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적인 영화리뷰 2022 -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애니메이션 감독 마크 구스타프손과 함께 연출한 첫 애니메이션 영화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의 제목에 굳이 '기예르모 델토로의'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은, 누구나 아는 원작을 바탕으로 했음에도 그의 비전이 고스란히 투영됐기 때문입니다. 삶의 죽음, 인간과 괴물의 어두운 경계를 늘 탐험해 왔으면서도 그 속에서 인간의 마음을 포착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던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작품은 그래서 심심찮게 보는 이의 가슴을 울리기도 했는데, 이 영화도 아마 그럴 것입니다. 다 큰 어른이 다 아는 동화를 또 보고도 눈시울을 적시는 것이 가능한 것은 뚜렷한 주관을 지닌 감독이 동화가 품은 어두운 면을 놓치지 않고 고스란히 포착했기 때문에, 그럼으로 인해 우리가 잊고 있었던 오래된 이야기의 변치 않는 정수를 새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1910년대 이탈리아의 고즈넉한 시골 마을의 목수 제페토(데이비드 브래들리)는 어린 아들 카를로와 단둘이 살고 있었습니다. 마을 성당의 예수상까지 만들 만큼 실력을 인정받음은 물론 아들과의 단란한 모습과 모범적인 삶으로 '마스터 제페토'라고 불리며 존경받았죠.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였떤 아들을 하루아침에 잃으면서 제페토의 삶도 순식간에 무너지고 맙니다. 아들이 생전 마지막으로 찾아서 품고 있었던 솔방울을 곁에 묻은 아들의 무덤가에서 술로 하루를 보내기 일쑤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아들을 잃은 뒤 삶의 의욕을 잃고 아들을 양한 그리움만 부여잡고 있던 제페토 곁에서 아들의 솔방울은 큰 소나무로 자라납니다. 어느날 아들을 향한 그리움이 사무치던 제페토는 소나무를 베어다 소년 형상의 인형을 하룻밤 사이에 뚝딱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간밤에 나타난 푸른 요정(틸다 스윈튼) 이 완성된 인형에 생명을 불어넣고, 마침 나무에 얹혀 살고 있던 귀뚜라미 세바스찬 J. 크리켓(이완 맥그리거)의 도움을 받아 착한 소년이 되어 가엾은 제페토가 더 이상 외롭지 않게 해줄 것을 주문합니다. 아침이 되자 스스로 움직이는 소년 인형 피노키오(그레고리 만)가 앞에 나타나 있음에 제페토는 당연히 당혹해 합니다. 사회 경험(?)이 없는 피노키오가 발길 닿는 곳마다 말썽을 피우는 와중에도 두 사람은 어느덧 아빠와 아들 사이가 되어 가고, 그렇게 피노키오와 제페토의 뜻하지 않은 모험이 이탈리아 곳곳을 누비며 펼쳐집니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늘 전쟁과 탐욕으로 얼룩진 어둠과 죽음의 세계 너머 순수와 사랑의 의미를 탐구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발견한 순수와 사랑은 때로 <판의 미로>처럼 사무치게 슬프기도 했고, <셰이프 오브 워터>처럼 눈부시게 아름답기도 했죠. 스페인 내전 한복판에 있는 소녀의 모험을 그렸던 <판의 미로>를 통해 감독은 과거 판타지의 존재 이유를 입증한 바 있습니다. 너무나 참혹하여 맨눈과 맨정신으로는 도무지 버티지 못할 현실에서 판타지는 도피처이자 보호처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죠. 그런 그가 누구나 다 아는 고전 동화 '피노키오'를 새삼 영화로 만들기로 한 것 역시 동화의 이러한 힘을 입증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릅니다. 동화 '피노키오'가 이탈리아 작가 카를로 콜로디에 의해 쓰여지긴 했지만, 영화는 더 나아가 당대 이탈리아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습니다. <판의 미로>의 배경이 스페인 내전이었듯, 이 영화의 배경은 1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이어지는 무솔리니 정권 하의 이탈리아입니다. 제페토가 하나뿐인 아들(원작자의 이름을 본 딴 듯한 '카를로')를 잃은 것이 1차 세계대전의 여파 때문이었고, 이후 피노키오가 생겨난 뒤 피노키오와 제페토의 여정에는 끊임없이 무솔리니의 파시즘 정권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죠. 당시 세계를 장악한 전쟁과 권력의 광기가 피노키오와 제페토에게 난관을 부여하는 보다 직접적인 요인으로서 작용하는 셈인데, 영화는 그 속에서 피노키오와 제페토가 떠안는, 아마 인간이라면 누구나 떠안게 될 필연적인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합니다. 유한한 인간이기에 열렬히 사랑하는 만큼 끊어질 듯 아플 수 밖에 없는 상실의 아픔이 그것입니다.
영화를 보다 보면 '짐(burden)'이라는 단어를 자주 듣는데, 영화에선 그 뜻을 '고통을 알면서도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하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그 고통이란 누군가를 영영 잃는 아픔에서 오는 것인데, 그를 내 몸과 같이 사랑했다면 그 고통은 그만큼 더 클 것입니다. 거역할 수 없는 세월을 따라서 만나는 상실의 순간이라도 그 아픔이 클진대, 그것도 모자라 영화 속에서는 전쟁과 파시즘의 광기가 더해집니다. 언제 허공에 흩어질지 모를 권력욕을 위해 목숨이 하나뿐인 인간마저 일회성의 전쟁 도구로 여기는, 그러니 파괴되어도 살아나는 피노키오를 보면서 '슈퍼 솔저' 같은 생각부터 떠올려대는 그 폭력적인 탐욕이 상실의 슬픔을 세상에 더 짙게 드리우게 합니다. 그러나 피노키오가 강한 소년인 이유는 '죽지 않는 몸' 때문이 아니라 '꺾이지 않는 마음' 때문입니다. 제페토의 아들인 카를로가 생전에 찾았던 솔방울이 곧은 소나무로 자라나 피노키오로 만들어졌듯, 피노키오는 자신을 원하는 대로 휘두르려는 탐욕스런 어른들 사이에서 깨우치고 나아가며 올곧은 소년이 되어갑니다. 피노키오의 그런 올곧은 마음은 전운으로 황폐해져 가고 죽음의 기운으로 암담해져 가는 세상을 헤쳐나가게 하는 길잡이가 되고, 피할 수 없는 삶의 유한함 속에도 그래서 삶이 더욱 찬란한 선물이라는 깨달음에 끝내 이르게 되는 것이죠. 영속된다면 그 소중함을 알지 못할, 상실의 아픔이 그토록 끔찍하기에 그래서 더 소중한 기쁨이 우리 삶에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요.
영화는 애니메이션 특유의 과장된 표현을 살려 때론 우스꽝스럽게 보이다가도 '전체 관람가' 영화답지 않게 때론 섬뜩하고 스산하게 시대의 메마른 분위기를 그리지만, 그런 만큼 피노키오와 제페토, 크리켓 같은 등장인물들을 향해서는 애정을 담뿍 표시합니다. 제페토가 술김에 만든 피노키오가 그렇게 매끄럽고 훌륭한 모습이 아니듯, 등장인물들의 모습도 흔히 떠올리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속 모습처럼 예쁘장하고 아기자기하게 그려지지 않았지만, 스톱모션 기법 덕에 만져질 듯한 표정과 감정, 눈물이 고스란히 비치니 주의깊게 들여다 보며 애정을 갖게 되고 어느덧 그들의 희로애락에 보는 이 역시 한마음으로 이입하게 됩니다. 명배우들의 재기발랄하면서도 진심어린 목소리 연기 또한 빛을 발하며 영화에 몰입하는 걸 돕습니다. 위트 넘치면서도 따뜻하고 소탈한 크리켓을 연기하는 이완 맥그리거, 투박하지만 절절한 아버지 제페토의 마음을 표현하는 데이비드 브래들리, 맑고 순수한 목소리로 노래 또한 깊은 감명을 주는 피노키오 역의 그레고리 만, 미리 알지 않으면 눈치 못 챌 원숭이 스파자투라 역의 케이트 블란쳇, 극에 신비롭고 기이한 이미지를 더하는 푸른 요정 역의 틸다 스윈튼, 탐욕 투성이 캐릭터 서커스 단장 볼페 백작 역의 크리스토프 왈츠, 그 밖에 론 펄먼, 핀 울프하드, 팀 블레이크 넬슨 등 적재적소에 배치된 배우들의 목소리 연기가 영화를 즐거운 동화로 손색 없게 만들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기예르모 델 토로는 늘 기괴하고 어두운 판타지와 괴물의 세계에 주목하면서도 인간을 향한 시선을 거둔 적 없었습니다. 삶과 죽음, 빛과 어둠이 한 몸처럼 등을 맞대고 있듯 뒤틀린 상상의 반대편에는 늘 인간에 대한 연민이 자리잡고 있었죠. 그런 변함없는 비전이 만들어낸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 역시 죽음의 슬픔과 공포가 존재하는 황폐한 세상이기에 비로소 삶이 찬란한 기쁨이라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아이러니 같음에도 끝내 납득하고야 마는 깊은 깨달음을 전하는 영화입니다. 비전이 뚜렷한 감독의 손길이 닿으면 고전은 새로운 명작을 낳으며 그 생명력을 연장한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되는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는 진정 남녀노소 모두가 보았으면 '전체 관람 권장' 애니메이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