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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만 Oct 02. 2022

너무나 많이 사랑한 게 죄는 아니잖아

인상적인 영화리뷰 2022 - <성덕>

<성덕>(Fanatic, 2021)


작년 부산국제영화제 최초 공개 이후 서울독립영화제, 마리끌레르영화제 등 국내 유수 영화제에서 매진사례를 기록한 화제의 다큐멘터리 영화 <성덕>을 저 또한 영화제 때는 표를 구해 보지 못하다가 이번에 정식 개봉이 되어서야 보게 되었는데요, 과연 그 명성에 걸맞은 걸출한 영화였습니다. '상처받은 덕심'이라는 쓰라린 개인사에서 출발하지만 결국은 한국 현대 사회에서 팬덤 문화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력에 대한 생활 밀착형 통찰과 고발에 이르는 이 영화는, 무작정 취재하며 덜컥 찍은 것처럼 보여도 날카롭고도 따뜻한 시선을 갖춘 '물건'입니다.


영화의 주인공이기도 한 오세연 감독은 가수(였던) 정준영의 팬이었습니다. 그냥 팬도 아니고 흔히 말하는 '성덕'이었죠. 단지 싸인 받고 공연 보고 같이 사진 찍었다고 '성덕'이었던 게 아니라, 한복 입고 싸인회를 간 것을 계기로 스타가 알아보고 언급까지 하며 심지어 그와 함께 TV 프로그램에도 출연한 진정한 의미의 '성공한 덕후'였습니다. 그 지극한 팬심은 전교 1등도 하고 '인서울' 대학도 가며 자신의 미래를 진취적으로 가꾸어 나가는 동력이 되었지만, 자신이 그렇게 팬심을 바탕으로 성장하고 발전하는 사이 그 팬심을 돋운 스타라는 놈은 범죄자가 되었습니다. (그것도 죄질이 매우 나쁜) 철컹철컹 쇠고랑을 찬 그로 인해 성장기의 빛나는 추억은 하루아침에 어디 내놔도 부끄러운 역사가 되었습니다. 다음 '피켓팅'은 인터파크가 아닌 법원 앞에서, 다음 만남은 공연장이나 싸인회장이 아닌 재판장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속시끄러운 심정의 감독은 이 참에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을 만나보기로 했습니다. 자신들이 열광하던 스타가 범죄자가 되면서 졸지에 '범죄자의 팬'이 되어버린 친구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성덕>(Fanatic, 2021)


가장 열광적인 팬이 가장 지독한 안티가 되는 경우도 더러 있지만, <성덕>이 풀어내는 이야기는 그보다 좀 더 복잡미묘합니다. 오세연 감독을 비롯해 영화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은 스타에 대하여 단순히 콘텐츠를 향한 애정을 넘어 인간적인 호감을 느낍니다. 팬들과 만나는 여러 자리나 각종 매체에서 나타나는 그의 성품과 성향에 대한 호감이 콘텐츠의 매력과 결합할 때 비로소 팬은 탄생하는 것이죠. 스타들이 저지르는 범죄는 그렇게 호감을 불러일으킨 성품과 성향의 이미지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것이기에, 팬들의 배신감은 당연히 클 수 밖에 없고 대부분의 팬들은 그 길로 스타와 팬의 관계를 일절 끊어내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으니, 바로 스타에 열광하면서 어느 때보다도 열심히 반짝였던 시간들입니다. 스타와의 관계성을 끊어버린다면 그를 좋아하던 시절 내 모습, 그를 좋아하며 내가 겪은 변화와 성장까지 부정하는 게 되는 건 아닐까 싶은 거죠. 여기에 나는 그가 그런 인간인 걸 정말 모르고 덕질을 한 것인지, 그를 향한 나의 덕질이 그가 '그런 짓거리'들을 원없이 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동력이 되어 온 건 아닌지 하는 일말의 죄책감까지 겹치면서 '범죄자가 된 스타'의 팬들의 마음은 훨씬 더 복잡해집니다. 팬질을 끊어내는 의미로 '굿즈 장례식'을 하자고 모인 자리에서 굿즈 하나하나에 담긴 추억을 곱씹다 또 마음이 들뜨는 등 스타를 향한 증오와 원망,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아 있는 지난 애정의 흔적들이 교차하는 심경 토로의 현장은 웃프기 이를 데 없습니다. 속에선 피눈물이 날 법한데도 겉으론 헛웃음이 터지는 그 탐색의 여정을 통해, 영화는 팬질과 팬덤의 현실적인 의미를 되짚습니다. 거창한 학문적 접근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그 한 가운데에서 깊이 몰두해 본 적 있는 당사자들의 경험적 터득을 통해서 말이죠.


스타는 팬들에 의해 만들어진다는데, 현실은 스타가 무너질 때 생겨나는 부산물들까지도 팬들이 떠안아야 하는 것만 같습니다. 감독이 좋아했던 스타의 경우처럼 다른 범죄도 아니고 자신의 팬들과 같은 여성의 존엄을 완전히 저버리는 천인공노할 죄를 저질렀다 해도, 스타들은 진심으로 속죄할지 아니면 재수없게 걸렸다며 잠시 조용히 있다가 또 슬그머니 나타나 지장없이 돈 벌러 다닐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아끼고 사랑했던 팬들은 그런 인간에 열광했던 지난 날들이 언제까지 지우고 싶은 시간들로 자신을 쫓아다닐지 알 수 없습니다. 누군가는 이런 팬덤의 번뇌를 지켜보며 '왜 그런 데 시간과 에너지를 쏟나', '현생에 집중하라'며 핀잔을 줄지도 모르지만, 생각보다 더 가깝고 많은 사람들이 영화 속 '성할 데 없는 덕후'들의 성토 현장에 모인 것에서 일 수 있듯 팬덤은 우리의 삶에 깊고 넓게 존재합니다. 소수의 유별난 취미생활로 치부할 수 없는, 사랑하고 성장하는 현대인의 또 다른 방식일지도 모를 팬덤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스타의 범법행위와 그로 인해 상처받는 팬들의 문제는 생각 이상으로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셈이죠. 그런 점에서 오세연 감독을 중심으로 한 이 상처 받은 팬들의 이야기는 강건너 불구경하듯 볼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닌 대중문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떤 스타라도 좋아해 본 적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성덕>(Fanatic, 2021)


기성 세대의 눈에는 팬덤 문화가 환상 속의 스타에게 아낌없이 마음을 주는 허황된 취미생활로 보일지 모르지만, 영화에서 여러 인물들이 털어놓는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이 독특한 사랑은 개인의 변화와 성장에 분명한 영향을 끼치며, 그러므로 이런 불미스러운 사태들이 발생한다 한들 팬덤 문화 자체가 부정당할 수 없다는 것을 영화는 보여줍니다. 이는 곧 내가 사랑했던 스타가 범죄자가 되었다 한들, 그 사랑으로 인해 변화하고 성장한 나 자신까지 부정할 순 없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한때 삶의 동력이 되었던 과거의 덕질이 현재의 나를 옭아맬 수 없도록 안간힘을 쓰는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영화는 범죄를 저지른 당사자들이 온전히 떠안아야 할죄를 그들의 팬이었다는 이유로 나누어 짊어질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다만 마음에 새길 것은 사랑했던 시간동안 즐겁고 행복했으며 자라나고 나아간 내 모습일 뿐, 내가 사랑한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이 바로 상대의 실체를 모르고 할 수 밖에 없이 이 특수한 사랑을 상대가 아닌 나를 위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성덕>을 연출한 오세연 감독은 아이템을 취재하는 입장이면서 동시에 스스로가 아이템의 핵심 당사자인 입장으로서, 하나의 감정으론 설명할 수 없는 본인의 복잡한 속내를 있는 그대로 재치 있게 카메라에 담아내는 한편 함께 겪어 본 '동지'로서 이 본의 아닌 사랑의 시행착오를 겪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겪어 온 시간과 그 시간 속에 만들어진 내 모습까지 부정하진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따뜻한 응원을 건넵니다. 박장대소할 만한 자아성찰과 배은망덕한 현실을 향한 촌철살인, 과거의 그 사랑만큼 생기있게 피어나는 긍정까지 <성덕>은 개인에 투영된 현실을 신랄하게 꼬집고 현실의 한복판에 선 개인을 끌어안는 다큐멘터리의 새로운 감각을 보여줍니다.


<성덕>(Fanatic,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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