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시카 차스테인의 연기에 장악당하다

관람직후 리뷰 - <미스 슬로운>

by 김진만
53b2208e8e8a7dcd325885659a749f77d44df956.jpg <미스 슬로운>(Miss Sloane, 2016)

제시카 차스테인 주연의 영화 <미스 슬로운>을 시사회를 통해 미리 보았습니다.

총기 규제 강화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전략을 펼치는

여성 로비스트의 이야기죠. 사람 이름을 타이틀로 내세웠지만 실화는 아닙니다.

실화라면 상당히 뜨악스러워질 내용을 담고 있기도 하고요.

그렇게 뜨악스러울 수 있을 이야기로 관객을 설득해내는 제시카 차스테인의

역량에 찬사를 보내게 되는 영화였습니다.


영화는 초반부 빼곡한 대사량과 생소한 전문용어들로 진입장벽이 좀 있지만,

극 전개에 큰 영향을 미치진 않고 반복적으로 듣다 보면 맥락상 의미를 이해하게 됩니다.

'수정헌법 2조, 5조' 같은 단어들의 뜻이 그 말들이 쓰이는 정황 상 자연스레 파악되는 식이죠.

그런 약간의 진입장벽을 무사히 지나면, 영화는 기대 이상의 흡인력을 발휘합니다.

총기 규제 강화 법안을 둘러싼 불꽃 튀는 로비 경쟁과 그 상흔으로 벌어지는 청문회의 양상이,

총칼을 거의 쓰지 않고서도 총이나 칼끝을 서로에게 겨눈 듯한 긴장감을 흠뻑 자아냅니다.
그 긴장감은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주인공 미스 슬로운이 영화의 중심에 있기에 가능합니다.


a01cf82549259da59fccbdab9db0a6e5e909f5a3.jpg <미스 슬로운>(Miss Sloane, 2016)


극단적 워커홀릭인 슬로운(제시카 차스테인)의 제1덕목은 무엇보다도 성공, 승리입니다.

그러한 성공과 승리에 대한 집착은 객관적인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과는 하등 상관 없으며,

그렇기에 그녀가 수시로 행하는 선택은 관객들의 예상을 수시로 빗겨갑니다.

총기 규제 강화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이를 반대하는 회사를 선뜻 나오기까지 하는,

언뜻 쿨하고 정의로워 보이는 초반부의 면모는 속된 말로 '낚시'에 불과합니다.

그녀가 추구하는 것은 정의나 선의가 아닌, 가능성과 성과입니다.

자신이 데려온 팀원을 이용하기까지 하고, 법이 허용하지 않는 수단까지 쓰는 등

도덕과 상식의 경계를 넘어 예상치 못했던 지점들에서 뜻밖의 카드를 꺼내는

그녀의 행보를 지켜보는 마음은 스릴 넘치는 한편 마냥 편하지만은 못하기도 합니다.


조직이나 공동체, 인간관계 등 모든 것으로부터 철저히 자유로운 슬로운은

지독한 개인주의자인 한편, 아이러니하게도 그래서 자아가 실종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녀에게 인간관계는 인정이 아닌 철저히 필요에 의한 것이며,

애정생활도 본인이 이번 생에서는 누릴 수 없는 것으로 판단하여 돈으로 해소할 따름입니다.

영화는 이러한 그녀의 개인사를 일절 드러내지 않고

오로지 비즈니스적 행보에만 집중함으로써 그녀의 본질을 어렴풋이 들춰내려 합니다.

그녀가 수행하는 일이, 몸담고 있는 직업이, 둘러싸고 있는 세계가

그녀의 자아를 구름처럼 형성하고 있는 풍경을 보게 됩니다.


<미스 슬로운>은 언뜻 미국 정치계를 주름잡는 로비스트 세계의 단면을 신랄하게 보여주는 듯 하나,

이 영화가 그만큼의 사실적인 고발성을 띠고 있는지는 살짝 의아해지기도 합니다.

영화 속에서도 슬로운의 행태는 이단에 가까운 취급을 받을 만큼 극단적인 수준으로 그려지고,

반대로 그녀를 둘러싼 주변 로비스트 세계의 면면은 놀랍거나 치밀한 느낌이 덜하기 때문입니다.

슬로운의 행태가 미국 로비스트 세계를 대표한다기보다 좀 더 눈에 띄게 극화된 느낌이고,

그러다 보니 영화의 마무리도 할리우드스럽게 드라마틱한 엔딩으로 다가옵니다.

이 점이 어쩌면 몹시 타이트한 구성의 이 영화가 현지에서
생각만큼의 호평을 받지 못한 이유일 수도 있을 겁니다.


f60a40b62eda221e5437eef30a18cfb1b31ceb54.jpg <미스 슬로운>(Miss Sloane, 2016)


그러나 제시카 차스테인의 연기 덕분에, <미스 슬로운>은 사회고발극까진 아니어도

직업을 곧 자아로 삼게 된 여인의 꺾어질듯 꼿꼿한 삶에 대한 드라마가 되었습니다.

제시카 차스테인의 연기는 그녀가 이 연기로 어째서 아카데미에 노미네이트되지 못했는가

하는 탄식이 새삼스럽게 나오기까지 하는 수준입니다.

압도적인 대사량을 소화하면서도 언성 한번 높이지 않고, 말과 감정을 잘근잘근 곱씹으며

차가운 얼굴로 스크린을 장악하는 그녀의 연기를 따라가는 것만으로

영화의 극적 재미가 너끈히 보장될 정도입니다.

배우의 연기가 영화의 태반을 차지하는 경우가 늘 바람직하다고 볼 순 없지만,

이 영화는 제시카 차스테인의 연기 그 자체가 드라마이자 감정입니다.

마크 스트롱, 구구 바샤-로, 마이클 스툴버그 등 그녀를 서포트하는 배우들의 연기도 단단합니다.


따지고 들어가 보면 연속극 같은 전개의 비약이 곳곳에 보이는 점이 없지 않으나,

로비스트라는 생소한 직업 세계 속에서 펼쳐지는 말과 지략의 전쟁,

그 정중동의 혈투 속에서 자신을 무기화시키면서까지 목적을 추구하는 여인에 대한
복잡미묘한 드라마로서 <미스 슬로운>이 지니는 파괴력은 충분합니다.


5bc025c8f9ebe250ad36fbf74c2263804f24fe14.jpg <미스 슬로운>(Miss Sloane,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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