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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만 Apr 05. 2022

상처뿐인 역사를 끌어안는 모성

인상적인 영화리뷰 2022 - <패러렐 마더스>

<패러렐 마더스>(Parallel Mothers, 2021)

페넬로페 크루즈가 올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기도 한 <패러렐 마더스>는

그간 모성의 영향 아래 있음을 꾸준히 피력해 온 알모도바르 감독 영화 세계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솔깃한 스토리와 강렬한 이미지로 여성들의 역동적인 드라마를 그린다는 점에서 감독의 익숙한 역량이 발휘되는 한편,

이렇게 만들어진 여성과 모성의 세계를 개인의 삶에 국한하지 않고 시대와 역사로 이어나간다는 점에서 눈에 띕니다.

그렇게 감독은 모성이란 개인의 삶 뿐만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온통 영향을 미친다고 말하는 듯 하고요.


유능한 사진작가 야니스(페넬로페 크루즈)는 화보 촬영으로 만난 법의학자 아르투로(이스라엘 엘레할데)에게

스페인 내전 당시 매장된 자신의 증조부와 마을 사람들의 유해를 발굴하는 계획에 함께 해줄 것을 부탁합니다.

그 일로 교류하던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고, 그 과정에서 야니스는 뜻하지 않았던 임신을 하게 됩니다.

탐탁치 않은 아르투로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야니스는 그와 헤어지면 헤어졌지 아이를 포기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친구 엘레나(로시 드 팔마) 정도만 찾아와서 챙겨주며 홀로 병원에서 출산 준비를 하던 야니스는

병실에서 자신과 마찬가지로 결혼하지 않고 아이 아빠의 무관심 속에 임신을 한 10대 아나(밀레나 스밋)를 만납니다.

야니스와 아나는 병원에서 친분을 쌓게 되고, 각자 아이를 낳은 후 분주한 나날을 보내게 됩니다.

어느 날 야니스는 아르투로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로부터 아이가 닮지 않은 것 같다는 얘기를 듣게 되고,

설마 하면서도 내심 마음에 걸렸던 야니스는 유전자 검사를 통해 자신이 아이의 친모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아무래도 병원에서 아이가 뒤바뀐 듯 한데, 야니스는 자신의 원래 아이를 아나가 키울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릅니다.


<패러렐 마더스>(Parallel Mothers, 2021)


눈과 귀과 향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오프닝과 음악, 시대에 발맞춰 보다 역동적이고 생생하고 섬세한 영상을 바탕으로

<패러렐 마더스>는 시간이 지나도 그 생명력을 잃지 않는 알모도바르 감독의 작품 세계를 감각적으로 펼쳐 보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감각적으로 연출된 세계 속에서 감독은 이번에도 모성의 힘을, 단지 희생과 헌신으로만 채워진 것이 아니라

감독 자신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의 삶을 이끌고 세상을 만들어 온 모성의 힘을 이야기하죠.

알모도바르 감독이 자신의 영화를 통해 모성의 존재감을 강조해 온 것은 한 두 작품이 아니지만,

<패러렐 마더스>는 더 이상 모성을 개인의 차원에서 다루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히 돋보입니다.

물론 각기 다른 모습의 모성이 어우러진 '모성의 세계'를 다룬 적은 예전에도 있지만, 이 세계가 단지

개개인의 세계의 총합에 머물지 않고 인간의 역사를 만들어 온 중요한 특질과 결부됨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남자는 등장해도 아버지는 거의 모습을 비치지 않는, 모계 사회처럼 어머니들의 존재와 역할이 뚜렷한 세계에서,

야니스와 아나, 아나의 어머니 테레사(아이타나 산체스 지온)까지 저마다의 세계를 만들어가고 이끌어 가는

서로 다른 모습의 어머니들은 아이를 낳고 기르는 숭고한 여정 속에서도 저마다의 상처를 안고 힘겨워 하곤 합니다.

때론 그 상처가 고통스러워 회피하려 하거나 감추려 하기도 하지만, 결국 똑바로 바라보고 끌어안을 때 잠깐의 고통은 오랜 치유로 이어집니다.

감독이 이야기하는 모성의 힘이란 이렇듯 무언가를 깨부수고 돌파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끌어안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이러한 모성들의 포옹은 내전으로 인해 수많은 목숨들이 침묵 속에 파묻혀야 했던 스페인의 역사를 두드리며,

역사의 수면 아래 감춰졌던 목소리들을 끌어내기에 이릅니다. 그렇게 모성은 역사와 맞닿습니다.

영화는 야니스와 아나의 뒤바뀐 아이에 대한 이야기가 어느 정도 전개되고 나면,

초반에 야니스와 아르투로가 만나는 계기가 된 증조부의 유해 발굴에 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전개합니다.

영화는 두 이야기가 어째서 하나의 영화 안에 놓이는지, 어떤 교집합으로 연결되는지 일일이 그리지 않습니다.

그저 이건 이 이야기, 저건 저 이야기 식으로 펼칠 뿐이지만 관객의 눈에는 어느덧 두 이야기가 겹쳐 보이는데,

사람의 아픔과 슬픔과 탄식이 담긴 사건 앞에서 취해야 할 어떤 태도가 공통적으로 발견되기 시작하면서 그렇습니다.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닌 아픔 앞에서, 혼자만의 탄식으로 사그라들지 않을 슬픔 앞에서,

그것을 애써 외면하지 않고 똑똑히 바라보며 눈에 새기고 마음에 앉히는 일을 함께 할 때 인간은 얼마나 강해지는지.

좁게는 개인의 삶에서, 넓게는 민중의 역사에서 그 '끌어안는 모성'은 얼마나 끈질기게 인간을 살아있게 하는지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영화에는 개인과 사회와 역사를 모두 위무하는 수 겹의 모성과, 마치 나이테처럼 그 모성의 겹을 두르고 또 두른 세상이

두터운 밑동을 마련하고 단단한 뿌리를 내리는 세상의 모습이 비치며 묵직한 여운이 남습니다.


<패러렐 마더스>(Parallel Mothers, 2021)


이 영화로 올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던 페넬로페 크루즈는 강렬하면서도 묵직한 연기를 보여줍니다.

이제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관록의 연기를 선보이는 그녀는 이 영화에서 갑작스런 혼란에 빠졌으면서도

당혹하길 멈추고 찬찬히 탐색하며 오랫동안 품어왔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강인한 여성을 생기 넘치게 연기합니다.

좀처럼 데시벨을 올리지 않는 낮은 목소리와 빠른 박자, 강한 액센트로 때려박히는 연기는 알모도바르 감독 특유의

강렬한 이미지들과 어우러져 어느 영화에서 볼 수 없는 고유의 풍경을 만들어내기에 이릅니다.

이런 페넬로페 크루즈와 긴밀한 호흡을 맞추는 아나 역의 밀레나 스밋 또한 담대한 에너지로 균형을 이룹니다.

상처에 굴복하기를 거부하고 의연하게 자신의 삶을 찾아나가는 젊은 여성의 모습을 카리스마 있게 그려냅니다.


<패러렐 마더스>는 지우고 기억하는 것을 법으로까지 만들며 과거의 고통과 싸워야 했던 스페인의 현대사를 알고 보면 더 좋을 영화입니다.

영화가 그리는 모성은 낳고 기르며 기억함으로써 과거와 현재, 미래를 빚어나가며 비로소 힘을 발휘합니다.

기억함으로써 고통 앞에 지지 않으려 했던 스페인의 역사에, 이런 모성의 순리는 어쩌면 절실히 필요했던 건지도 모릅니다.

얄궂은 개인의 사연에서 사무치는 시대의 기록으로 나아가며, 모성은 더욱 숭고한 힘이 되어 세상을 끌어안습니다.

이처럼 <패러렐 마더스>에는 모성으로 개인의 삶을 넘어 시련의 역사를 위로하는 거장의 원숙한 시선이 담겨 있습니다.


<패러렐 마더스>(Parallel Mothers,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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