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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만 Sep 11. 2022

우리의 우정은 선이 아닌 점이었음을

인상적인 영화리뷰 2022 - <성적표의 김민영>

<성적표의 김민영>(KIm Min-young of the Report Card, 2021)


전주국제영화제,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등 유수의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주목받은 독립영화 <성적표의 김민영>은 단단하다 믿었던 학창시절 친구 사이가 불과 1년 뒤 조용히 소원해진 뒤 일어나는 풍경을 슴슴하면서도 아기자기하고 유머러스하게 그립니다. 불꽃 튀는 갈등이나 날선 말다툼으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닌, 그저 '그렇게 되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공기로 그려지는 변화하는 관계는 일면 우습고도 서글프기도 하지만, 영화는 이 비애가 단지 커가면서 지나야만 했던 성장통의 과정이라고, 이를 통해 우리는 소멸되는 관계가 아니라 변덕스럽게 모양을 바꾸어가며 자리하는 관계를 만날 것이라는 솔직하며 현실적인 희망을 전합니다.


수능 100일을 앞두고 잠정 해체하기 전까지, 고3 수험생인 정희(김주아)와 민영(윤아정), 수산나(손다현)는 '삼행시 클럽'이라는 비공식 소모임을 만들어 유별난 상상을 실행해 보기도 하고 삼행시로 성장기의 감수성을 공유하기도 하는 절친 사이였습니다. 특히 기숙사 룸메이트인 정희와 민영을 같은 방에서 수능을 준비하며 말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통하며 웃음을 나누는 시간을 보냈죠. 하지만 수능 이후 정희는 학업 대신 알바를 택하고, 민영은 지방대에 진학하고, 수산나는 외국 명문대로 가면서 진로가 자연스레 나뉘었습니다. 세 사람은 화상으로라도 만나며 우정을 지속해보려 하지만, 환경과 처지가 저마다 달라진 그들이 예전처럼 서로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테니스장 알바를 하다가 불경기로 잘리게 된 정희는 마침 방학을 맞아 서울의 오빠 자취방에 머물게 된 미영을 만나러 가기로 합니다. 오랜만에 대면으로 만난 두 사람은 모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내나 했지만, 방금 막 학기말 성적을 받아든 민영은 교수들의 마음을 돌려 학점을 끌어올릴 방법을 찾느라 노트북에서 눈을 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친구와 놀 거리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온 정희는 그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점점 섭섭한 마음이 생겨납니다.


<성적표의 김민영>(KIm Min-young of the Report Card, 2021)


제목의 어감이 좀 생소한데, 일단 어째서 '김민영의 성적표'가 아니라 '성적표의 김민영'인지 이해하는 게 먼저인 것 같습니다. 제목 속 성적표는 영화 속 이야기의 현재 시점에서 민영이 대부분의 시간동안 애착을 보이는 대상이기도 합니다. 나이를 한 살 씩 먹을수록 저마다 추구하는 가치가 더 다양해지고 더 명확해지게 마련인데, 지방대에 다니고 있는 현실에 만족할 수 없어 '인서울' 대학교 편입에 도전하려 하고 그 전에 학점을 제대로 받으려 하기에 교수들에게 메일을 보내고 찾아가기도 주저하지 않는 민영에게는 '성적표'가 어쩌면 현재 삶에서 추구하는 제1가치일 것입니다. 반면 일찌감치 성적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민영에게 제1가치는 친구와 같은 소중한 사람들과의 관계였던 것 같습니다. 민영이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옆에 있는데도 성적 정정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듯이,  정희는 당장의 불안한 진로에 대한 고민은 접어두고 친구와 만나 시간을 보내는데 온 정신을 쏟고 있었으니 말이죠. 각자의 최우선 가치를 발견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둘이 서로를 금방 이해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학창시절의 우정에는 일정 부분 '환상'이 작용한다고 봐야 할 것 같은데, 그 이유는 타의적으로 주어진 시공간의 제약 때문입니다. 오랜 시간 한 공간에 함께 머무는, 미움이든 애정이든 어떤 감정이라도 단시간에 두텁게 쌓일 수 밖에 없는 환경에서 형성되는 우정은 대개 행보의 자유가 주어지는 대학 진학 이후에 시험에 들게 됩니다. 추구하는 것이 달라지면서 처하는 자리가 달라지고, 그만큼 물리적 또는 심리적 거리가 멀어지면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생겨나고, 같이 갈 수 있는 관계인가 의심이 생겨나죠. 이건 '갈등'과는 또 다른 의미의 꽤 복잡미묘한 감정선인데, 영화에서는 이 어색하고 서먹해지는 공기의 변화가 두 친구 사이에서 생겨나는 과정을 어긋나는 상황과 버퍼링 걸린 감정의 조합으로 세밀하게 그려집니다. 그런데 이게 그렇다고 해서 관계의 파탄을 의미하느냐고 묻는다면 영화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답합니다. 자신의 효용을 확인할 수 있는 환경을 끊임없이 탐색하는 친구와 주어진 환경 안에서 자신의 효용을 끊임없이 증명하려는 친구는 결국 맞춰갈 수 없는 서로의 다름을 확인하겠지만, 이것은 관계의 끝이 아닌 변화가 시작됨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이죠. 


<성적표의 김민영>(KIm Min-young of the Report Card, 2021)


내내 이어져 있는 선이라 믿었던 서로와의 관계가 결국 각자의 입장 위에 있는 점일 수 밖에 없음을 언젠가는 깨닫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관계를 맺는 데 있어 자신을 증명하는 데 몸부림칠 필요가 없었던 학창시절은 서로의 존재 자체의 효용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그 기회에 맺어진 우정은 서로가 점이 되어 멀어진다 한들 서로를 계소 확인할 수 있게 하고 이어질 수 있다는 유효함을 상기시키리라는 것입니다. 현재의 민영이 삶의 최우선에 두는 그 성적표의 형식을 빌려 정희가 평가해 본 민영이라는 '과목'의 성적이란 훌륭하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성적을 보완하려 하거나 부정하지 않는 것은, 그 자체가 민영을 정의하며 그런 민영과 정희는 기꺼이 친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정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 가는 과정이 세심한 터치로 그려지는데 정희 역의 김주아 배우와 민영 역의 윤아정 배우가 표현하는, 어색하고 서먹하고 섭섭하고 때로 북받치는 감정의 오묘한 결을 통해 나타납니다. 여기에 수산나 역의 손다현 배우, 정일 역의 임종민 배우까지 풋풋한 일상의 기운을 머금은 젊은 배우들의 연기가 더해져 <성적표의 김민영>이 보여주는 변해가는 우정의 시간은 마냥 불편하지만 않고 무척 사랑스러운 생기를 내내 지켜 갑니다.

이제 영화의 제목이 왜 '김민영의 성적표'가 아니라 '성적표의 김민영'인지 이해가 될 것도 같습니다. 언어 구조상으로만 보면 '~의'라는 조사 뒤에 붙는 단어는 앞에 붙는 단어가 소유하는 대상이 됩니다. 이를 적용하면 '성적표의 김민영'이라는 제목에서 '김민영'은 '성적표'가 소유하는 대상이 되는 셈이죠. 성적표라는 외적 기준에 의해 김민영이라는 하나의 인격이 정의되는 현실이 투영된 씁쓸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심정적으로 느끼기에 이런 구조의 제목에서 조사 '~의'의 뒤에 붙는 단어는 보통 더 강조되는 대상이 됩니다. 그렇게 보면 '성적표의 김민영'에서 김민영은 성적표에 새겨진 학점들보다도 더 눈여겨 보게 되는 김민영이라는 존재를 가리키는 셈이 됩니다. 사회로 발을 내딛으며 변화하는 과정에서 깨닫는 친구의 의미란 아마도 이런 것일 겁니다. 사회를 겪으며 누적되는 나의 성적표를 통해서 내 가치를 확인하려는 이들이 점점 많아질 때, 언제까지나 성적표에 적힌 내 이름에 오롯이 주목할 사람. <성적표의 김민영>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비애와 긍정할 수 밖에 없는 희망이 공존하는, 젊은 날 관계의 변화에 대한 사려깊은 기록장입니다.


<성적표의 김민영>(KIm Min-young of the Report Card,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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