낫지 않을 상처를 끌어안고도 살 수 있다면

인상적인 영화리뷰 2026 - <센티멘탈 밸류>

by 김진만
<센티멘탈 밸류>(Sentimental Value, 2026)


영화 <센티멘탈 밸류>는 노르웨이의 떠오르는 명감독 요아킴 트리에의 신작입니다. 감독의 전작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부터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는데 이번 영화는 작년 칸영화제 공개 당시 특히 평단의 찬사를 받으며 유력한 수상 후보로 거론되었고, 그 기대에 걸맞게 심사위원대상 수상의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연기상을 포함한 9개 부문 후보에 오르며 수상 결과에 대한 기대를 낳고 있습니다. 영화의 제목인 '센티멘탈 밸류'(Sentimental Value)는 남들에겐 사소하지만 자신에겐 대단히 큰 의미로 다가오는 어떤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렇듯 영화는 어떤 거대하고 굵직한 서사 대신 지극히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이야기를 담아내는데 어째서 이렇게 깊고 긴 감동을 자아낼 수 있었던 것일까요. 아마도 예술을 매개로 바로 그 '센티멘탈 밸류', 기억과 감정의 상대적인 크기와 깊이를 사려 깊게 담아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연극배우이고 연극을 사랑하지만 무대 공포증을 떨쳐내긴 쉽지 않은 노라(레나테 레인스베)에게 어느 날 뜻밖의 제안이 찾아옵니다. 엄마의 장례식장에서 오랜만에 마주한 아버지이자 거장 감독 구스타브(스텔란 스카스가드)가 오랜만에 준비하는 새 영화의 주연배우로 자신을 캐스팅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라는 게 자신들이 지금도 살고 있는, 이 가족이 한 세기를 함께 해 온 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구스타브의 어머니이자 노라의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노라와 동생 아그네스(잉가 입스도테 릴리오스)는 과거 아버지가 예술인이 되겠답시고 집을 떠나 바깥으로만 나돌던 사이 엄마와 함께 힘들지만 번듯하게 어른으로 커 왔습니다. 그랬던 아버지가 이제 와서 이런 제안을 한다는 게 이해할 수 없거니와 그런 아버지와 같은 작품 작업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불편한 노라는 아버지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결국 구스타브는 노라를 대신할 주인공으로 할리우드 톱 배우인 레이첼(엘 패닝)을 캐스팅하고, 가족의 과거에 관하여 그 과거의 당사자들과 그 과거를 재현하는 이들 사이의 묘한 교류가 시작됩니다. 그렇게 가족의 과거를 되짚는 영화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노라와 구스타브, 아그네스 세 사람은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지난 시간의 사무치는 감정들과 다시 마주합니다.


<센티멘탈 밸류>(Sentimental Value, 2026)


전작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에 사랑 사이의 개인을 탐구했던 요아킴 트리에 감독은 이번 <센티멘탈 밸류>에서 가족 사이의 개인을 탐구하며 그 시공간의 범위를 확대해 나갑니다. 바다 건너 북유럽에서 만들어진 이야기임에도 일단 이야기에 몰입하기가 익숙한 것은, 가정은 내팽개치고 꿈을 찾아 떠난 아버지와 그의 부재 속에서 어른이 된 자매의 이야기가 일면 K-드라마의 익숙한 그림을, 나아가 한국 사회의 현실에서도 심심치 않게 보였던 풍경을 연상케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언뜻 이렇게 시작되는 이야기 안에서 두 딸은 (특히 첫째딸은) 아버지와 울분 섞인 목소리로 뜨겁게 다툴 것만 같지만 영화는 (이게 북유럽 감성이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들끓으려는 감정과 거리를 둡니다. 그리고 주요한 두 가지 장치를 그들 사이에 심어놓는데, 바로 집이라는 공간과 영화라는 예술입니다. 영화에는 주인공들보다도 그들이 살아온 집이 더 먼저 등장합니다. 그 집은 한 세기동안 같은 자리를 지켜오며 3대에 걸친 가족사의 곡절을 침묵 속에서, 그러나 누구보다도 빠짐없이 지켜봐 왔음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가족의 역사를 함께 해 온 집안 곳곳에는 당사자가 아니면 그 의미를 알지 못할 흔적들이 자리합니다. 그 작은 흔적들을 품고서, 균열을 안고서 조금씩 기울어져 가면서도 세월에 맞서 버티고 있는 듯한 집의 모습은 그 자체로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표상인 듯합니다. 남들은 이해 못 할, 그러나 그들 각자에게는 사무칠 상처들을 안고서도 용케 서 있는 가족이라는 곳을 나타내면서 말이죠. 이렇게 내밀한 것이 가족이라는 것인데, 이런 가족의 이야기를 누구나가 보게 되는 영화로 재탄생시키겠다고 하니 그런 아버지가 딸들은 마뜩잖을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감독은 본인 또한 예술 작품을 만드는 한 사람으로서, 그렇게 현실 앞에서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가혹한 일면과 동시에 희망적인 일면 또한 함께 보여줍니다. 내 감정에 따라 편집되거나 재구성되기도 하는 기억의 자장으로부터 벗어나 눈앞에 오롯이 펼쳐지는 과거의 아픔과 마주하는 것. 그리하여 내 감정에 몰입되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이 영화라는 방식 안에서 탄생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죠. 노라도 구스타브도 그래서 떠나보내야만 했던 세월이 얼마나 길었던지. 기껏해야 나란히 우두커니 서서 어색하게 맞담배를 피는 정도가 가장 가까워질 수 있는 거리였던 부녀는, 지금도 얼굴 마주 보고 허심탄회하게 각자의 속내를 토로할 수는 없겠지만 영화가 어쩌면 그 대안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장면 안에 내 기억을, 내 분신을 던져놓고 그 장면 안에서 재현되는 기억의 면면을 마주하며 비로소 내가 어땠는지를, 나에게 상처를 주었던 당신은 어떠했는지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렇게 무대 위의 배우와 무대 아래의 감독이 되어 서로를 응시할 용기를 얻게 되는 딸과 아버지의 모습 위에 기묘하게도 그들을 비롯해 유구한 가족의 역사를 품어 온 집의 모습이 겹쳐집니다. 상처가 금방 치유되지는 않을 것을 알면서도, 그 상처를 안고도 살아갈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그건 바로 이 집 안에서가 아닐지 생각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센티멘탈 밸류>(Sentimental Value, 2026)


이렇게 영화 만들기를 준비하는 얼마간의 시간 동안 한 가족이 감내해 왔을 수십 년의 역사를 체감함에 있어 소리치지 않고도 깊고 넓게 울려 퍼지는 배우들의 연기가 큰 힘을 발휘합니다. 요아킴 트리에 감독의 전작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로 단숨에 세계가 주목하는 배우로 떠오르며 올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도 오른 레나테 레인스베는, 현대 청년의 불안한 심리를 대변했던 전작에 이어 가족의 일원으로서 그 희로애락의 역사를 마주하는 동시대 청년의 모습을 더욱 원숙하게 보여주며 감독의 페르소나 자리를 굳건히 합니다. 격정적으로 토로하지 않고도 그치지 않는 감정의 일렁임과 떨림을 짚어내며 그 절절함을 능히 짐작하게 만드는 연기는 이것이 '북유럽식 감성'의 정수임을 여실히 깨닫게 합니다. 한편 할리우드 활동으로 친숙하지만 스웨덴 출신으로 역시 북유럽권 배우인 스텔란 스카스가드는 긴 세월 끝에 딸들과 어색하게 마주한 아버지의 얼굴을 다면적으로 그려내며 풍부한 울림을 만들어냅니다. 자칫 평면적인 '몹쓸 아버지상'으로 다가올 수 있는 캐릭터 안에 여러 표정을 심어 넣으며 딸과 마주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더 많은 의미가 읽히게끔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더불어 노라가 보듬어줘야 할 대상이자 동시에 기댈 곳이 되어주기도 하는 따뜻한 마음씨의 동생 아그네스를 연기한 잉가 입스도테 릴리오스, 구스타브의 작품 세계에 반해 그와의 작업을 결심했지만 한 가족의 내밀한 세계 안에 들어온 듯한 느낌에 고뇌에 휩싸이기도 하는 배우 레이첼 역의 엘 패닝까지. 과연 네 배우 모두 아카데미 연기상 후보에 오를 만하다 싶을 만큼 각자 또는 서로의 만남이 장면에서 만들어내는 호흡이 영화에 더욱 풍성한 의미가 담기게끔 만들어주었습니다.


<센티멘탈 밸류>는 말 못 할, 그러나 유구한 가족의 역사를 담아내는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예술의 힘'을 이야기하지만 그 예술의 힘은 저절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며 어디까지나 인간의 용기가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오래 묵은 그 상처가 한순간에 치유될 거라고, 제 발로 떠나간 당신을 내가 먼저 마음속에 다시 들일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 감정에 매몰되어 당신을 외면하지는 않으리라는, 당신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는 않으리라는 용기 어린 목소리를 예술의 힘을 빌어 건네어 보는 것이죠. 영화는 넘치지 않지만 온기 어린 감정과 유머, 뜨겁게 표출되지 않지만 인간미가 느껴지는 연기와 그들의 이야기를 감각적인 연대기로 엮어내는 연출을 엮어 가족, 삶, 예술의 관계성을 조밀하게 구축합니다. 그렇게 무척 조심스럽고도 무척 세심한 북유럽 감성이 조용히 마음에 내려앉아 좀체 사라지지 않는 긴 파장을 남깁니다.


<센티멘탈 밸류>(Sentimental Value, 2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