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들의 피눈물이 꽃으로 피어난 그 길

관람직후 리뷰 - <눈길>

by 김진만
92227f7015e4ece1964cc612d48fe608fd16ad71.jpg <눈길>(Snowy Road, 2015)


일본군 '위안부'를 소재로 하여 KBS에서 재작년 3.1절 특집극으로 방영된 드라마를
극장판으로 재편집한 영화 <눈길>을 보았습니다.
지상파 TV 드라마라는 최초 제작 단계의 형식적, 매체적 제약이 오히려
영화의 이야기를 풍부하게 하고 완성도를 단단하게 만들어준 것 같습니다.
자극적이거나 강압적인 감정 없이, 눈길이 밟히듯 지그시 보는 이의 마음에 스며들어옵니다.

우선 <눈길>은 최초에 TV 드라마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금세 잊을 만큼
빼어난 영상미와 솜씨 있는 촬영, 우아한 음악이 어우러졌습니다.
소녀들이 살던 고향의 따뜻한 풍경, '위안소'의 척박하고 어두운 공기,
소녀들의 한과 그리움이 쌓여 만들어진 듯한 하얀 눈밭과 푸른 하늘의 풍경까지.
영화는 그다지 넉넉치 않았을 제작 환경 속에서 우수한 시청각적 완성도를 구현해 냈습니다.

다음으로 <눈길>은 널리 알려야 함이 분명하지만 다루기에 민감할 수 밖에 없는 소재에
조심스럽게 접근하면서 인물과 상황을 다채롭게 설정하면서 이야기의 결을 풍성하게 합니다.
보기에 마음이 편할 수가 없는 이야기이면서도 불편한 대신 애틋하고 절절하게 다가오는 것은,
이 영화가 '위안부'라는 소재에 접근하는 시선의 형태 덕분입니다.
영화의 시선은 갖은 만행을 저지른 일본에 대한 고발보다 갖은 비극을 겪은 소녀들에 맞춰져 있습니다.
자극적인 묘사로 일본이 얼마나 나쁜 짓을 저질렀는지 보여주며 공분을 유발하는 대신,
크나큰 비극 앞에서 겪는 소녀들의 감정적 동요와 유대,
그것을 극복하며 강인해지는 과정에 집중하는 겁니다.


1786d2cf173670d3a573db6bb2ea66e0296b7e9f.jpg <눈길>(Snowy Road, 2015)


'위안소'로 끌려가기 전 소녀들의 소박했지만 행복했던 삶,
아이들이 사라진 집 안에서 '밥 먹자!'며 아이들을 부르짖는 어머니의 모습,
끽끽거리는 철문 소리가 반복되며 좁은 방 안을 드나드는 일본군들의 발걸음,
무언가를 세기라도 하는 듯 방 안 바구니에 쌓여가는 종잇장들,
당장에 할 수 있는 건 정신을 부여잡고 방 안을 닦는 것 뿐인 소녀들의 모습,
소녀들이 빤히 서 있는 곳 한복판에서 무심한 총성과 함께 스러져가는 목숨.
'위안소' 안 참상이 밖으로 알려지지 못하도록 일본군이 취했던 비인간적인 조치와 거짓 사진까지.
이런 장면들만으로도 당시의 참상이 얼마나 뼈아팠는지가 능히 설명됩니다.
그리고 이런 장면들 너머 영화는 아프고 좌절하나 끝내 무너지지 않는 소녀들의 표정에 주목합니다.

굳이 피투성이 상처를 눈 앞에 보여주지 않고 그저 이 악문 표정만으로도
상처의 고통이 능히 짐작되듯, 영화는 혼란스러운 현실 속에서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소녀들의 표정에서 그녀들에게 주어진 가혹한 시대의 상처를 읽어냅니다.
어떻게든 가족에게 돌아가려 희망을 놓지 않는 소녀와 믿기 힘든 현실에 무릎 꿇으려 했던 소녀가
마침내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고 교감해 가는 과정은, 가슴 아프게 볼 수 밖에 없는 이야기 속에서
차마 놓을 수 없는 애틋한 감정의 불씨를 지핍니다.
그리고 칠흑같은 시대 속에서 소녀들 스스로가 지핀 그 생명력은
과거의 기록에만 머물지 않고 여전히 시대의 고통을 겪는 현재의 소녀들에게로 전해지며
'부끄러워 하지 않고 기억해야 할 것'으로서 강인한 동기를 부여합니다.


da5bdba512a5e0c347c256e48dd5a877f44c7fb1.jpg <눈길>(Snowy Road, 2015)


감정적으로 쉽지 않았을 상황과 인물들을 성숙히 연기해 낸 두 어린 여배우들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종분 역의 김향기 배우는 지옥 같은 상황 속에서도 따뜻한 웃음을 잃지 않는 인물을
에너지와 진정성을 담아 표현해 냈고, 영애 역의 김새론 배우는 시대의 비극에 영락없이 휩쓸려
마음이 누더기가 되고 만 인물을 처절하지만 절제된 연기로 소화해 냈습니다.
소녀의 현재 모습을 연기하는 김영옥 배우가 보여주는,
세월과 상처를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투영한 듯한 연기 내공 또한 대단합니다.

<눈길>이 말하는 '우리가 그때를, 그 소녀들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단지 시대가 보여준 가혹함과 소녀들이 떠안은 생채기의 크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지금도 식을 줄 모르는 그들의 비열함과 악랄함이 시대를 초월하듯,
지치지 않겠다는 그때 그 소녀들의 의지 또한 시대와 무관하게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차디찬 나날들을 겪은 아름다운 소녀들의 초상과도 같은 그 눈길을
지금까지 걸어왔듯 앞으로도 걸어나가겠다는 정갈한 다짐이 영화에 들어 있었습니다.


2d10820fe864b8f0b94b26165f12bc355957d90b.jpg <눈길>(Snowy Road,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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