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꾸는 순간 이미 빛난다

<라라랜드> - 데미언 차젤

by 김진만
aea72afb2b5620d8e51d62b7c1e5e87d210f06dd.jpg <라라랜드>(La La Land, 2016)

발길 닿고 눈길 닿는 모든 곳에 미디어가 존재하게 된 이 시대에 전통적 미디어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존재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분투 중이다. TV 드라마를 왜 다시보기가 아닌 본방송으로 봐야 하는지, 음악을 왜 MP3로 다운로드만 하지 않고 CD로 소장해야 하는지, 그리고 영화를 왜 집에서 VOD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극장까지 걸음하여 봐야 하는지 말이다. 사람들이 다양한 형태로 미디어를 손에 넣고 향유할 수 있게 되면서 전통적 미디어들에게 타격이 온다는 것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사실이지만, 그런 거스를 수 없는 흐름 속에서도 전통적 미디어의 가치는 초연하게 빛난다. 극장에서 봐야만 하는 영화를 만드는 데에 더 집중하는 영화인들과 거기에 부응하여 극장에서 n차 관람을 이어가는 관객들의 모습처럼 말이다.

지금의 영화는 단지 2시간 남짓 되는 시간 안에 드라마틱한 이야기만을 집어넣는 데서 만족하지 않고, 자신이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영화'임을 입증하기 위한 여러 가지 노력으로 오히려 풍성해지고 있다. 그러니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를 접할 수 있는 경로가 어느 때보다 많아진 지금, 영화라는 예술이 왜 존재하는지를 가장 실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눈부신 사례가 또 하나 나왔으니, <위플래쉬>로 전세계 중 특히 한국 관객들의 가슴을 흠씬 두들겼던 데미언 차젤 감독의 신작 <라라랜드>가 그것이다. 육두문자를 연사하며 악에 받친 듯 달려들었던 전작과 완전히 상반된 모습의 영화지만, 감각은 더 풍성해졌고 마음은 더 깊어졌다. 영화라는 예술의 진가를 오만가지 감각으로 찬란하게 재현하지만, 이 영화가 찬란한 진짜 이유는 예술만 우러르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매개로 꿈꾸는 이를 우러르기 때문이다. 누구나 품고 있는 꿈이 이 영화를 통해 위대해진다.


cd51a5b03327fbcd9f6e11b29bb1bda5d6308cc0.jpg <라라랜드>(La La Land, 2016)


'LA'를 그대로 발음하여 '라라랜드'라고도 불리는, 꿈과 기회의 땅 할리우드를 살아가는 두 사람 미아(엠마 스톤)와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이 있다. 미아는 배우를 꿈꾸며 워너브라더스 스튜디오 내 카페 바리스타 일과 오디션을 병행 중이며, 세바스찬은 재즈에 대한 순수한 열정으로 선망해 왔던 재즈 클럽을 지금의 '삼바 타파스' 가게 간판을 떼어내고 진짜 재즈 클럽으로 인수하리라는 꿈을 품고 있다. 썩 유쾌하지 않은 인연으로 만난 두 사람은 이내 각자가 품고 있는 꿈을 향한 진정성에 매료되어 사랑에 빠지고, 서로의 꿈을 위해 응원하는 동시의 자신들의 꿈을 일구어 나간다. 그러나 사랑한다고 해서 꿈에 대한 태도 또한 같을 수는 없다. 오디션에서 줄곧 탈락하던 처지에서 벗어나 자작 희곡으로 자신의 캐릭터를 직접 만들어가는 미아와, 생계를 위해 동료 키이스(존 레전드)의 상업 재즈 밴드 단원으로 들어간 세바스찬은 꿈과 현실에 대한 사뭇 다른 태도로 갈등을 빚기 시작한다. 그들에겐 사랑도 물론 중요한 것이었지만, 그들의 심장을 박동하게 하는 것이 사랑만은 아니라는 것 또한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라랜드>는 기본적으로 뮤지컬 영화다. 노래와 춤을 동반한 음악이 이야기 위에 수놓아지는 형식인 것이다. 대부분 무대에 먼저 올려진 바 있는 뮤지컬을 스크린에 옮기게 마련인 뮤지컬 영화는 스크린으로 보는 뮤지컬이거나, 노래를 얹은 영화이거나 하는 식으로 뮤지컬 또는 영화 둘 중 한 측면에 방점을 찍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원작 콘텐츠가 없는 오리지널 스토리와 넘버들로 이루어진 <라라랜드>는 뮤지컬로서의 가치와 영화로서의 가치를 동시에 훌륭하게 충족시킨다. 먼저 뮤지컬로서 이 영화가 입증하는 진가는 생동감이다. 음악이 시작된 순간 NG나 암전 없이 완벽하게 퍼포먼스를 마쳐야 하는 뮤지컬의 한 장면처럼, <라라랜드> 속 뮤지컬 장면들은 대부분 컷이 없는 롱테이크로 이루어진다. 뮤지컬 공연을 볼 때 느끼는 가장 큰 쾌감 중 하나인, 짧지 않은 시간동안 배우들의 노래와 안무가 흐트러짐 없이 일사불란하게 구사되는 치밀함이 영화를 통해서도 온전히 구현된다. 영화 매체의 이점이기도 한 편집의 힘에 기대지 않은, 하나의 무대를 연출하기 위해 들어간 치열한 땀과 섬세한 노력이 고스란히 묻어나며 장면장면 몰입감을 극대화시킨다.


785d67d4ba267124ed594c7b1b2d19632f25ff29.jpg <라라랜드>(La La Land, 2016)


그런 한편 <라라랜드>는 이 작품이 어째서 '뮤지컬'이 아닌 '뮤지컬 영화'여야 하는지를 훌륭하게 증명하기도 한다. (뮤지컬에게는 좀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바로 영화이기에 가능한 공간의 스펙터클을 구현함으로써 말이다. 차들로 꽉 막힌 도로 위에서 펼쳐지는 영화의 첫 장면이자 첫 뮤지컬 시퀀스 장면부터 이를 증명한다. 차 한 대 한 대에 탄 운전자들을 비추다가 트레일러 안으로, 결국은 도로를 가득 메운 자동차들 전체로 시야가 넓어지며 규모를 키워가는 퍼포먼스는 공간과 인원의 제약을 두지 않는 영화이기에 가능한 장면들이다. 이후에 등장하는 뮤지컬 시퀀스들도 마찬가지다. 미아의 집에서 출발해 거리로 나아가 열띤 파티 장소 속 수영장 수면 위에서 마무리되는 장면, 그리고 영화의 화룡점정이라 해도 좋을 만큼 시공을 재창조하다시피 하며 시각적 상상력을 극대화시킨 마지막 뮤지컬 시퀀스까지. <라라랜드>는 단지 뮤지컬 무대 위의 장면을 스크린으로 옮기는 데서 만족하지 않고 영화만의 환경적, 크리에이티브적 강점에 뮤지컬적 요소를 완벽하게 적용시킨다.

한편 <라라랜드>는 사람과 삶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뮤지컬 영화로서의 엔터테인먼트적 측면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캐릭터의 당위성이나 이야기의 개연성이 어느 정도 무시되는 식의 편의는 이 영화에 없다. 음악과 무대가 전하는 감흥의 넓이와 깊이가 인물과 이야기에도 그대로 전이되는 것이다. 감독은 전작 <위플래쉬>에서 폭발적인 에너지의 재즈 밴드 연주, 드럼 연주 퍼포먼스를 통해 자신의 꿈에 집착하고 타인의 꿈에 도전하는 인물들의 요동치는 내면을 훌륭히 담아내며 이를 성공적으로 구현한 바 있다. <라라랜드> 역시 화려함과 깊이를 겸비하며 보는 이의 눈과 귀를 자극하는 뮤지컬 퍼포먼스 너머로 그 순간에 흠뻑 빠져들어 꿈을 꾸는 자의 특권을 마음껏 누리는 남녀의 진심을 투영한다. 뮤지컬 퍼포먼스들을 드라마틱하게 이어붙이는 가운데서도 그 중심에 선 인물들이 자신의 꿈과 현실 앞에서 겪는 내외적 갈등이 섬세하게 매만진다. 그리고 이를 통해 영화가 지닌 가장 빛나는 점이 드러난다. 예술과 예술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진심 어린 애정을 그 애정만큼 두터운 솜씨로 완전하게 표현해 내는 것이다.


3a16a1a0350a51543186b47be84b4ea983b75fdb.jpg <라라랜드>(La La Land, 2016)


<라라랜드>는 뮤지컬 영화이나 노래만이 주인공은 아니다. 솔로 피아노 연주, 2인조 탭댄스, 즉흥성으로 가득한 재즈 밴드 음악까지. 음악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퍼포먼스에 고루 방점을 찍으며 우리를 감동시키는 음악이 얼마나 다양한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새삼 실감하게 한다. 자신들이 꾸는 꿈 속에서 다양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두 남녀를 별빛 속으로, 그림 속으로 데려가는 연출에서는 영화라는 대중예술의 다양한 표현 방식에 대한 애정 어린 헌사가 느껴지기도 한다. 이렇듯 영화가 다채로운 솜씨로 표현하는 음악과 영화에 대한 깊은 애정은 곧 그러한 예술을 통해 꿈을 꾸고 꿈을 이루어가는 이들에 대한 애정으로 연결된다. 남녀의 러브스토리를 기본 틀로 하고 있지만, 예술에 대한 꿈을 꾸는 이를 바라보는 영화의 시선은 달콤한 사랑 이야기로의 적당한 타협 같은 걸 찾아볼 수 없다. 생각했던 것보다 쓰고 가슴 아프며 절실한 구석이 많다. 그러나 그래서 영화가 더 찬란하게 빛나기도 한다.

<라라랜드>가 그리는 사랑 이야기는 그냥 남녀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꿈꾸는 남녀'의 사랑이야기다. 그들에게 사랑은 물론 소중하지만 사랑이 전부는 아니다. 사랑보다 훨씬 이전에 각자의 꿈이 자리하고 있었고, 사랑이 시작되었다고 해서 그 꿈의 자리를 쉬이 양보할 순 없다. 그러므로 영화에서는 두 사람의 사랑이 어떻게 흘러가는가 하는 것 못지 않게 두 사람의 꿈이 이뤄질 것인가 하는 것도 중요하게 다뤄진다. 카페에 들어서면 누구라도 돌아보고 계산하려 하자 주인이 알아서 우리가 부담하겠다고 하는 최고의 배우가 되기를 꿈꾸는 미아와 선망의 대상인 재즈 클럽에 날마다 출근 도장을 찍으며 인수의 의지를 가다듬는 세바스찬의 꿈은 그 무게도 묵직하고, 그 꿈을 위해 들이는 노력 또한 열렬하다. 다만 오래 꿈꿔 온 만큼 현실이 녹록하지 않다는 것 또한 매우 잘 알고 있다. 성공을 보장하는 길은 나에게 진실되지 못하고, 반면 나에게 진실되는 길은 성공을 보장하지 못한다.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꿈을 이루는 순간의 환희보다는 꿈을 꾸는 과정의 어려움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지만 그에 부응하는 성공을 보장할 수 없기에 실패하는 순간 오히려 큰 좌절을 부르고 마는, 어쩌면 도박과도 같은 것이 꿈일지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영화는 무척 달콤하고 낭만적이기도 하지만, 꿈을 꾼다는 것이 우리에게 숙명적으로 가져다주는 아픔에 대한 묘사도 가차없다.


00086ea3716362629d39d02bc82c03b0455d5120.jpg <라라랜드>(La La Land, 2016)


그러나 <라라랜드>가 말하는 '꿈꾸는 것'의 의미는 결국 행복이자 특권이며 축복이다. '아프니까 청춘' 같은 식의 고통 합리화가 아니다. 꿈꾸는 과정에서 부딪치는 숱한 난관 사이사이에 모습을 드러내는, 꿈꾸는 순간을 만끽할 때의 행복이 바로 '꿈꾸는 것' 자체의 가치를 온몸으로 입증한다. 꿈이 이루어질지 말지는 이미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스크린에서 만나는 것은 자신이 이 꿈을 놓을 수 없는 이유를 다시금 체감하며 꿈꾸는 순간에 그저 몸을 맡기는 남녀의 환희이다. 별빛처럼, 그림처럼, 우주처럼 그들을 휘감는 꿈의 광휘는 이루어졌는지 여부를 떠나 이미 꾸는 순간만으로 찬란하게 빛난다. 때로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사람으로 보일지라도, 꽉 막힌 외곬로 보일지라도 꿈꾸는 자들 각자에게 빛나는 세계가 마련되어 있음을 영화는 아름다운 연출로 형상화한다. '꿈을 이룬다는 것'을 칭송하는 영화는 많았지만, '꿈을 꾼다는 것'을 칭송하는 영화는 많지 않다. 그러나 우리들 대다수는 꿈을 이룬다는 걸 장담하지 못한 채 꿈을 꾸지 않던가. 꿈을 꾸는 단계에서 더디고 느린 걸음을 이어가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라라랜드>는 그 더디고 느린 걸음이 남기는 발자취 자체가 이미 이토록 아름다움을 절실하게 보여준다. 자신이 주인공인 모노드라마를 쓰는 미아에게도, 유행에 뒤처지는 정통 재즈 클럽의 사장님을 꿈꾸는 세바스찬에게도, 영화는 그들의 성공 여부를 떠나 이미 지금의 모습에 광채를 불어넣는다. 꿈은 이루어지기 전에, 이미 꾸는 것만으로도 그 존재가 인정받아야 함을 이야기한다.

감독의 전작 <위플래쉬>와 연결하면 <라라랜드>로 이어지는 감독의 목소리가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온다. 똑같이 음악에 대해, 꿈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였지만 <위플래쉬>는 <라라랜드>와 극명하게 다른 태도를 보이는 영화였다. 그런데 새삼 생각해 보면 두 영화는 부분과 전체로서 이어질 수도 있다. <위플래쉬>가 거의 자기파괴적인 수준으로까지 꿈을 꾸는 어떤 이의 단면에 대한 영화였다면, <라라랜드>는 꿈을 향해 나아가며 때론 미끄러지기도 하고 때론 발돋움하기도 하는 보다 보편적인 '꿈꾸는 이'에 대한 영화인 셈이다. 아마도 감독 본인이 영화 속 인물들처럼 (특히 음악과 관련된) 꿈을 향해 나아가다 좌절한 적이 있기라도 한듯, 줄곧 예술을 꿈꾸는 이들의 이야기를 그려왔다. 그리고 <라라랜드>를 보고 나니, 꿈에 지배되어 가는 어떤 이를 경계하듯 바라보는 영화로 읽혔던 <위플래쉬>마저 다시 읽히기 시작했다. 이 영화는 어쩌면 그저 이렇게 유별나고 무시무시할지라도 그 역시 '꿈꾸는 이'로서 그저 지켜봤던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 이른바 '또라이'로 취급받을 만큼 격렬하게 꿈을 향해 나아가는 이들도 있지만, 감독은 그렇다 한들 그들 각자에게도 자신들의 꿈으로 이루어진 고유의 세계가 있음을 존중해 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라라랜드>에서 바로 그 꿈꾸는 이들에 대한 존중, 나아가 그들을 향한 경의를 담은 마음을 직접적으로 표출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74a61bcd86c60a4524441257922eb0675d111742.jpg <라라랜드>(La La Land, 2016)


예술을 꿈꾸는 이들을 연기한다는 것이 큰 행복이라는 걸 자각이라도 한듯, 배우들의 연기는 생생하고 활기 넘치기 이를 데 없다. 꿈꾸는 보통의 젊은이가 지닌 현실적인 열정과 피로감, 그리고 꿈 앞에서 무릎꿇는 순간의 좌절감까지 미아의 끼와 심리를 깊고 풍성하게 표현해내는 엠마 스톤의 연기는 가히 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자로 합당하며, 내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유력 후보로 손색이 없다. 후반부 마치 토로하듯 노래하는 'Here's to the Fools Who Dream' 넘버 장면은 그녀를 각종 연기상 유력 후보로 이끌 '킬링 파트'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고전적 재즈 사운드를 몸에 두른 것처럼 멋드러지는 수트와 절제된 여유를 과시하는 라이언 고슬링의 클래식 영화 속 주인공 같은 연기도 매우 인상적이다. 노래는 물론 수준급의 피아노 연주와 탭댄스 실력까지 과시하며 영화가 지닌 멋의 상당 부분을 훌륭히 구현함과 동시에, 엠마 스톤과 함께 '오래된 꿈'을 추구하는 젊은이의 초상을 현실적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세바스찬의 동료 키이스로 출연하는, 뮤지션으로 더 유명한 존 레전드와 <위플래쉬>의 플레처 교수의 대사를 기가 막히게 인용하는 J.K. 시몬스의 존재감도 빼놓을 수 없다.

<라라랜드>는 예술에 대한 애정과 이해, 창의와 기술이 합일할 때 어떤 결과물이 나오는지를 증명하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사례이다. 음악과 영화 예술에 대한 절절한 애정에 걸맞는 이해를 갖추었고, 그 호소력을 극대화시킬 만한 창의력과 기술력까지 겸비한 창작자의 결실을 싱싱하게 마주한다는 것은 차라리 축복에 가깝다. 영화도 인정하듯 꿈을 꾸는 것은 당연히 힘들고 때로 무섭기도 하지만, 데미언 차젤 감독은 그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치열하고 절실한 꿈이 어떤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지를 이 영화로 직접 입증했다. 이런 결과물이 나온다는데, 꿈꾸는 이들에게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존재는 위정자들일지 몰라도, 그 세상 위에 꽃을 피우는 존재는 꿈을 꾸며 뚜벅뚜벅 걷는 이들임을 <라라랜드>는 가슴 벅차게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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