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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만 Feb 04. 2023

거미는 사라져도 거미줄은 사라지지 않는다

인상적인 영화리뷰 2023 - <성스러운 거미>

<성스러운 거미>(Holy Spider, 2022)


전작 <경계선>에서 낯설고 충격적인 이미지로 잊기 힘든 임팩트를 남겼던 알리 아바시 감독의 신작인 <성스러운 거미>는 전작과 정반대로 실화 기반의 하이퍼리얼리즘 영화를 표방하지만, 그 충격은 전작에 못지 않거나 어쩌면 그 이상일 것입니다. 20여년 전에 일어난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지만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전혀 달라진 것 없는 현실을 정면으로 투사하는 이 영화는, 사회 분위기를 타고 하나의 현상처럼 되어버린 한 살인사건을 추적하며 결국 하나의 사건을 종결해도 끝나지 않는 아득한 폭력을 상기시킵니다. 그리고 세상의 절반을 향해 있는 그 폭력은 누구에게도 결코 남일이 아니며, 지속 가능한 세상을 위해 영원히 경계해야 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여성 기자 라히미(자흐라 아미르 에브라히미)가 어떤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이란 제2의 도시이자 최대의 종교도시인 마슈하드에 옵니다. 그녀가 추적하는 사건은 이른바 '거미 살인마'라 불리는 자에 의해 벌어지고 있는 성매매 여성 연쇄살인 사건입니다. 희생자들은 자신이 얼굴에 메고 있던 차도르에 목이 졸린 채 사망했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범인은 대담하게도 매 살인을 일으킨 뒤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사체 유기 장소까지 알리며 자신의 범행을 대대적으로 알리라고 도발합니다. 워낙 신출귀몰해서 잡을 수 없다고 해 범인에게는 '거미 살인마'라는 별명이 붙여졌지만, 라히미가 보기엔 영 탐탁지 않은 구석이 있습니다. 조금만 파고들면 충분히 추적할 여지가 있는데 범인 잡기가 오리무중이라니 못 잡는 건지 안 잡는 건지 정부의 태도가 미온적인 것 같단 말이죠. 게다가 다른 한편에서는 거미 살인마를 '부정한 여자들을 처단하는 정의로운 순교자'로 치켜세우는 여론까지 조성되기 시작합니다. 이걸 모르는 바 아닌 살인마는 자신의 살인을 '사회 정화 사명'이라 여기며 또 다른 한밤의 살인을 준비합니다. 그는 낮에는 아내와 아들딸을 둔 평범한 건축업자 가장의 모습을 하다가 밤이 되면 '사냥감'을 찾아 거리로 나서고, 라히미는 범인의 실체에 다가가기 위해 홀로 목숨을 건 위험한 접근을 시도합니다.


<성스러운 거미>(Holy Spider, 2022)


시놉시스에서도 알 수 있듯 영화 제목에 들어 있는 '거미'는 영화 속 살인마는 물론 2001년 일어난 실제 사건의 범인에게도 붙여진 별명입니다. 여기에 '성스러운'이란 형용사가 붙은 건 살인마가 자신의 살인을 '악과 부정'에 맞선 '성전'이라 정의하고, 사회 일부가 이에 호응하기 때문입니다. 끔찍한 연쇄살인과 이를 쫓는 이의 이야기는 '양들의 침묵' 류의 미스터리 스릴러를 연상시키기도 하는 전개이지만, <성스러운 거미>는 범인의 정체와 단죄 여부보다도 그런 살인마를 품은 세계가 어떤 곳인가에 더 주목합니다. 여성이 차도르를 벗고 맨머리를 드러내며 다니면 주변 사람들이 쳐다보고, 미혼 여성이 혼자 호텔을 예약하는 걸 허락하지 않는 이 도시의 모습은 과히 여성에게 호의적이지 않은데, 게다가 이 살인사건의 타겟은 오로지 성매매 여성입니다.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빈민층의 실태나 여성의 희생을 강요하며 일부 남성들이 자신들의 성욕을 음지에서 해소하는 현실은 아랑곳않고서, 부정한 행위들의 책임은 모조리 여성의 몫으로 돌아가는 통에 이 혐오에 찬 폭력은 심지어 떳떳한 목소리를 타고 정당성을 부여받기까지 합니다. 영화는 일상에서 그저 '동네 아저씨'같은 모습을 한 살인마의 정체를 초반부터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그리고는 그가 사명감(이라 대변하지만 실은 그저 피해망상과 열등감인 감정)에 가득찬 태도로 저지르는 살인행각을 건조하게 따라가는데, 이를 통해 그의 살인 행위만큼이나 그 행위에 정의감을 불어넣는 사회의 공기 또한 얼마나 끔찍한지를 고발합니다. 살인마의 살인 행각을 배제하고 살인마의 태도나 그 사건에 대해 주변 사람들이 취하는 일부 리액션만 본다면 이는 마치 평범한 사람들은 엄두 낼 수 없는 대담한 용기로 남몰래 정의를 실현하는 '스파이더맨' 같은 영웅의 무용담으로 보일 지경입니다. 그러나 혐오와 폭력을 '보수', '전통'이라 여기며 고집스럽게 서 있는 이 도시 속 이 살인마는 '거미 인간'이 아니라 그저 '거미'일 뿐입니다.


거미를 잡는다고 그 거미가 쳐놓은 거미줄들까지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이처럼 <성스러운 거미>는 극악무도한 살인마를 잡는다 한들 여전히 팽배해 있는 성차별, 여성혐오의 시선으로 인해 세상의 위험은 쉬이 걷히지 않는다는 걸 암담하게 인식시킵니다. (영화의 제목과 함께 걸리는 마슈하드 도시의 야경이 마치 거미줄을 연상케 하는 모습을 하고 있는 건 의미심장합니다.) 물론 이곳에는 라히미와 같이 현실을 의심하고 추적을 멈추지 않는 사람도 있고, 라히미와 함께 하는 동료 남성 기자처럼 부족해도 차차 깨달아가는 사람도 있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여성을 향한 혐오와 차별을 기본값으로 알고 누리거나 순응하며 살아갑니다. 지극히 평범한 남편이자 아빠처럼 보이는 살인마의 얼굴부터 해서 그의 살인에 어느 정도 수긍하는 사람들의 모습까지, 혐오와 폭력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악의나 폭력적 기운이 쉽게 보이지 않는 이웃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마저 마치 종교적 섭리인양 당연시하는 사회 분위기가 실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조목조목 보여주는 결말부에 이르면, 이렇게 일상화된 혐오와 당연시되는 폭력이 바로 사회에 남아있는 거미줄이며 이 거미줄에는 언제라도 누구라도 걸릴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성스러운 거미>(Holy Spider, 2022)


이란의 여성 인권에 대해 목소리를 냈다는 이유로 카타르 월드컵 이란 국가대표 선수들에게 다름아닌 정부가 귀국 후 처벌을 공언한 것처럼, <성스러운 거미>를 만드는 과정 또한 쉽지 않았을텐데도 감독의 단호한 연출과 배우들의 치밀한 연기가 좋은 영화를 완성시켰습니다. 알리 아바시 감독은 살인사건을 소재로 쓰면서도 범인에 의해 파괴되어 가는 희생자의 모습에 주목하는 대신, 자신의 행위를 통해 쾌감인지 성취감인지 모를 어떤 희열을 느끼는 범인의 표정에 주목함으로써 오히려 사건의 흉악함을 두드러지게 합니다. 한편 영화의 캐스팅 디렉터 등 스태프 일을 겸하며 주인공 라히미 역을 연기한 자흐라 아미르 에브라히미는 진실을 향한 집념과 드높은 현실 앞에서 느끼는 불안감을 함께 표현하며 무겁고 어두울 수 밖에 없는 극을 힘있게 이끌어 갑니다. 살인마 사이드를 연기한 메흐디 바제스타니 역시 평범한 가장의 얼굴 뒤에 내재된 일상화된 혐오와 잠재적 폭력성을 섬뜩하게 그려냈습니다. (칸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 타이틀이 워낙 커서 그렇지, 이 배우도 이 영화로 스톡홀름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


<성스러운 거미>는 조금만 검색하면 찾아볼 수 있는 사건의 자초지종을 보여줌으로써 문제의 해결 과정을 말하려 하지 않습니다.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얼얼함을 안기는 마지막 장면까지 보고 나면 오히려 초반 사건이 일어날 때보다 더 마음이 막막해집니다. 아마도 이 이야기가 보여주는 것은 어떤 싸움의 끝이 아니라, 지난하기 짝이 없는 싸움의 일부이면서 어쩌면 시작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종교에 의지해 뿌리깊게 지속되어 온 혐오와 폭력을 끝내는 싸움은 하나의 사건으로, 한 편의 영화로 끝낼 수 없을테니까요. 공개된 후 감독과 배우가 고소와 살해 협박을 받았다는 이 영화 역시 그 지난한 싸움의 일부일 것입니다.


<성스러운 거미>(Holy Spide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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