르는 혈관이 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폭발적입니다. 주먹을 내지르든 총신을 휘두르든 총을 쏘든 절도 있으면서도 무자비하게 내리꽂는 타격감은, 거기에 꼭 감정이 실린 듯 관객의 시청각을 파고듭니다. 이와 함께 마치 양가감정처럼 액션과 두 축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예상보다 더 짙은 멜로적 코드입니다. 류승완 감독은 이 영화와 세계관을 같이 하는 전작 <베를린>에서도 은밀하면서도 강한 멜로 코드를 통해 감정의 진폭을 키운 바 있는데, 이번 <휴민트>는 그보다 한때 소중한 사이였던 박건과 채선화의 관계를 통해 더욱 농도 짙게 드러냅니다. 사실 사건의 진실은 단순하기 때문에 이 영화에는 첩보물임에도 불구하고 숨겨진 배신의 가능성 같은 반전 요소들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영화에서 긴장감을 자아내는 것은 명명백백한 감정을 진 감정을 지닌 이들이 물러설 곳 없는 대치 상황에 놓이는 것 자체에서 오는데, 이런 긴장감을 영화는 고도로 단련되었으면서도 격렬한 감정이 동반된 듯한 액션과 감독의 어느 전작들보다도 짙은 멜로 코드를 통해 흡인력 있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휴민트>(HUMINT, 2026)


인간은 소중한 존재에게 자신을 드러내기 마련이지만, <휴민트>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을 드러내선 안되고 그러려면 소중한 존재를 곁에 두어서도 안됩니다. 자신에게 소중한 존재가 있을수록 위험의 반경이 더욱 커질 수 밖에 없는 이 세계에서,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그 모든 감정을 증발시킨대도 결국 사람이므로 남을 수 밖에 없는 최후의 순정이 블라디보스토크의 혹한을 뚫고 날아듭니다. 류승완 감독은 이렇듯 전작들과 사뭇 다른 이번 영화의 감성을, 전작들을 함께 했던 배우들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활용하면서 멋스럽게 그려냅니다. 영화의 두 주인공인 조인성-박정민 배우는 감독의 전작 <밀수>를 함께 했는데, 조 과장 역을 맡은 조인성 배우는 <밀수>의 어느 한 장면에서 보여주는 멋을 그야말로 러닝타임 내내 보여주며 관객을 매료시킵니다. 머리는 차갑지만 가슴은 뜨거운, 고독한 심장을 지닌 블랙 요원의 행적을 담백하면서도 스타일리쉬하게 표현해내죠. 한편 박건 역을 맡은 박정민 배우는 감독이 <밀수>에서 그려낸 그의 캐릭터에 대한 빚을 갚기라도 하는 듯, 밖으로 표출하는 액션부터 안으로 무르익어가는 정서까지 멋의 '풀패키지'를 그를 통해 꺼내보입니다. 그가 조인성 배우와 맞붙어서 대등한 멋을 뿜어내리라곤 관객도, 배우 본인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더불어 욕망에 눈이 멀어 뒤로 갈수록 광기어린 폭주를 보여주며 강렬한 악역 연기를 펼친 황치성 역의 박해준 배우, 전형적인 첩보물 속 히로인 역할일 것 같으면서도 주도적으로 서사를 써나가는 인물인 채선화를 진중하게 표현한 신세경 배우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류승완 감독의 영화는 치밀하게 설계된 액션만큼이나 인물들의 감정에도 늘 가까이 다가가곤 했습니다. 그 액션을 행하는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품고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가 어느 때보다 하드한 질감으로 연출한 <휴민트> 역시 휴민트 작전이라는 소재를 가져와서는 '정보를 제공하는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품으며 그 싸늘한 공기 속을 누비는 이들이 어디까지나 뜨거운 심장을 지닌 인간임을 잊지 않습니다. 그런 인간이 후날리는 옷자락은, 휘두르는 주먹은, 겨누는 총구는 그래서인지 멋이라는 게 폭발하고요. 이처럼 <휴민트>는 외형적으로는 류승완 감독의 가장 차가운 영화 같으면서도, 실상은 그의 가장 멋있는 영화이자 동시에 가장 애달픈 영화일 것입니다.


<휴민트>(HUMINT, 2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