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적인 영화리뷰 2023 - <교섭>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탈레반 한국인 납치 사건을 소재로 했고, 국내 여성 감독이 연출한 첫 100억대 대작 영화이자, 투톱으로 나선 두 배우의 임팩트까지 화제성을 일으킬 만한 요소들을 한껏 지닌 영화 <교섭>에게 무난하다는 평가가 호평만은 아닐 것입니다. 상업영화의 책임감으로 인해 논쟁적 소재를 들고 나오고도 그 소재를 정면으로 다루는 대담성보다 조심성을 택한 영화는, 그로 인해 현실성을 어느 정도 확보했을지 모르나 완전히 픽션이었다면 보여주었을 재미와 임팩트보다는 섭섭한 영화가 되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의 무장세력 탈레반이 끊임없이 납치와 테러로 세계를 두려움에 떨게 하려 노력하던 2006년, 아프간을 찾은 일련의 한국인 23명이 탈레반에 의해 납치되었다는 소식이 찾아듭니다. 가장 먼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한 곳은 외교통상부. 전문교섭관 재호(황정민)을 필두로 한 국제 협상 전문가들은 즉시 아프간으로 향해 인질들을 구출한 계획을 세웁니다. 협상은 전문이지만 아프간은 처음인 재호와 공무원들이 난항을 겪던 중, 오랜 기간 아프간에서 활동해 온 국정원 요원 대식(현빈)은 현지 유일의 한국인 통역사 카심(강기영)을 대동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인질 구출 미션에 뛰어듭니다. 소속도 방식도 입장도 다른 두 사람은 시작부터 부딪치지만 일단은 공동의 목표가 있으니 힘을 합치기로 하는데요, 문제는 그들이 구하려는 인질들이 떳떳하게 구출을 외칠 수 있는, 무조건적 응원을 받을 수 있는 이들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로 인해 직면하는 뜻밖의 난관을 비롯해, 그들의 교섭 과정에는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연이어 발생하며 상황을 위태롭게 합니다.
혼란의 국제 정세 속에서 무고한 사람들이 테러 조직의 위협을 받고, 국가적 또는 인간적 사명을 띤 인물들이 그들을 구출한다는 내용은 익숙한 만큼 스릴과 쾌감을 선사하기에도 적당한 이야기입니다. 관객이 그 구출 작전에 대해 온전히 몰입할 수만 있다면 말이죠. 그런 점에서 <교섭>은 일단 한 가지 핸디캡을 안게 되니, 관객이 인질 구출에 대한 당위성에 쉽게 몰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영화가 모티브로 삼은 2007년 한 교회 선교단의 탈레반 납치 사건은 관광지도 없을 뿐더러 여행금지 국가로 규정한 곳에 기어코 간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 국가가 겪어야 했던 갖은 난관들을 국민들이 지켜보게 되면서 지우기 힘든 인상을 남겼습니다. 납치된 이들은 구출에 대한 절박한 염원 이전에 '가지 말라는 곳에 공연히 갔다가 애먼 사람들을 고생하게 한 사람들'이라는 인상을 얻었죠. 물론 그런 사람들이 대상이라고 해도 탈레반의 만행이 인륜을 저버리는 행위임은 틀림없기 때문인지, 영화는 납치된 인질들의 정체성에서 발생하는 논쟁을 다루는 것은 피하고 '그들을 구해야 한다'는 명백히 당연한 과제를 추적하는 데 집중합니다. 그런 만큼 인질들의 상황에 대한 묘사는 최소화하고, 그들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는 외교통상부와 국정원 사람들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죠.
영화의 이러한 스탠스는 어쩌면 '구하고 싶은 이들'이라기보다 '구해야 하는 이들'을 위해 자신들의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극한직업' 공무원들의 애환을 그리기에 적합할 수도 있습니다. 일방적인 카타르시스보다 복잡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면서 말이죠. 내키는 미션만 수행할 순 없는, 여느 영화처럼 하나의 사건이 해결된다고 엔딩을 보거나 즉각적 보상을 얻을 수 없는 게 일이라는 현실을 곱씹고, 구해야 하는 사람들의 정체성을 생각하면 불편과 짜증이 일어나지만, 그래도 이게 그들의 일이고 사람 목숨은 살려야 하니 어쩌냐 탄식하면서요. 그렇다면 영화는 순전히 직업 정신으로 이 위험천만한 일에 전력을 다하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비뚤어진 신념으로 치르지 않았어도 될 희생을 치르게 한 당시 사건에 대한 우회적인 비판이 될 수도 있었겠습니다만 아쉽게도 그 정도에 이르진 못했습니다. 영화는 중간중간 그 곤란한 상황을 명백히 언급하기도 하고 그로 인해 꼬이는 상황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언급은 그저 인물들의 입에서 나왔다는 데 의의를 두는 정도로 지나가는 말이 되고 상황은 긴장감을 배가시키는 장르적 용도로만 쓰입니다. 이 사건의 의미와 여파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접근은 아예 배제되고, 그 자리에는 무난히 연출된 외교 첩보 액션물이 남은 것이죠. 실화를 종종 소재로 삼으며 우리 사회의 다양한 현상과 인간상을 담백하게 들여다 봐 온 임순례 감독의 영화라 이 정도의 무난함도 아쉬웠습니다.
이런 제약 속에서 배우들은 강한 인상을 남기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던 와중에도 영화의 중심을 잡아주었습니다. 외교통상부의 전문교섭관 재호 역의 황정민 배우는 역할에 걸맞게 감정과 행동보다는 이성과 논리로 상황을 돌파해 나가려는 인물의 고뇌와 결단을 강인하게 그려내며 영화의 축을 단단하게 형성하였습니다. 영화는 제목에 걸맞게 클라이맥스를 액션을 동반한 화려한 눈요기가 아닌 인물과 인물의 대면 협상으로 장식하는데, 말 한마디에 상황이 완전히 뒤바뀔 수 있는 위험천만한 상황 속에서 책임감을 바탕삼아 불안을 뚫고 나오는 대범함을 설득력 있게 보여줍니다. 한편 국정원 현지 요원 대식 역의 현빈 배우는 황정민 배우가 미처 보여줄 수 없는 액션과 감정 부분을 충실히 소화합니다. 영화에서 많지 않는 액션 장면들에서 예의 활약을 보여주는 한편, 대식의 개인사에 깃든 우수어린 감정도 만족스럽게 표현하죠. 한편 통역사 카심 역의 강기영 배우는 적정 수준의 유머 코드로 극에 부드러움을 더하는 한편, 통역사라는 역할에 걸맞게 말이 오가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긴장감을 증폭시키는 역할도 수행하며 황정민-현빈 배우 사이에서 좋은 균형추 역할을 합니다.
임순례 감독은 언뜻 상업영화와 거리가 멀어 보여도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제보자>, <리틀 포레스트> 등 흥행에 성공한 여러 상업영화들에서 공통적으로 보여온 미덕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리고자 하는 것에 대한 뚝심이었습니다. 그것이 스포츠든 사회 고발이든 음식이든, 굳이 불필요한 자극을 동반하지 않아도 집요하고도 또렷하고 정갈하게 그리는 솜씨가 돋보였죠. <교섭> 역시 볼거리에 대한 불필요한 집착 대신 협상 과정의 긴장감을 놓치지 않고 그리는 뚝심을 충분히 보여주었습니다. 다만 이번 영화의 경우는 그 협상의 배경이 되는 사건과의 충분한 조응이 있었다면 관객 또한 그 뚝심으로 인한 극적 쾌감을 명확히 느꼈을텐데, 협상과 조응할 만한 사건의 존재감이 논쟁적 요소로 인해 거의 사라지다시피 하며 감독의 연출 뚝심도 희미해지게 된 듯 해 아쉬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