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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만 Sep 04. 2022

섬뜩한 사건과 기특한 성장의 어깨동무

인상적인 영화리뷰 2022 - <블랙폰>

<블랙폰>(The Black Phone, 2021)


<닥터 스트레인지>를 성공시킨 스콧 데릭슨 감독이 본디 재능을 뽐내었던 소규모 호러 장르로 오랜만에 돌아와 만든 영화 <블랙폰>은 호러 소설의 제왕으로 불리는 스티븐 킹의 아들이자 그 자신도 유명 작가인 조 힐의 동명 단편 소설을 원작으로 합니다. 아기자기하지만 섬뜩하고도 의미심장한 아이디어에서 출발해 전개되는 이 판타지+호러+스릴러+어드벤처물은, 적당히 음침하고 스산한 공포 분위기와 그럼에도 꺾을 수 없는 소년소녀들의 에너지가 기묘하게 공존하는 가운데 불가해한 악의 그림자 앞에서 무릎 꿇지 않고 힘차게 일어서는 이들의 성장담으로 명쾌한 재미를 전합니다.


1978년 미국의 어느 마을은 아이들이 연이어 실종되면서 분위기가 뒤숭숭합니다. '그래버'(에단 호크)라 불리는 아이들 실종 사건의 용의자에 대해서는 인상착의와 행동에 대한 소문이 무성하죠. 그러나 소년 피니(메이슨 테임즈)에게는 그보다도 친구는 마땅히 없고 괴롭히는 아이들만 있는 학교와 강압적인 홀아버지 곁에서 숨죽이며 지내야 하는 집안의 분위기가 당장에 갑갑할 따름입니다. 그런 와중에도 피니와 여동생 그웬(매들린 맥그로)은 서로를 살뜰히 챙기며 돈독한 우애를 확인하죠. 그런 피니가 어느날 '파트타임 마술사'라며 다가온 그래버의 다음 타깃이 되고 맙니다. 위치를 알 수 없는 어두운 지하 골방에 갇힌 피니는 방 벽에 걸린 검은색 전화기를 발견하는데, 그래버가 자기 어렸을 때 고장 났다던 그 전화기에서 전화가 걸려옵니다. 발신자는 과거에 그래버에 의해 실종된 아이들. 전화기 너머 아이들은 소년에게 각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래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들을 알려줍니다. 마치 그들은 끝내 보지 못한 내일을 피니만은 맞이하길 바라듯이 말이죠.


<블랙폰>(The Black Phone, 2021)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으나 영화 <블랙폰>에서는 원작자 조 힐의 아버지이기도 한 스티븐 킹 소설의 감수성이 꽤나 묻어납니다. 어린 시절의 향수와 그 향수의 적잖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어둡고 공포스러운 존재, 그를 극복하기 위한 모험까지. 당장에는 최근 영화화되기도 했던 <그것>이 연상되기도 하는 코드들인데, 그래서인지 <블랙폰>은 세련된 모던 호러라기보다 다소 투박한 터치와 애틋하면서도 아련한 감수성이 공존하는 레트로 호러에 가까운 느낌입니다. 호러 장르임에도 서늘하기보다 대체로 따뜻한 톤 위주의 색감으로 이루어진 영상도 이러한 느낌에 한몫 하고요. 이는 80~90년대에 주로 나온, 당시 성장기의 청소년들을 매료시킨 호러 판타지 어드벤처물의 질감을 떠올리게도 하는 부분입니다. 지금은 넷플릭스의 <기묘한 이야기> 같은 작품으로 재현되고 있는 이 장르적 감성은, 성장기의 청소년들이 웬만한 성인용 콘텐츠에 나와도 될 만큼 무시무시한 존재와 겨루어 이겨냄으로써 정신적 성장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주죠. <블랙폰>을 볼 때 느끼는 감흥이 바로 그러한데, 살인마의 무시무시함보다 아이들의 성장이 주는 쾌감이 더 크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영화는 철저히 아이들의 시선을 견지하고 아이들의 정서에 이입하며 아이들을 지지하는 입장에 섭니다. 어머니와 헤어진 후 홀로 아이들을 키우는 아버지의 강압적인 태도는 때로 다소 위험한 수준에 이르기도 하지만, 영화는 아이들이 그런 아버지로부터 받는 피해보다 그런 와중에도 서로에게 기댈 어깨를 내어주는 아이들의 강인함에 집중합니다. 불꽃튀는 경쟁 속에서도 질투와 시기 대신 상대의 역량을 인정할 줄 알고,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한 아이들의 선의를 그리는 한편, 그런 아이들이 설령 누군가의 희생양이 된다 한들 그 모습에 대한 묘사를 최대한 절제함으로써 아이들의 존엄을 지키려 하죠. 논리적,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이 또한 입증하려 하기보다 순순히 받아들일 따름입니다. 반면 이 아이들을 해치는 악의 존재 '그래버'에 대해서는 암시하는 방식으로라도 서사를 조금도 부여하지 않습니다. 순도 100%의 싸이코패스인 이 캐릭터는 단지 극복해야 할 대상일 뿐, 이해받고 납득되어야 할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영화는 이러한 악의 공격에 침착하고 똑부러지게 맞서는 아이들의 기지와 성장을 보여주며 긴장감은 물론 뿌듯함까지 자아냅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많은 어른들이 자신 혹은 타인을 파괴해 가면서 스스로 해체되어 가는 반면,

생과 사의 위태로운 경계에서도 서로를 북돋우며 더욱 공고해져 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오묘한 대비를 이룹니다.


<블랙폰>(The Black Phone, 2021)


<살인소설> 이후 스콧 데릭슨 감독과 두번째로 작업하는 그래버 역의 에단 호크는 최근 악역 연기에 맛을 들인 듯 합니다. 얼마 전 공개된 마블 드라마 <문나이트>에서도 섬뜩한 악역을 빼어나게 소화했던 그는 이번 <블랙폰>에서 상당 부분 괴이한 가면을 쓰고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그 너머에 도사린, 예측할 수 없는 악의 기운을 흡사 뱀을 떠올리게도 하는 목소리와 몸짓 연기를 통해 서슬퍼렇게 그려내며 과연 실망시키지 않는 호연을 보여줍니다. 한편 이런 에단 호크에 전혀 밀리지 않는 열연을 펼치는 소년소녀 배우들의 활약이 특히 인상적이기도 합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와 에너지를 뿜어내는 피니 역의 메이슨 테임즈는 소심했던 소년이 겪는 성장 속에서 나타나는 감정선의 변화는 물론 고난이도의 액션까지 소화하며 극을 무난히 이끌어 갑니다. 납치된 피니를 찾기 위해 자신의 방식으로 추적을 벌이는 여동생 그웬을 똘똘하고 사랑스럽게 그려내는 매들린 맥그로도 인상적입니다.


이야기의 소재가 되는 범죄의 질이 실은 무척 섬뜩하며 잔혹하기도 하고, 때때로 장르 특성에 걸맞게 깜짝 놀라게 하거나 을씨년스럽게 분위기를 조성하는 호러적 연출이 살아있긴 합니다만, 그런 와중에도 이 모든 걸 헤쳐나가는 아이들의 단단한 에너지가 중심에 자리하고 있어 <블랙폰>은 명쾌한 오락물로 완성되었습니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건 나를 더 강하게 만들 뿐이다'라는 말처럼, <블랙폰>은 호러 장르의 중심에 있는 죽음의 이미지를 탐닉하기보다 죽음만큼 거대한 위협 앞에서 굴복하지 않고 더 강해지기를 택하는 소년기의 생기를 마음에 품는 영화입니다. 


<블랙폰>(The Black Phone,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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