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적인 영화리뷰 2026 - <호퍼스>
픽사의 새 애니메이션 <호퍼스>를 보았습니다. 6월에는 또 <토이 스토리 5> 개봉을 앞두고 있는 픽사인데, 이례적으로 3개월 간격으로 나오는 픽사 신작이라 픽사 팬으로서 무척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 그만큼 만족스러운 영화가 나올까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호퍼스>는 그만큼 만족스러운 영화입니다. <토이 스토리 2>부터 어른들을 울리는 감동을 주는 스튜디오로 자리매김하기 전, 픽사는 장난감들의 세계나 곤충들의 세계 등 기발한 상상력을 독특한 에너지로 구현하길 잘 하는 곳이었는데 <호퍼스>는 오랜만에 그런 독특한 에너지를 유감없이 발산하는 영화로 나타났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픽사의 많은 명작들만큼 감동을 받게 될 거라 단언하긴 힘들지만, 그만큼의 강렬한 인상을 받게 될 것은 거의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을텐데 그만큼 <호퍼스>는 픽사의 지난 영화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또렷한 개성으로 관객을 녹아내리게 합니다.
19세 소녀 메이블(파이퍼 커다)은 어린 시절 자연과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을 유달리 적극적으로 표현하며 학교에서 별난 아이 취급을 곧잘 받아 왔습니다. 그렇게 외톨이 처지에 놓이는 와중에 메이블의 마음을 어루만져준 것을 할머니가 안내해 준 연못. 그 곳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생명의 존재를 느끼다 보면, 그 커다란 세계의 일부임을 느끼며 큰 위안을 얻어왔죠. 하지만 그렇게 위로가 되어 준 연못이 제리 시장(존 햄)이 추진하는 순환고속도로 건설 계획으로 인해 사라질 위기에 처합니다. 메이블은 연못을 지키기 위해 제리 시장과 각을 세우지만 혼자 힘으론 역부족입니다. 그러던 중 학교에서 사람의 의식을 동물 로봇으로 옮기는 '호핑'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다혈질 메이블은 앞뒤 잴 것 없이 그 실험에 자신을 내던지며 '로봇 비버'로 거듭납니다. 연못에 원래 서식하고 있던 비버들을 다시 불러들이면 생태계 보호 명목으로 연못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죠. 그렇게 비버가 된 메이블이 들어선 동물 세계에는 포유류의 왕인 비버 조지(바비 모이나핸), 마시마로같이 생긴 비버 로프, 곰 엘렌, 도마뱀톰 등 다양한 동물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들과 만나며 연못에서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가던 메이블은, 연못을 지키기 위한 작전에 본격적으로 돌입하지만 이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인기 애니메이션 시리즈 [위 베어 베어스]를 만든 대니얼 총 감독이 연출한 <호퍼스>는 근래 나온 픽사 애니메이션 중 유머의 순도가 가장 높은 영화입니다. 주인공은 인간인 메이블이지만 대부분의 분량이 비버로 '호핑'된 상태에서 진행되고 대부분의 배경 역시 비버를 중심으로 한 동물 세계인데, 이 동물 세계는 리얼리티보다는 만화적으로 과장된 터치로 가득 차 있습니다. 조지 왕, 로프 등 비버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걸어다니는 '두쫀쿠' 같이 생겼는데 그들이 표정 짓고 움직이는 모습에서부터 이미 광대가 상승하고 잡아다가 마구 배방구를 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힙니다. 그렇게 쫄깃한 피지컬을 지닌 캐릭터들이 풍부한 표정과 모션을 동반하여 보여주는 슬랩스틱 코미디 역시 타의 추종을 불허하죠. 비단 비버 뿐 아니라 둥그스름한 쉐입이 커다란 만큼의 귀여움을 유발하는 곰 엘렌, 자그마한 모습에서 '맑눈광'의 기운이 느껴지는 도마뱀 톰 등 다른 동물들의 캐릭터 디자인 역시 [위 베어 베어스] 제작자의 연출답게 사랑스러움과 분명한 개성을 겸비했습니다. 영화 중반부 곤충 왕, 조류 왕, 양서류 왕, 어류 왕 등 더 다양한 종으로 확대되면서 동물 캐릭터들은 더욱 치열하게 그 개성을 뽐내기 시작하는데, 이들은 단지 의인화한 것 이상의 역동적인 메커니즘을 구현하며 그 끝에는 '픽사 영화에서 이런 장면을 보게 될 줄이야' 싶을 만큼 광기가 한껏 서려있는 충격적(?) 이미지가 펼쳐지기도 합니다. 영화 속 대사에서도 나오듯 <아바타>를 연상시키는 이야기가 대략 어떻게 흘러가겠거니 하는 예상을 깨고 뜻밖의 방향으로 전개되는 가운데, 그 속에서 나름의 방식들로 한껏 질주하는 동물 캐릭터들의 향연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영화는 오락적으로 충만합니다.
하지만 이런 귀여움과 오락성을 장착하고서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마냥 귀엽지 않습니다. 영화는 자연친화적인 사고관을 지닌 주인공이 파괴 위기에 놓인 생태계와 파괴 주체인 인간을 극적으로 화해시키며 인간과 자연의 공존에 관한 익숙한 메시지를 전할 것만 같지만, 거기서 머물지 않고 그러한 이상을 위해 수반되는 현실적인 고민들과 그 앞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해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집니다. 일례로 주인공 메이블은 관객들의 호불호를 탈 수 있을 정도로 성격이 만만치 않은 인물입니다. 자연을 지키기 위해 갖은 말썽을 부려도 좋고 위험을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는 주의인데, 그런 급진적인 태도의 메이블도 막상 자연의 구성원으로 편입되면서 목격하게 되는 자연의 면면에 적잖이 놀라게 됩니다. 조지 왕이 '연못 법'이라 일컫는 자연의 섭리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데 그 모든 것에는 '자연의 적'으로 인식되게 마련인 인간의 생존권도, 먹이사슬이라는 시스템 위에서 살기 위해 다른 개체를 먹을 수 밖에 없는 포식자의 본능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흔히 이런 가족적 애니메이션이 말하는 인간과 자연의 공존에 관한 메시지가 자연의 섭리를 잠시 지운 유토피아적인 우정의 풍경을 보여줄 것이라는 예상을 벗어나는 <호퍼스> 속 자연의 모습은 풍부한 유머 위에서 전개되긴 하지만 엄연히 자연의 호락호락하지 않은 일면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영화 속 인간과 자연의 갈등은 애니메이션이니까 용인할 수 있는 극단적인 수준으로 치닫는데, 이는 생태계를 파괴하는 행위가 인간 중심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상을 전복시키는 동시에 인간과 자연의 공존에 대한 안일한 인식에 대해 정곡을 찌르는 부분입니다. 메이블이 조지 왕을 비롯한 자연의 구성원들과 교감하며 자신이 일방적으로 부르짖던 자연보호의 메시지 너머 그동안 간과했던 자연의 다채로운 모습을 발견하고 의식이 성장해 나가는 과정은, 공존을 부르짖는 그 모든 행위 역시 철저히 인간 관점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닌지 묻는 듯 합니다. 그런 일방적인 메시지를 외치기 전에 인간과 자연은 서로에게 얼만큼 귀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는지, 아니 이 영화 속 조지 왕이 그러하듯 자연은 언제고 준비가 되어 있을테니 인간은 얼만큼 준비가 되어 있을지 생각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메이블이 할머니로부터 터득한 '자연 속 나의 존재 깨닫기'처럼, 우리의 가치는 자연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로서 살아갈 때 비로소 빛난다는 것을 영화는 재치 넘치는 시선과 따뜻한 손길로 그려냅니다.
많은 픽사 애니메이션들은 우리들 각자의 개인적인 역사를 건드리며 큰 감동을 주곤 했는데, <호퍼스>는 개인보다 사회, 나아가 생태계를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 그 감흥의 결이 좀 다르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호퍼스>가 여느 픽사의 명작만큼 큰 감동을 줄지 묻는다면 아니라고 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꾸만 손이 가는 사랑스러운 캐릭터들을 가지고 따뜻한 공존과 교감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한편, 국경과 종을 초월한 증오와 분노와 폭력으로 얼룩진 이 시대에 유독 시의성 있게 다가오는 이 이야기를 예상보다 더 '돌아있는' 이미지들의 향연으로 임팩트 있게 그려내기까지 하다니요. 그것도 다른 곳도 아닌 픽사가 말이죠. 그렇게 여전히 특별한 픽사의 역량을 입증하는 경우로서, <호퍼스>는 픽사의 다른 명작들과 그 강렬함만큼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영화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