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라는 공기, 삶이라는 우주

<컨택트> - 드니 빌뇌브 감독

by 김진만
9b4aaf0de1480955194a6603e64bc95c96fa5177.jpg <컨택트>(Arrival, 2016)

[스포일러 있습니다]


은어 중에 '문송합니다'라는 말이 있다. '문과라서 죄송합니다'의 약어인 이 말은 이과 전공자는 돼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법한 수학적, 과학적 지식들 앞에서 위축되는 문과 전공자의 마음을 대변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요즘 같이 취업 시장이 가문 상황에서 더욱 씁쓸하게 와 닿는 말이기도 하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관용구처럼 돌아다니기도 했듯이, 어학, 철학, 사학, 미학 같은 인문학적 지식을 공부하는 것은 어느덧 '필요하지 않은 행위'가 되었다. 취직을 잘 하고 높은 연봉을 받으려면 거기에 걸맞은 지식을 배워야 한다는 주의가 보편화되었고, 그런 주의에서 인문학은 자연스레 변방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물론 이는 역시 문과 전공자인 나의 입장에서 느낀 괜한 자격지심일 수도 있다.) 할리우드로부터 넓고 깊은 지식의 양을 자랑하는 SF영화들이 도착했을 때에도 문과 전공자로서 느끼는 희열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멋있어 보인다는 느낌이 아무래도 컸달까.

그러나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지식과 뒤로 한 발짝 머물러 있는 지식이 어찌 칼같이 구분될 수 있으랴. 인문, 사회, 자연 등 다양한 분야의 학문들이 서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보조를 맞추면서 세계를 더욱 풍부하게 만드는 것이다. 할리우드도 그 사실을 내심 알고 있어서인지, SF 장르임에도 인문학적 지식에 뿌리를 둔 영화가 드디어 나왔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시대가 지향하는 학문의 이상적인 추구와 활용법의 하나, 즉 서로 통하고 간섭하는 이른바 '통섭'의 좋은 예일지도 모르겠다. 테드 창의 SF 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컨택트>는 이처럼 경계 지을 수 없는 학문의 지평을 이야기함과 동시에, 그렇게 경계를 허무는 학문의 힘이 우리의 생각과 삶에까지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매우 부드럽고 조심스러우면서도 강력하게 이야기한다. 원제인 'Arrival'(도착)에서 동명의 할리우드 영화와 헛갈리게 만드는 '컨택트'(Contact, 접촉)라는 제목으로 바뀌었지만 지식과 지식의 연결, 개인의 삶과 거대한 세계의 연결을 말하는 영화라는 점에서 아주 엉뚱하게 바뀐 제목은 아닌 셈이다.


bbfd295b1f749339a01160b23a0fcb7dd43e58f3.jpg <컨택트>(Arrival, 2016)


어느날 예고도 없이 외계에서 온 미확인 비행물체가 전세계 12지점에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난다. 콘택트렌즈를 세로로 세워놓은 것 같은 기묘한 모양새를 한 이 비행물체는 지상에서 수 미터 떨어진 높이에 붕 떠있는 것 외에는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다.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가 불안에 휩싸인 가운데, 그들의 비밀을 풀기 위한 정예 팀이 구성되고 그 일원으로 저명한 언어학자인 루이스 뱅크스(에이미 아담스)가 합류한다. 비행물체로부터 마치 어떤 신호, 부호를 연상케 하는 의문의 소리들이 지속적으로 전달되었고, 정예 팀은 이를 언어학적으로 해석하여 그 외계의 존재들이 지구에 온 목적이 무엇인지를 밝혀 내고자 한 것이다. 루이스를 비롯해 이론 물리학자로 학문적으로는 루이스와 대척점에 서 있는 이안 도널리(제레미 레너) 등 정예 팀원들은 조심스럽게 비행물체 안으로 진입하고, 그 안에서 뜻밖에도 외계 생명체와 그들의 언어를 만나게 된다. 여지껏 본 적 없는 그들의 언어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정예 팀은 그들과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하게 되고, 그들이 지구에 온 이유에 대한 실마리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를 전세계적인 스타덤에 올려놓은 <그을린 사랑>에서부터 살펴보면, 드니 빌뇌브 감독은 자신의 영화를 통해 '경계의 붕괴'에 대해 지속적으로 이야기해 왔다. 가해자와 피해자, 선과 악, 순수와 부패, 빛과 어둠 등 대립되는 포지션이나 가치관들이 현실 세계에서는 우리 머릿속에 정의되는 것처럼 그렇게 또렷하게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이야기해 왔고, 그래서 그의 영화들은 늘 충격을 주면서도 마음을 깊이 건드렸다. 그랬던 그의 전작들보다 <컨택트>의 시야는 좀 더 넓게 뻗어나간다. 개인 또는 국가와 같이 인간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중심에 세웠던 전작들과 달리, <컨택트>는 인간에만 한정되지 않은 세계관으로의 확장을 꾀하면서 인간이 일구는 삶, 국가가 이룩한 역사를 아우르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인간이 인간의 형태를 갖추기 전에, 국가라는 공동체가 생겨나기 전부터 존재했을 것에 대한 질문이다. '어떻게 소통하고, 어떻게 살면서, 어떤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가'가 바로 그 질문이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탐구의 수단으로 '언어'를 활용하는데, 영상화하기에 쉽지 않은 구조의 내러티브를 지녔음에도 이것을 영상으로 옮기는 솜씨가 탄복하고도 남을 정도다. 언어가 사람이 말하는 방법을 넘어, 생각하고 살아가는 방식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과정을 영화가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라는 의심 섞인 물음에 대해 <컨택트>는 너끈히 '그렇다'고 답한다.


57a3938d666254554ba78526b7240694c9aa9e7a.jpg <컨택트>(Arrival, 2016)


그러나 관객을 상대하는 영화라면 이런 쉽지 않은 화두에 이르기 전 관객의 호기심을 충분히 자극할 만한 포문을 열어야 한다. <그을린 사랑>의 '잃어버린 가족 찾기', <프리즈너스>의 '실종된 아이 찾기',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의 '범죄의 도시로 잠입하기'에 이어 드니 빌뇌브 감독이 <컨택트>에서 관객을 이끄는 나름의 '떡밥'으로 활용하는 것이 바로 '외계 비행물체에 대한 접근'이다. 시작부터 관객보다 먼저 흥분하는 적이 없는 드니 빌뇌브의 영화답게, <컨택트> 초반 루이스와 이안을 필두로 한 비행물체 탐사 팀이 비행물체로 접근하여 진입하는 과정 역시 비행물체의 겉모습처럼 결코 요란하지 않지만 차분하게 끊김 없이 관객의 이목을 끌어들이는 흡인력을 자랑한다. 지금껏 숱한 영화들에서 봐 온 그 어떤 외계 비행물체와도 다르게 생긴, 현대 건축물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비행물체의 내부는 진입하는 과정에서 중력이 바뀌는 순간부터 마침내 저 너머 외계 생명체가 있을 반투명 장벽과 대면하는 순간까지. 요란한 수식 한번 없이 미지의 공간으로 떠나는 탐사의 분위기를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전달하며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최초의 '떡밥'으로 관객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데 성공한 영화는 이제 이야기의 더 깊숙한 곳으로 관객을 끌어들인다. 외계 생명체와의 의사소통, 그리고 그 의사소통에 사용되는 언어의 정체에 주목하는 것이다. 서로 말을 주고 받기도 전에 무력부터 오가거나, 외계 생명체에게 우리 인간들의 말을 가르쳐 주는 데 집중하던 기존 외계인 영화의 전개와 달리, <컨택트>의 등장인물들은 외계 생명체들의 언어를 해석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물론 인간이 사용하는 단어를 그들에게 가르쳐주기도 하지만, 그런 인간 중심 단어들도 외계 생명체들이 사용하는 전대미문의 단어에 따라 얼마든지 재해석, 재정의될 여지가 있는 것이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나 문자는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워 왔던 언어나 문자의 종류, 이를테면 표음문자(소리를 시각적으로 표기하는 문자)나 표의문자(의미를 시각적으로 표기하는 문자)와 같이 인간이 연구한 갈래로 쉽게 정의될 수 없는 언어다. 언어학이라는 인문적 지식을 기반으로 하지만 그 지식 위에 두텁고 복잡하게 축적된 인간 언어의 역사에 의존하지 않고, 마치 암호를 풀듯이 언어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에 주로 의지한 채 외계 언어를 받아들이는 과정은, 이과적 지식을 중심으로 과제를 해결해 나가던 다수의 SF 영화들과는 또 다른 차원의 지적 쾌감을 안긴다.


7d1d24ce04b95fdbf9e66e50732243081eb55bc6.jpg <컨택트>(Arrival, 2016)


이야기에 근본 없는 회오리는 일으키는 법이 없는 드니 빌뇌브 감독은 이렇게 영화가 이야기를 풀어놓으려 하는 세계에 관객들을 안정적으로 진입시킨 후, 본격적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을 꺼내놓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영화가 천재적인 것은, 감독이 전하려는 이 '본격적인 이야기' 역시 어디서 불쑥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영화의 시작부터 끊임없이 전조를 내비쳐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전조들을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처음부터 만날 때 관객들은 그저 생각보다 선형적이지 않은 이야기와 마주하는 데서 오는 혼란을 느낀다. 그런데 이후 영화가 단계별로 전하는 언어관과 세계관을 관객들이 수용하게 되면서 관객은 앞서 느꼈던 그 비선형적 이야기의 구조가 관객을 '혼란을 위한 혼란'으로 빠뜨리기 위한 얕은 트릭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외계 생명체들의 생소한 언어가 정의하는 사고관과 세계관처럼, 이 영화 자체가 이야기와 삶과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 처음부터 축조한 고유의 구조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마련이라는 말처럼, 원래부터 있었는데 근거로 삼을 지식이 없어 안보였던 것이 이제는 보이고 돌이켜 생각하면 비로소 깨닫게 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문학에서 문자가 이야기를 전하는 '언어'이듯, 영화에서는 영상이 이야기를 전하는 언어라는 걸 감안하면 <컨택트>가 이처럼 영상으로 이야기를 축조하는 방식은 '언어가 생각을, 삶을, 세계를 재정의한다'는 영화의 화두와 정확히 통하는 주도면밀한 기술이라 할 만하다. 외계 생명체의 언어를 연구하며 그 본질에 근접해 가는 루이즈의 모습과 그녀의 삶 다른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딸과의 관계가 중첩되는 과정에서, 전대미문의 구조를 지닌 언어가 인간이 영고의 세월동안 의지해 온 언어의 메커니즘을 뒤흔들며 그 기존의 언어가 정의했던 생각하는 방식, 삶과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는 과정은 그 자체로도 신선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나 <컨택트>를 이 신선한 메시지를 일방적으로 전하는 걸 넘어서, 영화 자체가 지닌 구조적 특성을 통해 그 메시지를 체감하게 한다는 점에서 놀라운 영화다. 논리적으로 따지면 이게 어떻게 말이 되냐고 따질 구석이 숱하게 나올 수도 있을 영화의 이 대담한 가설은, 가설을 전하는 동시에 영화 내적으로 구축하고 실현하는 이 구조적 특성 덕분에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마라'고 치부하기 이전에 '정말 그럴지도 몰라'라며 몸을 앞으로 기울이게 하는 파급력을 발휘한다. <컨택트>는 언어에 대한 이야기를 '언어로서의 영화'로 설득력 있게 전하며,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의 일치를 훌륭하게 보여준다.


e994011b490ef254522300ca4200f24aa014a1ed.jpg <컨택트>(Arrival, 2016)


아는 만큼 보여주는 이 지적인 영화 속에서 배우들이 보여주는 연기 또한 깊고 진중하다. 이는 물론 배우의 역량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마주하게 되는 뜻밖의 진실 앞에서 강렬한 혼란을 느끼며 그 속에서 나약하게 무릎 꿇거나 강인하게 일어서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는 데 능했던 드니 빌뇌브 감독의 역량 덕분이기도 하다. 지난 영화들에서 휴 잭맨, 제이크 질렌할, 에밀리 블런트 등이 그 효과를 톡톡히 보았는데, 이번 <컨택트>에서는 주인공 루이스 역의 에이미 아담스가 그 주인공이다. 바깥으로 넘쳐 흐르는 대신 안으로 끊임없이 파고들며 깊이를 만드는 그의 연기 스타일은 루이스의 지적인 캐릭터와 어우러져 품격 있는 결과물을 만들었다. 전에 본 적 없는 세계에 대한 강렬한 학문적 욕구, 그리고 개인으로서의 삶에 흐르고 있는 그리움과 비애의 정서를 모두 놓치지 않고 강인하게 그려내는 솜씨가 탁월하다. 에이미 아담스가 이 영화로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지 못한 것은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가장 아쉬운 점 중 하나가 될 것이다. 한편 루이스와 학문적으로 대립하지만 그의 사려 깊은 연구 파트너가 되어주는 이안 역의 제레미 레너,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접촉의 파장 속에서 혼란을 느끼는 웨버 대령 역의 포레스트 휘태커가 긴장감 어린 영화 속 세계를 든든하게 받쳐준다.

<컨택트>에서 개인의 삶과 공동체의 역사, 내면의 번민과 우주의 흐름의 경계는 무너진다. 외계와의 조우를 다룬 SF 영화가 어떻게 이렇게 개인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될 수 있는가 라는 의심은 이처럼 무너지는 학문과 사고의 경계 위에서 어느덧 수긍할 만한 가설과 만난다. 언어가 나의 삶에 대한, 내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시선을 바꾸게 되는 과정을 목도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의 생각과 삶에 무엇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은 어느새 무의미해진다. 전작들에서 개인의 심리와 그 개인들이 모여 사는 현대 사회, 그 사회들이 써 내려간 현대사를 배경으로 드니 빌뇌브가 이야기했던 '인간의 내면과 세계의 연결'이라는 화두는 <컨택트>에 이르러 그 시야를 범우주적으로 확장한다. 내 입 손에서 나오는 언어가 내가 사는 세계를 둘러싸는 공기가 되고, 그 공기 안에서 이어지는 나의 삶이 우주와 맞닿는 전대미문의 경험과 만난다. 자고로 '온 우주의 기운' 운운하려면 이 정도의 이야기는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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