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적인 영화리뷰 2023 - <애프터썬>
올해 아카데미 레이스에서 눈 여겨 볼 만한 또 한편의 작품인 영국 영화 <애프터썬>은 주연 배우 폴 메스칼의 눈부신 연기와 샬롯 웰스 감독의 강렬한 데뷔로 주목받았지만, 하는 이야기는 사실 지극히 사소합니다. 감독의 자전적인 경험이 바탕이긴 하지만 한 성인 여성이 20여년 전 어린 시절 아빠와 함께 떠났던 여행의 추억을 꺼내 보는 내용일 따름이죠. 하지만 추억이란 당장에 겪을 때보다 지나고 난 뒤 시간과 경험이 두텁게 쌓인 지금에 와서 더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는 걸 우리는 누구나 다 알고 있고, 이 영화도 마찬가지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 물려준 시선을 거쳐서, 영화가 보여주는 며칠간의 짧은 추억에는 제때 알지 못했고 꼭 뒤늦게 깨닫고야 마는 삶의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소피(실리아 롤슨-홀)가 열어 본 오래된 캠코더에는 20여년 전 아빠 캘럼(폴 메스칼)과 떠난 튀르키예 여행의 추억이 담겨 있습니다. 다른 영국인 관광객들과 함께 도착한 리조트에서 소피와 아빠는 둘만의 기억에 남아있는 친밀한 시간들을 얼마나 오래 나누었는지. 소피가 어릴 때 아빠와 엄마는 헤어졌기에, 어린 소피(프랭키 코리오)에게는 다만 며칠이라도 내내 아빠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소중했습니다. 튀르키예의 여름 햇살처럼 따사롭게 남아 있는 그 시간에서, 소피는 아빠와 이국적인 여행지에서의 잊지 못할 체험을 즐기기도 하고 그동안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며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새롭게 만난 언니 오빠들과 이전에는 몰랐던 세상의 새로운 면들을 알아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영상 속 아빠 또래의 어른이 된 지금, 소피에게는 그 여름의 나보다도 아빠가 어떘을지 보이기 시작하고 깨닫기 시작합니다. 영상 속에 펼쳐지는 추억의 조각들은 소피의 회상 속에서 온전한 추억의 파노라마로 되살아나고, 소피는 그 속에서 언제나 곁에 있었지만 실은 조용히 웅크린 채 숨어 있었던 아빠의 모습을 찾아 나섭니다.
어느 부녀의 여행기록이 이야기의 대부분인 <애프터썬>을 보고 많은 관객들을 놀라게 할 것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이토록 유별날 것 없는 평온한 여행의 추억이 영화 한 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고, 둘쨰는 그 평온한 추억이 주는 대단한 감동입니다. 선연한 추억의 순간은 때로 '무엇을 했는가'보다 '누구와 어떤 마음을 나누었는가'로 채워지는데, 이 영화는 그 감흥을 무척 잘 살려냅니다. 영화가 그리는 소피와 아빠의 여름날 추억 대부분은 이색적인 여행지에서의 특별한 이벤트보다 아빠와 딸이 같은 하늘과 햇살을 함께 여유롭게 나누던 시간, 일상의 공간에서는 머뭇거렸을 이야기들을 털어놓으며 마음을 나누던 시간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기승전결이 명확하지 않아도, 호흡이 길어진다 해도 영화는 소피와 아빠가 나누는 시간 앞에 섣불리 가위질할 엄두를 내지 않습니다. 그렇게 소중한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는 순간의 촉감을 영화는 오롯이 살리고, 이내 관객 또한 깨닫습니다. 짜릿하고 드라마틱한 경험만이 아니라 소중한 사람과 보고 듣고 닿는 모든 것들을 공유하는 귀한 시간들로 채워질 수 있는 여행의 가치를 말이죠. 이렇게 되살아나는 여행의 추억 속 잊지 못할 장면들 속에서 길어올리는 진실은 그때 분명 존재했지만 알아차지 못했던 가족의 마음입니다.
11살의 소피에게 그 무렵의 튀르키예는 다 큰 언니 오빠들, 처음 만나는 또래 친구들과 교류하면서 펼쳐지는 새로운 세상입니다. 전에 듣거나 보지 못한 세상의 새로운 모습들을 만나고 직접 경험도 해 보면서, 소피는 아마 이제 세상을 비로소 알아간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런 매혹에 워낙 눈부셨을 것이기에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해도 아빠의 모습이 어땠을지는 눈여겨 들여다 볼 겨를도 시야도 없었겠죠. 하지만 다시 본 영상으로부터 되살아나는 아빠는 당장의 미래마저 안갯속이라 불안하고 초조할 수 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같이 산다 해도 아이가 어른의 마음을 헤아리기란 쉽지 않을텐데 떨어져 산다면 오죽할까요. 아빠와 엄마의 이혼으로
아빠와는 떨어져 살고 있는 소피에게 남아 있는 아빠의 모습은 다른 것들은 불확실한 채 오직 자신을 향한 사랑만이 또렷할지 모릅니다. 오랜만에 만난 딸에게 아빠는 사랑만을 주는 아빠의 모습으로 남길 원하지만, 딸에게 더 특별한 시간을 만들어주려 해도 여유롭지 않은 여건이, 때때로 현실이 덜컥 비집고 들어오기 좋게 번잡한 마음이 언뜻언뜻 비치고 아빠는 이런 여의치 않은 현실에 딸에게 미안해집니다. 아빠가 애써 감추려 노력했기에 그때 소피가 그런 아빠의 모습을 몰랐다고 해서 잘못한 일도 아닐 것이고, 때문에 어른이 된 소피가 지금에서야 그런 아빠의 모습을 알았다고 해서 후회하고 자책할 일도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 그 튀르키예에서의 추억은 해사한 햇살 한껏 머금은 얼굴로 따스하게 남아 있습니다. 햇살은 포근하고 공기는 여유로운 튀르키예의 여름 안에서, 아빠와 딸은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될 팍팍한 현실을 다만 며칠이라도 미뤄둔 채 시간을 공유하고 마음을 주고 받으며 지금을 원없이 누리기로 했으니 말이죠. 여행의 매 순간을 담은 아빠의 캠코더는 어쩌면 모든 것이 불안하고 내 미래마저 알 수 없어도 너를 사랑한다는 아빠의 눈동자였을지 모릅니다.
<애프터썬>은 이 부녀의 사연이 실은 어떻고 그때 각자의 처지가 이랬고 지금 각자의 상황은 저렇고 하는 자초지종을 설명하길 생략합니다. 그저 진실한 대화와 마음으로 채워진 그 여름의 나날을 애틋하면서도 선명하게 그리는 데 집중할 따름이고, 실제로 이들 각자가 처한 처지는 이런저런 단서들을 통해 짐작만 해볼 뿐입니다. 대신 그 여백들은 영화를 보는 우리들의 것으로 채울 수 있죠. 소피와 아빠의 이야기처럼 우리들 각자가 품고 있는, 뒤돌아보면 즐거운 시간보다 더 많은 사연들이 있었떤 추억의 이야기들이 덧입혀지고, 그렇게 영화는 감독의 개인적 경험에 기반한 이야기에서 출발해 사랑하는 이들을 아끼고 이해하려 노력하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나아갑니다. 아빠 캘럼 역의 폴 메스칼과 딸 소피 역의 프랭키 코리오는 그 보편적인 추억의 그림을 너무나 유려하게 그려내며 넓고 깊은 감동을 줍니다. 영화적인 카리스마를 뿜어낼 수 없는 그들의 연기는 당연히 강렬함과 거리가 멀지만, 고개 돌리면 다시 깨닫는 저릿한 현실을 모르는 바 아님에도 당장 눈앞에 있는 소중한 사람에게 자신의 온 마음을 쏟아주려는 인간의 체온을 고스란히 느끼게 해 큰 울림을 줍니다. 실제로 촬영 전 오랜 시간 함께 보내며 친밀감을 쌓았다는 후일담에 걸맞게, 폴 메스칼과 프랭키 코리오는 각자의 내면은 물론 두 사람 사이 교감에서 느껴지는 세세한 결과 온기까지 그려내며 더없이 귀중한 호흡을 보여줍니다.
<애프터썬>은 우리에게 온전히 사랑해도 온전히 헤아리진 못했던 소중한 이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되짚어 보게 합니다. 너무 일찍 세상을 알게 된다고 믿는 어린 시절을 지나 아직도 세상을 모르겠는 어른이 되어갈 때에야 우리 곁의 많은 이들이 그러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늘 제때 찾아오지 않고 지나온 뒤에야 한 박자 늦게 등 뒤에서 우리를 툭툭 두드리며 찾아옵니다. 세월을 끼얹은 듯 흐릿하고 지직거리는 영상 너머로 선명하게 되살아나는 소피의 추억처럼, 그런 뒤늦은 깨달음 덕분에 추억이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으로 빛바래지 않고 더 알고 배우게 되는 것으로 다시 유효해진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런 일일까요. 그렇게 그때는 무심코 지나친 마음이 세월을 건너와서는 뿌연 화질을 하고도 선연하게 우리가 살아온 시간을 채웁니다. 누구나 품고 있는 그 아린 부분을 건드리는 통에 보고 나면 계속 생각나고 누군가는 눈물지을 <애프터썬>은 벌써 나온 올해의 영화 중 한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