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적인 영화리뷰 2023 - <바빌론>
전작들을 통해 짧은 경력만에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데이미언 셔젤 감독이 4년 만에 내놓은 대형 신작 <바빌론>은, 그가 지금껏 내놓은 어떤 영화들보다도 표현과 메시지 면에서 어떤 성역도 생각지 않은 장대한 야심을 품고 있습니다. 그 선을 넘나드는 야심이 영화에 대한 호불호로 이어질 수도 있겠습니다만, 개인적으로는 그 '고자극성'의 야심이 자극을 위한 자극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영화를 향한 사랑'이라는 명확한 정서적 메시지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했습니다. 처음엔 이게 어떻게 '사랑하는 영화'에게 보내는 메시지일 수 있는가 싶던 것이 끝내는 '이게 사랑이 아니면 무엇인가'로 귀결된달까요.
때는 1926년의 할리우드. 영화라는 창작물은 세계에 지금껏 헤아리지 못한 규모의 부를 가져다 주며 거대한 산업을 만들어냈고, 신이나 지도자가 아니고도 세계의 사람들이 우러러 마지않는 '스타'라는 존재를 만들어내며 엔터테인먼트 자본의 위용을 과시했습니다. 사람들의 환상을 고스란히 스크린을 통해 보여주는 이 마법 같은 일에는 그 어떤 제약도 금기도 없었고, 따라서 이 산업을 통해 부와 권력을 얻은 사람들은 무엇도 거리낄 것 없이 욕망하는 바에 탐닉할 자유를 누렸습니다. 영화계의 거물 제작자가 주최하는 한 파티에서도 그런 거대한 환락의 현장이 펼쳐지는 가운데, 두 남녀가 처음 만납니다. 톱배우를 꿈꾸는, 아니 자신은 이미 타고난 톱배우라 믿는 빈민가 출신의 넬리 라로이(마고 로비)와 영화를 통해 의미 있는 자취를 세상에 남기고픈 멕시코 출신 청년 매니(디에고 칼바)는 각자의 꿈을 공유하며 성공한 미래를 약속합니다. 다행히 두 사람은 천운을 얻어, 넬리는 약에 취해 촬영장에 오지 못하게 된 신인 배우를 대신해 영화 현장에 들어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매니는 톱배우 잭 콘래드(브래드 피트)의 즉석 제안으로 대작 촬영장에 갔다가 난처한 상황을 해결하며 역량을 인정 받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 앞에는 반짝이는 성공의 레드카펫만이 깔려 있을 줄 알았지만, 유성영화 시대의 도래는 전대미문의 변화였습니다. 유례없이 쌓아올려져 그 어떤 흐름도 예측할 수 없는 출세의 모래성 위에 선 그들에게 이 격변은 예기치 못한 소용돌이를 몰고 옵니다.
데이미언 셔젤 감독은 자신의 전작들을 통해 꾸준히 '꿈꾸는 사람'에 대한 뚜렷한 주관을 피력해 왔습니다. 그것은 '꿈은 우리에게 큰 희생을 강요할 수 있지만, 꿈이 없다면 우리는 죽을 것이다'라는 이야기였죠. 그의 출세작인 <위플래쉬> 때는 그래서 이게 주인공이 성공한다는 건가 타락한다는 건가 의아했지만, <라라랜드>부터는 이런 감독의 주관을 이해하게 되었고 따라서 그의 영화에는 열정이라는 불변의 가치와 희비극이 공존하게 되었습니다. 꿈꾸는 인간과 그렇게 인간을 꿈꾸게 하는 어떤 세계의 숭고함을 함께 말해 온 감독이 이번에는 <바빌론>으로 할리우드에 집중합니다. 전작 <라라랜드>와 좀 더 변별력을 두자면 <바빌론>은 할리우드의 초기 역사, 심지어 꽤나 부끄러운 역사에 집중하죠. 영화는 역사상 처음으로 겪는 극적인 부흥을 등에 업고 그 어떤 윤리나 도덕도 거리낄 것 없었던 1920년대 할리우드의 민낯을 사람에 따라서 꽤나 당혹스러울 첫 시퀀스에서부터 드러내며 '꿈의 공장'의 일원이 된 사람들이 치르게 될 그 꿈의 대가를 톡톡히 벼릅니다. 매우 현란하고 화려한 한편 몹시 난잡한 파티 현장의 세세한 묘사는 관점에 따라 불쾌한 과잉 아니냐는 평가를 받을 소지도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그처럼 농후한 호불호의 가능성을 감수하고서 영화가 보여주려 하는 것은 유례 없는 마법을 보여주었던 당대 영화계가, 마치 인간계를 넘어선 마법 세계가 그러하듯 인간다운 윤리와 도덕률을 아득히 넘어선 채 쾌락에 탐닉하던 실상 그 자체입니다. 이후 펼쳐지는, 첨단 기술이나 노동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시대에야 가능한 기상천외한 촬영 현장의 '살풍경'은 앞서 목격한 파티 현장 못지 않은 혼돈의 기운을 뿜어내지만 그 뒤 눈앞에 나타나는 결과물에는 감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이 마법이라 해도, 그 마법이 만들어지는 세계의 뒷면은 진흙탕이라는 걸 <바빌론>은 부정하지 않는 것이죠.
지금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가치들이 아예 무시되며 흥행과 성공만을 좇는 당대 할리우드 영화 산업의 단면은 너무 부조리해서 웃음까지 납니다. 한편으로는 당시이기에 나타날 수 있는 고유한 풍경들을 규모감 있게 그리다 보니 흥미로운 장면들로 가득하기도 하죠. 무성영화이기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자막 작업, 한 공간 안에서 갖가지 장르 영화가 동시에 촬영되고 있는 광경, 어떤 안전장치나 특수효과도 마련되어 있지 않기에 진짜 목숨을 걸어야 하는 대규모 전투 장면 촬영과 그 속에서 일어나는 살벌한 돌발 상황들, 유성영화가 처음 도입되면서 촬영 현장에서 나타나는 뜻밖의 고난 등 <바빌론>은 중대한 변화를 겪던 당대 할리우드를 속속들이 들여다봅니다. 풍경을 본다면 짧은 시간에 이토록 극적인 변화를 겪은 산업도 드물었기에 흥미로운 요소가 산재해 있지만, 사람만 본다면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꿈의 공장' 속 꿈꾸는 사람들은 그 대쪽 같은 꿈만큼이나 굳은 심지를 가지게 마련이었고, 그 심지는 때로 휘지 못하고 꺾이게 마련이었습니다. 영화 초반의 난잡한 파티가 보여주듯 볼 꼴 못 볼 꼴 다 보며 성공의 맛을 누리던 무성영화 시대에 있던 그 무렵의 할리우드가, 융성하는 산업의 후광이 더렵혀질까 못 볼 꼴은 뒤켠에 욱여놓고 볼 꼴만 좇는 유성영화 시대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고꾸라지는 꿈들이 생겨납니다. 스타의 기질을 유감업이 뽐내며 세상을 호령할 것 같던 이들이 그 기질 그대로 거세게 추락하는 과정은 분명 비극적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는 그 추락의 비극마저도 역사에 남을 예술 작품에 고이 담으며 '영원히 반짝이는 순간'들을 만들어 냅니다. 수많은 꿈들이 피고 지는 영욕의 세월마저도 눈부신 희비극의 장관으로 그려내는 영화란 예술을 향한 경의가 그렇게 꽃을 피웁니다. 이처럼 데이미언 셔젤 감독은 전작에서도 그러했듯, 개인의 비극과 꿈의 영광을 교차시키며 할리우드를 향한 솔직한 애정을 표합니다.
대담한 필치의 스토리 구축만큼이나 연기 디렉팅에도 거침없는 감독답게, <바빌론>의 배우들은 혼신의 연기를 펼칩니다. 크레딧 상으로는 잭 콘래드 역의 브래드 피트가 가장 먼저 나오지만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배우는 넬리 라로이 역의 마고 로비입니다. 거침없는 첫 등장부터 해서 드라마틱한 성공과 좌절을 겪으며 한편으론 그 스스로가 당대 할리우드가 맞이한 격변의 아이콘이 되는 여인의 성공을 향한 대담한 야망, 영화를 향한 절실한 꿈, 위선적인 세상 앞에 굽힐 수 없는 본성을 입체적이고도 힘있게 그려냅니다. 한편 이 세계의 일원이자 상대적으로 관찰자 입장이기도 한 매니 역의 디에고 칼바는 뉴페이스로서 극에 신선한 활력을 불어넣습니다. 세상에 의미 있는 족적을 남기기 위해 치열하게 탐색하는 동시에 산업의 부흥과 개인의 부침을 모두 지켜보는 이의 성찰 또한 보여주죠. 당대가 인정하는 슈퍼스타 잭 콘래드 역의 브래드 피트는 그 시대에서 걸어나온 듯한 배포와 카리스마로 역시 실망시키지 않는 열연을 펼칩니다. 타고난 스타의 아우라를 힘들이지 않고서 한껏 뿜어내면서도 변화하는 세상 앞에서 고뇌하는 내면 또한 무게감 있게 보여줍니다. 여기에 촌철살인의 말과 글로 시대를 요약하는 평론가 엘리노어 세인트 존 역의 진 스마트, 뜻밖의 순간에 나타나 매서운 존재감을 발휘하는 토비 맥과이어 등 휘황찬란한 할리우드의 황금기에 방점을 찍는 배우들의 연기가 곳곳에서 빛을 발합니다. 또한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영화에서 빠질 수 없는 음악감독 저스틴 허위츠의 풍미 가득한 재즈 선율이 이번에도 영화를 가득 채우는데, 특히 트럼펫 연주자 시드니(조반 아데포)를 중심으로 한 의미 깊은 에피소드도 만들어내며 시대의 또 다른 한 풍경을 장식합니다. (공교롭게도 영화 사상 최초의 유성 영화 역시 <재즈 싱어>이고, 영화 속에서 주요한 소재로 등장합니다.)
영화의 제목인 '바빌론'은 기원전 약 1500년간 번성했던 도시로, 성경에서는 탐욕과 죄악으로 가득하여 신의 저주를 받았던 곳으로 표현됩니다. <바빌론>이 보여주는 당대의 할리우드도 마찬가지로 범람하는 욕망을 주체하지 못해 어딘가는 무너지고 누군가는 타락하는 곳입니다. 영화는 감독의 필모그래피 사상 가장 차고 넘치는 표현력으로 그 붕괴와 타락의 면면을 보여주면서도, 그렇게 상처입은 세계가 남긴 눈부신 자취들을 되새기며 영화를 향한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 사랑을 고백합니다. 사랑고백에 사랑의 이유가 채워져 있다면 그저 예쁘고 사랑스럽겠지만, 이유조차 설명되지 않는다면 그 감흥은 훨씬 복잡할 것입니다. 마침내 <바빌론>이 영화를 향한 사랑을 털어놓는 결말부에 이르면, 그 복잡한 감흥에 쉬이 들뜰 수도 가라앉을 수도 없는 여운에 잠길 것입니다. 이처럼 <바빌론>은 우리에게 영화인의 흥망성쇠에 관한 비가이자 영화에 관한 찬가가 함께 담긴, 불가항력적 사랑을 말하는 러브레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