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적인 영화리뷰 2022 - <더 메뉴>
<왕좌의 게임>, <셰임리스>, <석세션> 등 걸출한 미드들을 연출한 마크 미로드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랄프 파인즈, 안야 테일러-조이, 니콜라스 홀트가 주연을 맡은 영화 <더 메뉴>는 최근 할리우드의 그 어떤 흐름에도 빗겨 서 있는 신선함으로 가득합니다. 눈 돌아가는 요리 영화이자, 한껏 쫄게 만드는 호러 영화이자, 저의가 궁금한 스릴러 영화이자, 우스꽝스러운 코미디 영화이기도 한 이 작품은 매우 고급스럽고 품격 있는 모양새로 역설적이게도 품격을 좇고 고급화를 추구하는 대중문화의 허영에 비수를 꽂습니다. 영화가 마련한 덫에 영락없이 걸려들고도, 그 덫에 놓인 음식이 너무나 맛깔스러운 나머지 그 덫을 즐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영화입니다.
12명의 선택된 사람들이 특별한 디너에 초대됩니다. 초대 받은 곳은 외딴 섬을 혼자 차지하고 있는 '호손'이라는 레스토랑. 단 12명, 6 테이블만 받는 이곳 디너 코스의 가격은 인당 1,250불, 한화 180만원에 이르지만 그 인기가 대단합니다. 이번 디너에도 저명한 음식 평론가, 왕년의 잘나가던 배우, 젊은 사업가들, 부유한 중년 부부 등 쟁쟁한 손님들이 초대된 가운데 마고(안야 테일러-조이) 또한 고급 음식에 환장하는 남자친구 타일러(니콜라스 홀트)와 함께 이 디너 장소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손님들은 이 자리를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한 것 같은 데 반해 마고는 이 분위기가 영 이해되지 않는 눈치입니다. 타일러가 내딛는 걸음걸음, 만나는 음식마다 열광하는 와중에도 마고는 그 모든 게 떨떠름할 따름입니다. 지베인 엘사(홍 차오)의 친절한 듯 내심 강압적인 가이드 끝에 손님들은 레스토랑에 인도되고 셰프 슬로윅(랄프 파인즈)을 만납니다. 고유의 요리 세계로 많은 팬들을 확보한 유명 요리사인 슬로윅은 자신만의 비전이 담긴 디너 코스 요리를 내놓기 시작하는데, 처음엔 셰프 특유의 고집이 다소 지나쳐 손님들을 기만하는 것도 같던 요리가 점차 손님들을 위협하는 모양새가 되어갑니다. 마치 슬로윅이 친 덫에 꼼짝없이 걸려든 듯한 손님들 사이에서 마고는 슬로윅의 저의를 의심하고, 슬로윅 역시 마고의 정체를 의심합니다.
<더 메뉴>는 그야말로 수준 높은 연출 감각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시청각적으로나 배우들의 연기면에서나 자로 잰 듯 직조된 느낌이죠. 일단 12명의 선택된 사람들이 당도한 레스토랑 내부 풍경과 선보이는 음식의 비주얼로 관객의 기선을 제압합니다. 극도의 완벽주의를 바탕으로 설계된 듯한 레스토랑 내부는 손님들에게 윽박지르는 것까지 가능할 정도로 또렷한 스태프들의 주관이 더해져 범접할 수 없는 고유의 정신을 지닌 예술의 터전으로 다가오고, 그곳에서 선보여지는 음식들은 차라리 하나의 예술품에 가까워 보입니다. 마치 조각성처럼 플레이팅된 요리에 시각적으로 감탄하면서도, 이게 어쩌면 식욕의 또 다른 발현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타협의 여지를 주지 않는 메뉴의 기조와 이를 만드는 이들의 주관은 이 음식들에 대단히 큰 뜻이 숨어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을 부여합니다. 디너에 초대된 대다수 사람들에게 동화되어, 이 음식들과 장소를 누려야 이 경험을 제대로 만끽하는 것이라고 믿게 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영화는 매우 영리하게도 이런 감흥을 영화가 도모하는 거대한 풍자에 관객 또한 휘말리게 만드는 유혹적인 덫으로 활용합니다. 이해할 수 없어도 일단 이해한 걸로 하자고 다짐하게 되는 요리들은, 그 앞에 마주선 손님들과 관객의 욕망을 까발리는 신호탄일 따름입니다. 마치 입에서 식재료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며 최상의 맛을 만들어내는 요리처럼, 영화는 그 풍자의 다채로운 줄기를 풍미 좋게 뒤섞어 내놓습니다.
요리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 중 하나인 식욕을 즉각적으로 충족시키는 수단임에도 '미식'이라는 수식어 아래 복잡한 욕망이 얽혀 있습니다. 요리를 하나의 '콘텐츠'로 규정한다면 누군가에겐 자신이 수준 높은 콘텐츠를 즐기고 있다는 계층적 허영을 채우는 도구일 수도 있고, 요리를 점수 매길 만한 '작품'으로 규정한다면 누군가에겐 이런 콘텐츠를 평가할 줄 안다는 지적 우월감을 채우는 도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요리를 통해 어떤 이들이 허공에 떠도는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려 할 때, 다른 어딘가에서는 절박한 꿈과 삶이 무너지기도 합니다. 요리를 만든다는 것은 과시욕을 불러일으키는 고차원적 예술이면서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기초적인 생계 활동이기도 하기 때문이죠. <더 메뉴>는 요리라는 하나의 매개를 통해 헛바람 잔뜩 든 인간의 욕망과 거기서 싹트는 계층 갈등, 변질된 산업의 풍경까지 한눈에 담습니다. 영화 자체가 하나의 코스 요리처럼 구성되어 각 코스에 따라 저마다의 명확한 주제가 드러나는 가운데, 초대받은 손님들의 면면은 영화가 풍자하고자 하는 현대 사회의 살풍경 곳곳을 대표하고 있어 풍자의 설계도를 정갈하고도 대담하게 구성해 나갑니다. 슬로윅과 요리사들의 요리들은 관객들까지도 그 미궁 속의 진의를 유추하게 하며, 마치 관객 역시 호손 레스토랑의 손님이 된 듯 끌어들입니다. 그리고 이윽고 마주하게 되는 슬로윅의 진의는 관객을 능히 당혹스럽게 하고도 남습니다. 초대된 손님들과 같이 골똘히 고민하고 의미를 되새겨 보던 관객의 태도와 정면으로 대치되는, 아니 관객의 태도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뜻이 있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죠.
자본, 영향력, 유명세 같은 동력을 통해 허세에 가까운 위세를 떨치는 자들이 누군가의 삶을 짓밟고 서서 허영심과 과시욕을 비웃는 한편, 이들에게 철퇴를 날리며 슬로윅이 묻는 것은 결국 지극히 단순한 질문인데, 바로 '우리는 왜 음식을 먹는가'입니다. 사실 음식은 약간의 노력과 애정을 통해 넘치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것임에도 왜 이런 순수한 즐거움을 그런 헛된 욕망에 양보한 것인지, 그저 '맛있다', '잘 먹었다'는 감상만으로는 부족한 것인지 묻는 이 영화의 질문은 비단 음식에만 국한되지 않을 것입니다. 영화, TV, 음악 등 대중을 상대로 하는 모든 콘텐츠들, 때로 대중'예술'이라 불리며 드높은 기준을 강요받기도 하는 모든 것들에 해당되겠죠. 매우 대담무쌍한 상상력을 발휘하면서도 결국 지극히 원초적이고 보편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새롭고 쉽지 않은 시도였을텐데 영화는 감독의 날카롭고도 유머러스하고 정교한 연출, 그 연출을 따라 담백하고 치밀하게 구현된 랄프 파인즈, 안야 테일러-조이, 니콜라스 홀트, 홍 차오 등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충격적이면서도 한동안 빠져서 헤어나올 수 없는 맛의 결과물로 완성되었습니다.
시각적으로도 충만하고 대담한 상상력과 도발적인 화두, 그 속에 담긴 진정성도 고스란히 느껴지기 때문에 <더 메뉴>는 보고 나면 그 뛰어난 영화의 '수준'을 저절로 논할 수 밖에 없는데, 한편으로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를 생각해 보면 이렇게 수준 운운하는 우리 역시 호손 레스토랑에 초대 받으면 꼼짝없이 슬로윅의 타겟이 되는 게 아닌가 움찔하게도 합니다. 이처럼 풍자의 파장이 영화 안에만 머물지 않고 영화 밖 관객에까지 미친다는 점에서 또 한번 뛰어난 풍자극임을 상기시키는 <더 메뉴>는 (슬로윅의 눈총을 피할 수 없을 표현이겠지만) 품격 높은 풍미와 감각을 갖춘 스릴러이자 다크 코미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