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적인 영화리뷰 2026 - <햄넷>
<노매드랜드>로 아시아계 여성 최초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한 바 있는 클로이 자오 감독이 동명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연출한 영화 <햄넷>은, 불세출의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숨겨진 이야기에 관한 픽션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셰익스피어에 관한 짤막한 사실에서 출발한 상상력으로 빚어진 이야기이므로 이것이 실제로 셰익스피어에 얽힌 이야기인지는 장담할 수 없고, 사실이 아닐 가능성도 농후합니다. 그러나 전작들에서도 거대한 세계 속에서 자신만의 길을 가는 사람들을 비추어 왔던 감독의 시선을 견지하면서, 작은 인간이 감당하기에 너무 버거운 세상의 거대한 풍파까지도 버티게 하는 어떤 구원의 힘으로서 셰익스피어의 가장 대표적인 명작을 모티브로 가져온 이야기는 충분히 흥미롭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시공을 초월하는 예술의 변하지 않는 힘과 그 예술의 바탕이 되는 인간의 생명력을 깨닫게 하며 예상 이상의 감동을 줍니다.
지주 집안의 맏딸 아녜스(제시 버클리)의 별명은 '숲속 마녀의 딸'입니다. 상대방의 엄지와 검지 손가락 사이를 잡으면 그 사람의 운명을 읽을 수 있는 비범한 능력을 지녔고, 매를 길들이거나 사람들에게 자신만의 처방전으로 갖은 식물을 이용한 천연 약을 처방해 주는 등 세간의 인식과 무관하게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어서일까요. 그런 아녜스는 어느날 아이들을 개인교습하러 집에 새로 온 라틴어 교사 윌리엄 셰익스피어(폴 메스칼)와 사랑에 빠집니다. 집안에서 별종 취급을 받으며 홀대 받아온 아녜스와 장갑 장인인 아버지의 강압적인 지도 아래에서 자라 온 윌리엄은 두 집안의 반대를 최소화하기 위해 아이를 먼저 갖고 결혼하기로 합의하고 그렇게 실천에 옮깁니다. 다행히 묵묵히 아녜스를 지지하고 지원해주는 동생 바톨로뮤(조 알윈)가 있었고, 윌리엄의 어머니 메리(에밀리 왓슨) 역시 갈수록 아녜스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아녜스는 자신의 임종을 '두 아이'가 맞이하리라는 예감을 읽었는데, 뜻밖에도 첫째 수재나에 이어 쌍둥이 햄넷(자코비 주프)과 주디스가 태어납니다. 그렇게 세 아이와의 행복한 일상 속에서 그 예감은 틀린 것으로 잊히는 줄 알았지만, 예감은 결국 틀리지 않았습니다. 가장 소중한 존재를 잃은 끔찍한 고통 속에서 아녜스가 외로이 몸부림치는 동안, 아버지의 강요를 뿌리치고 극작가의 꿈을 좇아 런던으로 간 윌리엄은 그곳에서 한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데 매진합니다.
'햄넷'이라는 영화의 제목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에게 실제로 있었던 아들 햄넷을 가리킵니다. 아들 햄넷은 11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는데, 그로부터 7년 뒤에 셰익스피어 불후의 명작 '햄릿'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셰익스피어가 살았던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는 '햄넷'(Hamnet)과 '햄릿'(Hamlet)이 보통 같은 이름으로서 혼용되고는 했다는 연구가 있었는데, 영화 <햄넷>의 이야기이자 원작 소설 '햄닛'(국내 출간명)의 이야기는 그로부터 출발한 상상력으로 빚어졌습니다. '햄릿'의 탄생 기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야기가 있겠고 이보다도 더 많은 지지를 받는 가설도 있겠지만, (영화의 각본을 공동집필하기도 한) 원작 소설의 작가 매기 오패럴과 클로이 자오 감독은 아들 햄넷과 희곡 '햄릿'의 존재, 그리고 그 사이 시간의 여백이라는 제시된 사실 사이의 공백을 충분히 개연성 있는 이야기들로 채워나갑니다. 그 공백을 채우는 중요한 큰 사건은 바로 햄넷의 너무나 이른 사망입니다. 전작에서도 그러했듯 클로이 자오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도 재단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벗삼아 그 커다란 상실을 그려나갑니다. 만남과 사랑과 결실이 그러했듯, 이 상실의 고통 역시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흐름인 것처럼 말이죠. 아녜스와 윌리엄이 사랑에 빠지고, 가족을 이루고, 행복한 일상을 꾸려나가는 과정은 결국 큰 상실의 순간으로 다다를 것임을 예감하게 됩니다. 그러나 막상 그 두려웠던 상실의 순간과 기어이 마주하게 될 때 우리가 느끼는 것은 무너질 것 같은 좌절감으로 세상을 깨부수어 나가는 비명이 아닌 적막입니다. 숨막힐 정도로 떠밀려 오는 고통 앞에서 지켜보는 누구도 자신의 호흡을 허락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고요 앞에서, 상실의 고통은 그 커다란 몸집을 비로소 과시하고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그 앞에서 얼마나 취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영화는 그 상실의 고통을 뼛속 깊이, 들이마시고 내쉬는 공기 안에까지도 새겨넣는 와중에도 그 고통으로 인해 인간이 무너지도록 지켜보고만 있지 않습니다. 고통을 겪는 이들 바로 곁에서 그들의 호흡까지도 놓치지 않고 끌어안는 한편, 그 고통에 아랑곳않고 무심히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 인간은 그 금방 사라지지 않을, 어쩌면 영원히 남을 고통을 끌어안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함께 탐색합니다. 그리고 그 탐색의 몸부림 끝에 도착하는 곳에 예술이 해답으로서 자리하고 있습니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상실로 인하여 밀려든 모든 슬픔과 후회를 안고 한 편의 시처럼, 한 움큼의 울부짖음처럼 그 마음을 무대 위에서 토로하는 순간이 펼쳐집니다. 예감하지 못했기에 작별을 건네지도 못했던 미완의 이별이 그제서야 이뤄집니다. 그때 잡아주지 못했던 손을 잡고, 그때 덜어주지 못했던 고통을 나누어 받고, 무대 위에서나마 너를 살려 너 대신 내가 살아있는 것만 같은 죄책감에 대해 용서를 구하려는 마음이 전해집니다. 영화는 클라이맥스 직전에 멈추어 섰던 원작 소설의 이야기 이후로까지 나아가며, 이 역사적인 무대를 통해서 잠깐 세상에 존재했던 어떤 이름이 억겁처럼 길었던 상실을 넘어 영원으로 기억되는 순간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어떤 생명은 꽃을 채 피우기도 전에 스러지고 말았지만 이로 인해 그 생명이, 그 이름이 용감한 삶을 살았음을 수세기를 건너 우리 역시 기억합니다. 그렇게 필멸이 불멸이 되기까지의 아득한 슬픔과 찬란한 기쁨이 이 이야기에는 공존하고 있기에 결말이 전해주는 힘은 기대보다 더 강력합니다.
너무나 유명한 인물과 유명한 예술 작품에 관한 (가공의) 뒷이야기를 담고 있기에 무척 인위적인 스토리라인과 감정선을 지닐 수도 있지만, 진심 어린 원작의 손길을 바탕으로 넓게 볼 줄도 들여다 볼 줄도 아는 감독의 연출에 배우들의 생동하는 연기까지 어우러져 마음을 뒤흔드는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아녜스 역의 제시 버클리는 이 영화로 올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거의 예약한 수준이 아닌가, 트로피에 이름만 새기기를 기다리는 수준이 아닌가 싶은 연기를 보여줍니다. 자유로운 영혼으로서 그 누구의 시선과 평가에도 아랑곳하지 않던 주체적 인물이 가없는 사랑 뒤 찾아온 크나큰 상실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진 끝에, 예술만이 보여줄 수 있는 시간을 뛰어넘은 호명 앞에서 다시 구원받는 과정이 그의 연기 안에서 고스란히 구현됩니다. 한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상전벽해를 생생히 보여주는 그 연기는 어떤 감정만을 과장되게 호소하는 것 없이 모든 감정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며 아녜스라는 이 신비로운 인물에 현실감을 불어넣습니다. 한편 남편 윌리엄 역의 폴 메스칼 역시 빼어난 연기를 보여주며 영화가 보여주는 슬픔과 기쁨의 정경을 훌륭히 완성합니다. 공교롭게도 그를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로 올렸던 <애프터썬>에 이어 이번 영화에서도 '상처를 품은 아버지'의 모습을 연기하는데, 이번에는 윌리엄 셰익스피어라는 역사적 인물의 아우라를 더해 감당할 수 없는 상실 앞에서 예술가로서 치열하게 전개하는 고뇌와 그 결실을 감동적으로 보여줍니다. 그가 올해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르지 못한 것은 무척 의아한 일입니다. 더불어 비운의 주인공인 부부의 아들 햄넷 역의 자코비 주프 역시 맑고 영특한 연기를 선보이며 감정선을 한껏 자극하는데, 그가 영화에서 햄릿을 연기하는 배우로 등장하는 노아 주프의 실제 막내 동생이라는 점 역시 영화 속 햄넷과 햄릿의 이야기 사이의 연결점에 대해 각별히 생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영문학을 전공하거나 관심있게 보지 않는대도 '햄릿'이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라는 점은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 <햄넷>을 보고 나니 '햄릿'이 그저 비극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산 자들의 기억에만 남은 채 세월 속에서 잊혀졌을지도 모를 어린 생명의 이름을 기억하게 한, 용감함으로 인해 외려 세상을 일찍 등지고 만 그 생명이 자라서 수백년에 걸친 사람들에게 영감과 연모의 대상이 되도록 한 이 작품이 비단 비극으로만 남을 수 있을지. 햄릿은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그 유명한 구절을 남겼지만, 이 불멸의 명작으로부터 탄생한 구원의 서사 앞에서 삶과 죽음의 문제는 저만치 초월되는 듯 합니다. 워낙 유명한 작가와 유명한 작품이기에 실제로는 저렇지 않았다는 이의 제기가 반드시 있겠지만, 왜곡하거나 과장하기보다 예술이 품은 인간 구원의 가능성에 대해서 재해석했을 따름인 이 작품 앞에서 그런 이의 제기는 무용하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