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짓는 자들의 감정을 들여다보다

관람직후 리뷰 -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by 김진만
b06c9cd2689015e50eb2701574da8ba647bffa2e.jpg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The Merciless, 2017)


이번 칸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 부문에 초청된 설경구-임시완 주연의 영화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이하 <불한당>)을 시사회로 미리 보았습니다.
한국형 느와르물에 이제는 식상해 질 만도 하나 칸영화제에 괜히 초청된 게 아니겠지 하는 기대감에
영화를 보았는데, 다행히 그 기대에 일정 부분 부응하는 영화였습니다.
느와르물에서 익히 볼 법한 설정과 사건들이 등장하지만 그런 것들을 실어 나르는
신선하고 담백한 연출력과 설득력 있는 캐릭터들이 매력적이었습니다.

이야기는 느와르물의 전형을 따릅니다. 교도소에서 만난 두 사람이 우정을 다지지만
서로 다른 속사정을 갖고 있음이 밝혀지면서 그 관계에 균열이 생긴다는 내용입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비밀과 배신이 가져오는 반전은 아이러니하게도
전형적인 느와르물의 클리셰입니다만, 영화는 이 클리셰를 재미있게 요리합니다.
시간적 거리를 둔 교도소 안과 밖의 이야기를 평행선처럼 오가면서
심심찮게 이야기를 분절시키는데, 그래서 꾸준히 궁금증과 긴장감을 유지합니다.
사건의 선후관계, 결과와 원인이 서로 자리를 바꾸며 영화의 이야기는
예정된 길을 걷는 듯 하면서도 럭비공 스텝을 자잘하게 밟습니다.


699f95def50d675f13a341079c7301cd6db1ddd5.jpg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The Merciless, 2017)


느와르물답게 폼을 잡지만 느끼하지 않고, 미화하지 않지만 마냥 불편하지도 않습니다.

살인과 배신이 난무하는 어두운 세계의 이야기이지만 유머감각과 시원한 액션을 적절히 첨가하여
이런 영화에 대해 관객이 느낄 식상함이나 심리적 압박감을 어느 정도 줄였습니다.
폭력적인 장면이 없지 않지만, 그 세계의 비정함을 강조하기 위해
굳이 불필요하게 폭력을 전시하는 무리수도 거의 두지 않습니다.
폼을 위해 리듬을 소비하지 않고 시작부터 끝까지 일정 속도 이상으로 달리는,
꾸준하게 잰걸음을 걷는 영화의 보폭 덕분에 지루하지도 않고요.
영화 속에 인상적인 대사들이 꽤 많이 나오는데, 예고편으로 볼 때는 괜히 폼만 잡는 거 아닌가 싶었으나
이렇게 칼같이 깔끔하고 단호한 영화의 태도 덕분에 거부감 없이 인상적으로 남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불한당>은 두 인물들의 정서에 주목합니다.
느와르물에 흔히 등장하는 의리나 우정 같은 감정이라면 이런 영화의 태도가 새삼스럽지 않을텐데,
영화는 그 대신 '죄의식'이라는 렌즈로 인물들을 들여다 봅니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부터 죄의식에 관한 흥미로운 대화가 나옵니다.
보통의 인간은 죄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범죄의 방식을 진보시켜 왔다는 겁니다.
돌로 직접 쳐 죽이는 살인에서, 멀리서 총으로 쏴 죽이는 살인으로 말이죠.
결국 영화에서 주인공 현수(임시완)와 재호(설경구)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의 포지션이
엉키고 뒤섞이는 한 가운데에는, 범죄가 대범하지 않고 교묘해짐으로 인해
방황하는 인물들의 죄의식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현수와 재호가 서로에게 갖는 강렬한 감정적 유대 역시,
'순수한 악'이 아닌 그들이 갖고 있는 죄의식으로 인해 생겨나는 셈입니다.


a24aea9d495a28912a0dd1cd6bae2fff3af0841f.jpg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The Merciless, 2017)


영화에 등장하는 또 다른 인상적인 대사 중에

"이렇게 살려고 사는 게 아니라 살려고 이렇게 사는 거다"라는 대사가 있습니다.
이는 버림받고 외면받아 온 세상 속에서 순수한 악이 아닌
'가장된 악'으로 살아 온 주인공들의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정글 같은 교도소에서 축적되어 온 유대감, 냉정한 사회에서 싹튼 배신감이
만들어내는 현수와 재호의 모호한 교감은 그 불확실한 얼굴에도 불구하고
갈수록 강한 잔상을 남기며 비정한 배신이 판을 치는 세상 속에서 뜻밖의 진실이 됩니다.
'불한당'이라는 제목에 붙은 '나쁜 놈들의 세상'이라는 부제의 의미는
어쩌면 그들을 나쁘게 만드는, '나쁜 놈들을 만드는 세상'의 의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두 주인공인 설경구-임시완 배우의 호흡과 케미가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럽습니다.
재호 역의 설경구 배우는 오랜만에 장르영화 속 기능적인 역할이 아닌,
비정함과 인간미 사이에서 관객이 헷갈리게 만드는 기묘한 카리스마를 맘껏 발산합니다.
현수 역의 임시완 배우는 '혁신적인 또라이'로의 변신을 매우 성공적으로 보여주는데,
깨질 것 같은 속내를 차가운 표정 뒤에 숨긴 살얼음 같은 얼굴을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악역인 듯 악역 아닌 악역 같은 캐릭터를 보여주는 김희원 배우와
가장 조용하게 그러나 가장 가차없이 사건을 흔들며 포스를 뽐내는 전혜진 배우도 인상적입니다.

어느덧 폭력과 배신이 난무하는 한국형 느와르물이 빤한 장르로 흘러가려는 시점에서,
<불한당>은 폭력이나 그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 그 폭력이 행해지는 세계의 외양에 도취되는 대신
거기에 속한 인물들의 필연적인 정서를 들여다 봄으로써 빤하지 않은 영화가 되었습니다.
멋스러우면서도 단호한, 일종의 '수미쌍관' 구조를 이루는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은
끊을 수 없는 악의 고리, 그러므로 인간이라면 더 짙어질 수 밖에 없는
죄의식의 고리를 말하는 듯하여 의외의 여운을 남깁니다.


3662016993c05f49160fa9ed095ff76e263140cc.jpg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The Merciless, 2017)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제시카 차스테인의 연기에 장악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