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적인 영화리뷰 2026 - <28년 후: 뼈의 사원>
<28년 후> 이후 1년도 채 되지 않아 다음 이야기 <28년 후: 뼈의 사원>이 나왔습니다. 시리즈의 각본을 도맡아 온 알렉스 가랜드가 이번에도 각본을 맡았지만 연출은 대니 보일 감독이 아닌 <캔디맨>, <더 마블스>의 니아 다코스타 감독이 맡은 이번 영화는 흥미로웠던 (그만큼 크게 호불호를 타기도 했던) 전편의 노선 전환을 이어가며 흥미로운 화두를 던집니다. 영화의 출발점인 <28일 후>가 21세기 좀비 아포칼립스 장르물의 효시로서 큰 역할을 했지만, 이번 <28년 후: 뼈의 사원>에 이르러서는 그 정체성을 더욱 적극적으로 떨쳐냅니다. 기대하는 좀비 액션이 펼쳐지지 않는 좀비 아포칼립스의 세계에서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영화는 좀비 액션보다도 더 섬뜩하고 절박한 이야기를 제시하며 전환된 노선에 동력을 부여하고 기어이 다음 편에 대한 궁금증의 불씨가 살아나게끔 만들고야 맙니다.
분노 바이러스가 잠식하여 하루하루를 목숨 걸고 생존해 나가야만 하는 세계, 그 속에서 소년 스파이크(알피 윌리엄스)는 가족의 품을 떠나 홀로 생존의 여정에 들어섰습니다. 기댈 곳 없던 스파이크가 만난 공동체는 지미 크리스탈 경(잭 오코넬)이라는 인물이 이끄는 8인의 생존자 집단. 지미 크리스탈을 제외하고는 스파이크와 같은 청소년들로 보이는 그들은 모두가 지미처럼 금발머리 가발을 쓰고서, 다같이 지미라는 이름을 쓰면서 폐허 사이를 활개치고 다닙니다. 이들을 이끄는 지미 크리스탈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바탕으로 작금의 분노 바이러스가 세상을 지옥으로 인도하기 위한 악의 결단에 의한 것이며, 우리는 그러한 악의 선지자에 바칠 더러운 영혼들을 물색하고 처단할 사명이 있다고 믿는, 한마디로 '사탄 신봉자'입니다. 그 믿음을 바탕으로 '지미들'은 앞길을 가로막는 감염자들을 가차없이 처치함은 물론 무고한 인간들에게까지 끔찍한 짓을 자행하는데, 스파이크는 그런 지미와 그 추종자들의 행태를 견딜 수 없습니다. 한편 뼈로 이루어진 사원을 짓고 그 안에서 죽은 자들을 기억하며 생존의 길을 모색하던 켈슨 박사(랄프 파인즈)는, 자신을 자주 찾아(?)오곤 하던 알파 감염자 삼손(치-루이스 페리)에게서 이 바이러스가 어쩌면 치유될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희망을 발견하기 시작합니다.
전편 <28년 후>는 다양한 감염자들의 모습과 그들과의 충돌 과정에서 발생하는 파워풀한 액션 장면들로 눈길을 사로잡던 전반부에서 난데없이 정적인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관객들이 호평과 실망감을 동시에 보냈었습니다. 그렇게 극적으로 전환된 노선은 이번 <28년 후: 뼈의 사원>에서 다시 원상복귀되지 않고 이어집니다. 스파이크가 떠나온 길을 되돌아가지 않듯, 어떤 길은 적막하고 어떤 길을 손에 땀을 쥐게 하듯 이런 노선 역시 이 이야기가 나아가는 하나의 과정이라는 걸 뜻하는 거도 같습니다. 이번 영화에서 무섭게 들이닥치는 감염자들과 그들에 맞서 싸우는 생존자들의 사투같은, 이런 장르에서 기대할 법한 볼거리는 오히려 전편보다 더 보기 드뭅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편은 적어도 전편보다 노선이 일관되다고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사의 대부분은 인간들 사이에서만 전개되는데, 이는 이쯤 되면 이 영화 속 세상에서 '감염자들과의 사투'만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생존의 기로 앞에 서는 것이 이제는 일상이 된, 젊은 세대들에게는 그것이 아예 일생이 되었을 30년 가까이 되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게 한 세대에 걸쳐 생존의 세월을 보내온 사람들은 이제 이 황무지 같은 세상에서 무엇에 기대고 무엇을 믿을 것인지가, 감염자들과의 사투만을 반복해서 보여줄 수 없게 하는 유의미한 화두로 나타난 것입니다.
좀비 아포칼립스라는 불가항력적인 세계의 파국 속에서, 영화는 우위에 서고자 자신을 악의 화신으로 옹립한 자와 파국 이전의 세상을 기억하며 끊임없이 복원을 시도하는 이를 노골적으로 대비시킵니다. 성별이나 나이를 막론하고 '지미'라는 이름을 붙이며 자신들을 익명화시키는 어느 한 쪽과, 'n번 알파 감염자'였을 존재에게 '삼손'이라는 이름을 붙이며 익명 속에 숨은 파국의 시대를 다시 호명하려는 다른 한 쪽. 죽지 못하고 살아있는 이 세계가 너무나 고통스러운 나머지 그 고통의 명분을 찾아다니며 그 고통보다 더 고약한 존재가 되려는 어느 한 쪽과, 바이러스가 인간성을 지워버린 것이 아니라 잠시 가려버린 것일 뿐이라 믿으며 그 짙고 끈적한 안개를 쫓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손짓하는 다른 한 쪽. 이러한 양쪽이 종래에는 만나게 되어 있는 각자의 행보를 이어가는 것이죠. 영화는 이 둘을 오가며 어떤 때에는 감염자들보다도 더 잔혹한 인간의 일면을, 어떤 때에는 이 이야기에서 만나게 될 거라 생각지 못했던 서정적인 인간의 일면을 교차해 보여줍니다. 세계의 희망과 절망이 교차한 끝에 만나서 어떤 대충돌을 빚어내는 듯한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대단히 신선한데, 한편으로는 그들 각자의 신념, 신앙을 품고 원없이 격돌하는 축제의 현장을 지켜보는 것도 같습니다.
'더 크고 더 요란하게'라는 속편의 법칙을 거슬러 더 작고 더 조용하게 펼쳐지는 이야기 속에서 볼거리는 성에 차지 않을지언정 인물들을 뚜렷이 보입니다. 전편에서 중반부터 등장하며 기이한 인상을 주었던 켈슨 박사는 이번 편에서 자신의 세계와 신념을 생활하는 공간에서의 모습, 삼손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더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켈슨 박사 역의 랄프 파인즈는 바로 직전 <콘클라베> 같은 영화로 오스카 후보에 또 올랐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 파괴적인 비주얼을 보여주는데, 그 모습 안에 광기 어린 에너지도 인간성에 대한 깊은 의지도 원없이 보여줍니다. 한편 작년 <씨너스: 죄인들>에서 극의 분위기를 뒤바꿔놓는 신스틸러 악역을 훌륭하게 소화했던 잭 오코넬은 이번 영화에서 지미 크리스탈 경을 연기하며 고삐풀린 악인의 광기를 더욱 더 날선 연기로 보여줍니다. 감염자들보다 더 끔찍한 짓을 저지르는 악인이 분명하지만 이야기에서는 켈슨 박사와 믿음의 두 축을 형성하는 핵심 인물로서, 자신의 믿음을 실행하고 강요하고 그러다가 의심하고 반문하기도 하는 불안한 내면을 입체적으로 그려냅니다. 자신이 머무는 두 세계의 공기를 완전히 다르게 형성해 놓는 두 배우의 대립 구도 덕분에 영화는 아무래도 작은 이야기일 수 밖에 없음에도 그 클라이맥스에 이르기까지의 텐션을 꾸준히 잃지 않고 지켜냅니다.
<28년 후: 뼈의 사원>을 보면서 공교롭게도 최근에 본 어느 영화 속, '기도는 좌절을 인정하는 행위'라고 하던 대사가 떠올랐습니다. 더 이상 스릴 넘치는 엔터테인먼트를 선사할 수 없는 '30년 간의 파국'을 짊어지고 살아온 이들에게, 믿음은 막다른 길에 다다른 이들이 생의 의지가 꺾이지 않기 위해 붙잡는 최후의 지푸라기일지도 모릅니다. 이런 세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는 더 이상 생존을 위한 사투에만 국한될 수 없는, 언제 제자리로 돌아올지 모를 (아니 어쩌면 이게 새로운 제자리일지도 모를) 세계를 살아내기 위한 신념의 전쟁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음을 영화는 상기시킵니다. 그리하여 (익히 알려진 대로) 최초의 이야기 <28일 후>의 주인공인 짐(킬리언 머피)가 마치 필연적인 접점인 것처럼 등장하는 결말은, 찰나의 전투보다 더 크고 깊어진 그 전쟁의 종착지가 어디일 것인지, 그 클라이맥스를 한껏 기대하게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