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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만 Feb 12. 2022

강 위의 배처럼 고요하고 위태로운 인간의 비극

인상적인 영화리뷰 2022 - <나일 강의 죽음>

<나일 강의 죽음>(Death on the Nile, 2022)


케네스 브래너 감독의 애거서 크리스티 추리 시리즈 두번째 영화 <나일강의 죽음>을 보았습니다.

전편 <오리엔트 특급살인>은 추리극으로서의 쾌감은 의문이었지만 군상극으로서의 매력을 나름대로 지녔었는데,

감독은 이번 <나일강의 죽음> 역시 셰익스피어 희곡을 다뤄온 솜씨에 걸맞게 추리극보다 인물극으로서 영화를 완성했습니다.

살인사건을 추리하는 과정 못지 않게,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공들여서 인물간 관계의 파노라마에 주목하는 영화는,

전편보다 한층 강렬하고 뒤엉킨 인간의 감정을 동력 삼아 살인사건이 몸통이 아니라 일부일 뿐인 인간의 드라마가 되고자 합니다.

명탐정 에르큘 포와로(케네스 브래너)가 이집트 나일 강에서 열리는 어느 부유한 신혼부부의 허니문에 초대됩니다.

거액의 재산을 상속받은 리넷(갤 가돗)과 그녀의 남편 사이먼(아미 해머) 부부의 행복과

그들의 결혼에 보내는 하객들의 축복으로만 가득할 것 같지만 이 허니문의 현장은 생각보다 복잡합니다.

6주 전에는 사이먼의 약혼자였으나 지금은 아닌, 한때 리넷의 친구였던 재클린(에마 매키)이

두 사람의 허니문을 쫓아 멀리 나일 강까지 따라와 그들을 주시하고 있는 상황이 불편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여기에 리넷의 친구이자 포와로의 친구이기도 한 부크(톰 베이트먼)과 그의 어머니 유피미아(아네트 베닝),

리넷의 시종 루이즈(로즈 레슬리)와 한때 리넷의 약혼자였던 의사 닥터 윈들샴(러셀 브랜드),

리넷의 대모인 마리(제니퍼 손더스)와 그녀의 전담 간호사 바워스(던 프렌치), 리넷의 사촌이자 변호사 앤드류(알리 파잘),

초대 블루스 가수 살로메(소피 오코네도)와 그녀의 딸 로잘리(레티티아 라이트)까지 저마다의 이유로 리넷과 얽힌

초대 손님들 사이에는 즐거운 축제 분위기 못지 않게 거둘 수 없는 의심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습니다.

질투와 시기와 탐욕이 조용하게 흐르는 이 유람선 위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포와로는 다시금 본연의 할 일에 나섭니다.


<나일 강의 죽음>(Death on the Nile, 2022)


셰익스피어 희곡을 연기하고 또 연출하면서 케네스 브래너 감독은 요동치는 인간의 욕망을 적잖이 탐구했을 것입니다.

아마 그가 애거서 크리스티의 고전 추리소설을 영화화하게 된 것도 그런 면에서 시작된 게 아니었을까 싶고요.

쫀쫀한 추리극보다는 우아한 드라마를 지향했던 <오리엔트 특급살인>에서 그 의도를 어렴풋이 느꼈는데,

좀 더 직접적으로 인물들의 감정을 파고들어 가는 이번 <나일 강의 죽음>에서 그 의도를 더 명확히 느꼈습니다.

한정된 용의자들 사이에서 사건의 범인을 찾아내는 이런 장르를 흔히 '후더닛'(whodunnit)이라 부르지만, 

이 영화는 사건의 양상보다 사건에 얽힌 인물들을 세세하게 추적하며 'Who'보다 'Why'에 주목합니다.

원작 소설이 현대 추리 소설들이 교본으로 삼는 원형이나 다름 없기 때문에 범인의 정체에 주목한다면 다소 싱거울 수 있습니다.

때문에 '넘사벽'의 위상을 지닌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새로운 추리 트릭에 도전하기보다 감독이 잘하는 인물 드라마를 택한 셈이죠.

다만 사전 정보를 가급적 제공하지 않고 심문을 거듭하다 결말에 거의 모든 임팩트를 몰아넣었던 <오리엔트 특급살인>과 달리,

이번 <나일 강의 죽음>은 초반 1시간을 인물 관계 추적에 살뜰하게 할애할 만큼 감정과 갈등 구조에 대한 사전 작업을 착실히 합니다.

그렇게 사건 이전부터 긴밀하게 얽힌 인물들 사이에서 조용히 차곡차곡 조성되던 긴장감이, 사건을 통해 비로소 수면 위로 드러납니다.

하나의 사건을 놓고 사건보다 사람에 주목하게 될 때 두드러지는 것은 바로 '비극성'입니다.

추리극이 들려주는 수많은 사건의 원인은 때로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사소한 것이기도, 때로 지독히 깊은 것이기도 합니다.

후자에 가까울 <나일 강의 죽음>에서 살인사건은 추리 엔터테인먼트의 무대이기보다 인간의 감정이 초래한 비극의 현장입니다.

절실하게 혹은 비뚤어진 채로 타오르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가져오는 빛나는 순간과 이어지는 비극은,

추리의 주도자인 포와로 또한 그 감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에 한편으론 범인의 정체보다도 흥미롭고 입체적입니다.

전편보다 더욱 포와로의 내면을 파고드는 이번 영화는 '만능 추리 머신'이기 이전에 사무친 감정을 지닌 인간으로서의

탐정 포와로를 중심에 세우며, 추리 게임이기보다 욕망의 늪에 스스로 뛰어든 인간들의 비극에 대한 유감으로서 사건을 바라봅니다.

살인사건의 범인을 찾아내는 건 포와로의 직업이지만서도, 진실과 마주한 그의 얼굴은 이번에도 안타까움과 슬픔에 젖어있습니다.

그 우수를 따라, 사건의 진상이 모두 밝혀지고 나면 남는 것은 또 하나의 미스터리가 해결되었다는 환호보다,

때때로 눈을 감은 채로 질주하는 인간의 욕망이 다다른 비극적 종착지를 보고야 말았다는 탄식에 가깝습니다.


<나일 강의 죽음>(Death on the Nile, 2022)


이번에도 주인공 에르큘 포와로를 맡은 케네스 브래너의 연기는 그런 점에서 더욱 깊고 진해졌습니다.

강박적인 성격이 자아내는 코믹 요소를 너무 메마르지 않은 정도로만 살짝 보여주다가도, 추리 과정에서 확신에 찬 태도로

상대방을 몰아붙일 때에는 함부로 맞설 수 없는 카리스마를 뿜어내고, 아직 추스르지 못한 자신의 감정과 마주한 순간에 이르면

애써 묵묵한 표정 안에 출렁이는 감정을 힘겹게 욱여넣으려는 얼굴을 섬세하게 드러내며 극을 힘있게 이끌어 갑니다.

갤 가돗과 아미 해머가 사랑의 욕망에 솔직하게 답하면서도 그 욕망으로 인한 불안에 사로잡힌 남녀의 모습을 안정적으로 그리는 한편,

재클린 역의 에마 매키는 절대적이라 믿었던 사랑의 배신에 좌절하면서도 그 사랑 앞에서의 당당함을 잃지 않으려는

인물의 복잡한 속내를 매우 능동적으로 연기하면서 첫 할리우드 상업 영화 출연작에서 강렬한 눈도장을 찍습니다.

전작에서 보여준 포와로의 쾌활한 조력자 느낌 이상의 존재감을 남기는 부크 역의 톰 베이트먼,

빤하지 않은 모성의 모습을 보여주며 명불허전의 캐릭터 소화력을 보여주는 유피미아 역의 아네트 베닝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나일 강의 죽음>은 추리극으로는 아쉽지만 인물극으로선 흡족한 전편의 노선에서 굳이 이탈하지 않았습니다.

전반 인물 관계 구현에 시간을 좀 많이 할애하다보니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는 과정에서 

표면화되는 갈등의 실체를 그리는 데 있어서 시간이 좀 부족했던 것 같은 아쉬움은 남습니다. 

그래도 부담없는 두뇌플레이를 동반하여 비교적 손쉬운 추리극을 연출한 끝에 드러나는 파국과

거기에 얽힌 인물들의 표정, 그 표정을 바라보는 탐정이자 인간의 모습에서 나타나는 처연한 마음에서는,

장르의 쾌감을 넘어 인간군상의 민낯을 들여다 보고자 했을 고전의 품격을 조금이나마 따라가려 했을 영화의 의도가 느껴졌습니다.


<나일 강의 죽음>(Death on the Nile,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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