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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만 Dec 04. 2022

그들이 추적한 진실, 그들이 추구한 정신

인상적인 영화리뷰 2022 - <그녀가 말했다>

<그녀가 말했다>(She Said, 2022)


2017년 공개되어 전세계에 '미투 운동'을 촉발시키며 할리우드는 물론 전세계 산업 전반에 큰 변화를 몰고 온

뉴욕 타임즈 조디 캔터, 메건 투히 기자의 '하비 와인스타인 성비리' 탐사보도 과정을 그린 <그녀가 말했다>는 오랜 세월 지속되어 온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비리로 대표되는 할리우드 엔터테인먼트 산업 시스템의 병폐를 고발하는 사회고발극이자, 진실을 하나의 기사에 담기까지 신중과 숙고를 거듭하는 저널리스트들의 지난한 여정을 뒤쫓는 저널리즘 영화이기도 합니다. 윤리와 도덕을 지켰기에 진실 앞에 당당했던 저널리스트들의 시선과 그들을 물심양면으로 응원하고 지원한 동료 기자들의 신뢰, 두려움을 딛고 오랫동안 침묵해 온 진실을 세상 앞에 소리 내어 외치기로 결심한 피해자들의 용기가 있었기에 더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을 만큼의 커다란 변화를 단 하나의 기사가 만들어낼 수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사회 전체에 팽배한 성범죄 문제를 취재하던 뉴욕 타임즈 탐사보도 전문기자 조디 캔터(조 카잔)는 할리우드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오랫동안 권력형 성범죄가 만연해 왔다는 정보를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할리우드를 주름잡고 있는 거물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이 있다는 것 또한 알게 되죠. 캔터는 최근 트럼프 당시 대통령 후보의 성추행 의혹을 취재한 바 있는 동료 기자 메건 투히와 함께 취재를 시작합니다. 두 사람은 1990년대 초부터 해서 와인스타인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이들을 찾아가 인터뷰를 시도하지만, 그들 중 상당수는 와인스타인으로부터 합의금을 받고 그 대가로 사건에 대해 함구하기를 강제당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때문에 피해자들과의 인터뷰를 기사에 인용하기란 요원하고,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비리 전말을 고발함은 물론 그가 자신의 범죄를 입막음하기 위해 피해자들에게 합의금을 건넸다는 사실 또한 입증해야만 합니다. 지켜보고 있다는 듯 와인스타인 측의 위협이 시시각각 다가오지만, 오랜 세월동안 여성들의 꿈을 짓밟고 기약 없는 침묵 속에서 트라우마를 뒤집어쓰게 한 병든 시스템을 고발하려는 기자들의 노력은 용감하지만 신중하게 걸음을 내딛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내딛은 걸음의 결과는 지금 온 세상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그대로고요.


<그녀가 말했다>(She Said, 2022)


영화가 주목하는 두 가지 큰 주제는 두 기자가 추적한 진실과 그 과정에서 두 기자가 추구한 정신의 의미입니다. 우선 두 기자가 추적한 진실은 단지 하비 와인스타인이라는 한 개인의 추악한 면이 아닌, 시스템 전반의 병든 민낯입니다. 하비 와인스타인은 자신이 여배우 또는 여직원들에게 저지른 가해 행위를 업무의 일환으로 규정하며 그들을 기만했습니다. 회사의 최고 경영자인 자신과 원활한 관계를 쌓기 위해서는 이런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강요했고, 이것에 대해 거부하거나 불쾌감을 느끼는 이들로 하여금 '내가 잘못한 건가'라는 죄책감과 수치심을 느끼게 만들었죠. 그리고 회사는 피해자들과 합의하고 그들에게 합의금을 건네는 과정을 약간의 오너 리스트 관리, 인력 관리 업무 정도로 여겼습니다. 피해자들의 당연한 분노와 모멸감마저도 바람직하지 못한 반응으로 만들고, 그렇게 그들을 업계 부적응자로 만들어 버리는 일련의 절차는 피해자들을 개인적으로 망가뜨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들의 장래와 커리어, 평판까지도 망쳐버리는 사회적/조직적 범죄와 다름 없었습니다. 사건을 쫓는 두 기자 역시 이 사건이 그저 자극적인 성추문으로 회자될 것이 아니라 업무 간에 일어나는 일방적 성범죄이며, 이 사건은 단지 일부일 뿐 업역을 불문하고 또 다른 하비 와인스타인이 얼마든지 존재할 것이라며 경고합니다.

그러나 고발해야 할 진실이 당장 눈 앞에 보여도 그 진실을 세상에 외치기까지는 부단한 고초가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특히 이러한 성비리 사건의 경우 피해자들의 증언이 곧 증거이기 때문에 피해자들의 증언을 수집하고 이를 증거로 제시해야만 하는데, 지우고 싶은 트라우마를 다시금 세상에 드러내게 한다는 것, 더구나 이 사건의 경우 합의라는 임의의 절차를 거친 상태에서 그 절차가 피해자에게 강요한 침묵을 깨고 증언에 나서게 한다는 것은 기자에게 대단히 조심스러운 일일 수 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증언에 나선 피해자들이 설령 법적 문제에 휘말린다고 해도 언론사에서는 그에 대한 법적 지원을 해줄 수도 없습니다. (비범한 히어로가 아닌, 프로페셔널하지만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인 두 기자의 입을 통해 영화는 제도의 한계 또한 명확히 밝힙니다.) 때문에 두 기자는 피해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발견한 진실을 수집하는 과정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피해자들의 동의를 얻고 그들의 이름과 함께 진실을 기사에 싣기까지의 과정에 세심한 노력을 기울입니다. 바다 건너에 있는 피해자를 만나기 위해 필요하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비행기 타러 가라고 아낌없이 뒷받침해주는 회사의 지원과 함께, 기자들은 오랫동안 떠안은 고통을 마음껏 이야기할 수도 없는 피해자들의 처지을 이해하고 다독이는 과정에 진심을 다합니다. 그 진심은 기자로서의 프로 정신과, 아이들을 보다 떳떳한 세상에서 살게 하고픈 어른이자 엄마로서의 마음이 더해진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녀가 말했다>(She Said, 2022)


이러한 신중하고 사려깊은 태도는 <그녀가 말했다>가 보여주는 연출 방식과 연기적 접근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영화는 주인공인 두 저널리스트의 태도에 발맞추어 피해 내용에 대한 대사가 나와도 피해 당시에 대한 직접적 묘사는 일절 하지 않고, 사건은 철저히 피해자 관점에서 서술하며, (아무리 배우의 연기라 해도) 여전히 누군가에겐 트라우마일 가해자의 얼굴은 한번도 보여주지 않습니다. 두 저널리스트 메건 투히와 조디 캔터를 연기하는 캐리 멀리건과 조 카잔은 인물 개인이 지니고 있는 일상적 고충을 투영하면서도, 개인의 과장된 감정이나 정의감에 메몰되지 않고 직업적 사명과 인간적 책임감으로 취재에 임하는 기자의 모습을 진중한 연기로 보여줍니다. 더불어 영화에는 실제 사건의 피해 당사자인 (영화 팬들은 다 알 만한) 유명 배우가 본인 역할로 출연하는데, 십수년 간 입다물길 강요당했던 진실을 할리우드 상업영화를 통해 비로소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며 조목조목 이야기하는 그 심정이 어땠을지 생각하니 새삼 마음이 동요했습니다. 이처럼 영화를 만든 이들의 노력까지 더해져, 이 영화가 과거의 추악한 사건을 자극적으로 들춰내기 위함이 아니라 목소리를 내고 그 목소리를 기록하며 세상에 진실을 알린 이들의 용기를 기록하기 위해 만들어졌음을 증명합니다.


한 편의 기사는 세상을 바꿀 수도 있지만 그 영향을 모두 감당하고 책임질 수 없기에 동시에 매우 신중해야 하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영향력을 과시하고 위세를 떨치기 위해 무분별한 타이핑과 클릭질이 범람하는 오염된 저널리즘의 바다 속에서도 영화 속 두 저널리스트는 그러한 기사의 힘과 무게와 한계를 알기에 날카로운 눈과 두려움 없는 이성, 사려 깊은 마음으로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쓰며 기사를 완성하고, 그렇게 완성된 하나의 기사는 어느 때보다도 무거운 발행 버튼을 거쳐 비로소 크고 무거운 힘을 발휘하고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이렇듯 <그녀가 말했다>는 세상을 바꿀 만큼의 힘을 보여준 저널리스트들의 투지와 세상을 바꿀 만큼의 무게가 담긴 저널리스트들의 책임, 그리고 세상을 바꿀 진실을 담은 목소리를 낸 피해자들의 용기를 함께 이야기하는 강인한 기록이자 증거로서의 영화입니다. 


<그녀가 말했다>(She Said,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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