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내가 나라는 존재를 인지한 나이가 5살이었다.
그때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연세가 많으셨다.
아버지께서 조부모님의 늦둥이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11년생이셨고,
할머니는 15년생이셨으니
내가 나이를 인지할 때쯤 두 분은 이미 70대 셨다.
지금이야 70대는 한창이라고 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오래 사셨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어린 마음에 연세가 많으신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셔서 자랑스럽고 든든했다.
주변 친구들의 조부모님보다 나의 조부모님의 연세가 조금 더 많았는데,
우리나라 나이 문화 때문에 두 분이 다른 할아버지 할머니보다 연장자 시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 같다.
두 분께는 총 5명의 친손주가 있었다.
그중 3명은 큰 아버지의 자녀들이다.
나랑 띠동갑 이상 차이 났고 서울에 있다 보니
명절 때가 아니면 거의 오지 않았다.
적적해하실 두 분을 위해서 어머니는
나랑 내 동생을 1~2주에 한 번씩 주말마다 조부모님 댁에 데려가셨다.
씩씩이가?
할머니 할아버지가 나를 부르시는 소리다.
조부모님 댁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나면
어김없이 들리는 소리다.
나를 부르시는 소리가 들린 후 방문이 열린다.
언제나 한결같이 환하게 웃으시며 나를 반겨주셨다.
내가 씩씩이 인 이유는 아주 명료하다.
씩씩하고 건강하게 태어났기 때문이다.
나는 4.5kg으로 태어났다.(불효자다ㅠ)
내가 태어난 병원에서 그해 우량아 TOP 5였다고 하니
얼마나 튼튼하고 건강했을까 싶다.
내 성격도 당돌하고 씩씩했다고 한다.
그래서 조부모님부터 친척,
내 부모님도 어릴 적엔 나를 씩씩이가 부르셨다.
아, 내 어릴 적 한동네 형들은 아직도 나를 씩씩이라 부른다.
조부모님 댁에 가면 항상 하는 것들이 있다.
사직운동장 앞에서 자전거 타기,
성지곡 어린이 대공원이나 금강공원 가서 놀이 기구 타기다.
우리 때는 스마트폰도 없었고,
티브이 채널도 많이 없어서 놀게 많지 않았다.(말하고 나니 내가 너무 옛날 사람이네ㅠ)
암튼 한창 놀기 좋아할 나이의 남자아이가 씩씩하기까지 했으니
얼마나 에너지가 넘쳤을까 싶다.
거기에 왕성한 호기심으로 질문을 좀 많았다.
나와 내 동생을 오롯이 혼자서 케어하신 할아버지가 정말 대단하셨다 싶다.
어릴 적부터 나는 닭을 참 좋아했다.
아, 퍽퍽 살 빼고 목, 날개, 다리 살만. ^^ 그
때는 양념치킨이라는 것이 생긴 지 얼마 안 되었고,
브랜드도 몇 개 없었다.
멕시칸, 처갓집, 페리카나 정도였다.
어린 마음에는 그런 브랜드가 먹고 싶었지만,
할머니는 손수 만든 양념장으로 프라이팬에 닭다리 구이를 해주셨다.
그때 할머니께서 해주신 닭다리 요리가
지금까지 먹어 본 닭 요리 중에 가장 맛있었다.
갑자기 그 맛이 너무 그립다.
할아버지의 하루 일과는 거의 똑같았다.
새벽 5시 30분쯤 일어나신다.
등산 및 목욕탕 가실 준비를 하신다.
나와 내 동생을 깨우신다.(모든 어린이가 그렇듯 등산 가기가 너무 싫어서 못 일어나는 척을 많이 했는데 소용이 없었다ㅠ)
비몽사몽인 나와 동생을 데리고
뒷산인 금정산으로 향하신다.
할아버지는 뒷짐을 지시고 정말 천천히 가시는데
나와 내 동생은 할아버지를 쫓아가기가 너무 힘들었다.
할아버지의 등산 루트는 크게 몇 가지가 정해져 있고,
그중에서 그날 기분이나 컨디션에 따라 정하셨다
각 코스마다 나름의 정상이 있었다.
그 정상에 도착하면 할아버지와 함께 야호를 외쳤다.(요즘엔 그러면 안 되지만. ^^)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은 수월했다.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라는 할아버지 말씀대로
조심히, 그러나 빠르게 내려왔다.
도착지는 항상 금강공원이었다.
9시쯤 도착했던 것 같다.
공원 안에 있는 식당에서 아침을 먹는다.
콩국수, 잔치국수, 칼국수 등 아이 입맛에 맞는 음식은 없었지만,
배고프니 맛있게 잘 먹었던 기억이 난다.
허기진 배를 든든하게 채우면 이제 목욕탕으로 간다.
할아버지는 항상 목간 가자고 말씀하셨다.
그때 목욕탕은 대부분 몸을 불려서 때를 밀러 가는 곳이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샤워하시고 냉탕과 온탕을 가기 위한 용도,
딱 그 정도였다.
금강공원이 있던 온천장이라는 곳은
명칭처럼 온천이 유명한 곳이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그곳 목욕탕을 매일 이용하셨다.
할머니는 70대 연세에도 이것저것 많이 배우셨다.
노인대학을 다니시며,
그림, 음악 등등 여러 가지를 많이 배우셨다.
할머니의 수사자 그림은 그림을 잘 못 그리는 어린 내 눈에도 멋져 보였다.
할머니는 몸이 편찮아지시기 전까지
항상 무엇인가를 배우려고 하셨다.
그 점은 정말 배우고 싶을 만큼 대단하신 거라 생각한다.
나는 옛날 얘기를 너무 좋아했다.
항상 할머니 곁에서 잤는데,
그때마다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매번 다른 이야기보따리를 푸셨다.
그때는 지금처럼 인터넷도 없었는데
어떻게 그 많은 이야기를 해주신 걸까.
만약 창작하셔서 해주신 것도 있다면
정말 대단하신 거란 생각이 든다.
두 분은 항상 나의 입학, 졸업 등 중요한 순간을 챙겨주셨다.
항상 좋은 것을 해주려고 하셨고,
맛있는 것을 먹이려고 하셨다.
그렇게 하나하나 생각해 주시고 챙겨주시는 것이
사랑과 관심 없이는 어렵다는 것을
나이가 들고 육아를 해보니 알겠다.
두 분의 음력 생신이 똑같아서 항상 같이 생신 잔치를 하셨다.
생신 때마다 온 가족뿐 아니라,
고모들의 제자들까지 많이 와서 30~40명이 모였던 것 같다.
그때마다 집에서 직접 요리를 해서 손님을 맞이했다.
내가 기억하기로 두 분 생신 음식은 오롯이 막내며느리 우리 어머니의 몫이었다.
큰 어머니는 서울에 계시다는 핑계로 내려오신 적이 거의 없다.
고모들은 딸이기에 집안일을 거의 하지 않았다.
다른 집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집은 그랬다.
그래서 나는 큰 어머니와 고모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분들만의 사정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내 어머니만 고생하시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20살이 되던 해,
여든여섯이 되신 할머니께서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장애 1급 판정을 받으셨고, 중증 치매를 앓으셨다.
그로부터 1년 동안 어머니는 밤에는 조부모님 댁, 낮에는 우리 집을 보살피셨다.
할머니의 병시중뿐 아니라 할아버지의 하루를 책임지셨다.
어느 날 버스 타고 친구를 만나러 가는데,
온천장에서 가까운 동네에서
할아버지와 비슷하게 생기신 분을 창밖으로 보았다.
그때 시간이 오후이고
할아버지의 평일 습관 내 있는 동선이 아니어서 처음에 잘못 본 지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때부터 할아버지의 치매 증상이 시작되었다.
그 뒤로 할아버지 증상이 심해지시자,
결국 우리 집에서 두 분을 모시기로 했다.
그때부터 2001년 두 분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두 분과 함께 살았다.
할머니는 항상 침대에 누워 계셨고,
할아버지는 40년 가까이 등산을 하셔서 그런지 왕성하게 움직이셨다.
그때 알았다.
치매 환자가 체력이 좋으면 케어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의 뜻도 이해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어렸고 철이 없어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때 조금이라도 더 잘해드렸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할아버지와 참 많이 싸웠다.
날이 갈수록 치매 증상이 심해지시는데,
체력이 좋으셔서 어머니가 감당하실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케어를 했는데,
조금 전에 하신 행동을 계속하고자 하셔서 나랑 많이 싸우셨다.
하루에 화장실을 한 70회 정도 가셨고,
조금 전에 식사하시고도 배고프다고 하셨다.
당신 집에 가실 거라고 떼를 쓰셨고,
몰래 나가신 후 아랫집이나 윗집 문을 두드리시며 문을 열라고 하셨다.
어느 날 할아버지 방문을 열었는데,
장판을 모두 손으로 다 뜯어 놓으셨다.
어머니랑 둘이서 보고 너무 황당해서 웃으며 말했다.
“할아버지 방 인테리어가 마음에 안 드셔서 공사하셨네요.”
때론 나를 살짝 불러서 쌈짓돈을 쥐어주시며,
“까까 사무라고.”
라고 챙겨주셨다.
두 분만의 특별한 순간을 볼 수 있어서 좋기도 했다.
두 분은 각자 방을 사용하셨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할머니 방안을 빼꼼히 쳐다보시더니,
어머니의 간호를 받으며 식사하시려던 할머니와 눈이 마주치시자
한쪽 손을 인사하듯 드시면서 할머니께 말씀하셨다.
“OOO 씨! 사랑하오.”
거의 무표정으로 계신 할머니는 갑자기 환하게 웃으셨다.
그러고는 맛있게 식사를 하셨다.
어디 가서 아흔하나 남자와 여든일곱 여자의 애정 순간을 직관할 수 있겠는가.
아직도 내 마음속에는 그 순간이 생생하게 자리 잡고 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내게 할아버지 목욕을 부탁하셨다.
그동안 어머니가 해오셨는데, 그날은 내게 부탁하셨다.
나도 뭔가 모르게 해 드려야겠다는 느낌이 들어서 목욕을 시켜드렸다.
그때는 몰랐지만, 내 생애 최고로 잘한 일 중 하나로 남는 일이었다.
할아버지 몸을 구석구석 씻겨드리는데,
할아버지의 수염이 너무 자라 있었다.
그래서 깔끔하게 면도를 해드렸다.
“할아버지 좋으세요?”
“응, 좋다.”
라고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그로부터 며칠 뒤 할아버지는 우리와 영원한 작별을 하셨다.
입관식을 할 때 얼핏 들었다.
돌아가신 분의 면도를 할 수 없는데, 미리 잘하셨다고 말이다.
할아버지께 항상 받기만 하고 제대로 효도해 드린 것도 없는데,
마지막 가시는 모습이 깔끔하실 수 있도록 해드려서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
아직도 잊지 못한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날 아침에 초점 없는 눈동자의 할아버지와 마지막 대화.
“할아버지 병원 잘 다녀오세요.”
“…..”
기력이 없으셔서 어떤 말씀도 못하시고 고개만 끄덕였던 할아버지.
그게 내가 본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다.
할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 가신 어머니께서 몇 시간 뒤 전화를 주셨다.
“할아버지 돌아가셨거든. 개금 백병원으로 동생 데리고 온나.”
“네…”
병원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고 진정되지 않았다.
내가 사랑하는 가족의 첫 장례였기에 더 그랬다.
손발이 바르르 떨렸다.
천으로 둘러싸인 할아버지를 모시고 장례식장이 마련된 병원으로 이동했다.
70년 가까이 해로하신 두 분은 각자 살아가기가 싫으셨는지
같은 해 비슷한 시기에 돌아가셨다.
생신이 같으신 두 분은 당신들의 생신을 기준으로
할아버지는 생신 4일 전,
할머니는 생신 4일 후에 돌아가셨다.
아마도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모시고 간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혼자 이 생에서 그만 고생하고 같이 가서 살자고 말이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날 입관식이 끝나고,
할머니께서 갑자기 안 좋아지셨다.
할머니를 장례식장이 있는 병원 중환자실로 모셨다.
마음의 준비를 하시라는 의사 선생님 말을 우리는 차분히 받아들였다.
그로부터 며칠 뒤 할머니도 우리 곁을 떠나셨다.
지금으로부터 22년이 지난 이야기지만,
아직도 어제처럼 생생하다.
그만큼 두 분이 내게는 너무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꿈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오랜만에 나타나셨다.
두 분의 생신을 축하해 주기 위해 온 가족이 모였다.
두 분의 표정이 어땠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분위기가 좋았던 것 같다.
그리고 두 분이 돌아가시고 나서
연락이 끊긴 큰 고모의 딸인 사촌누나와 반갑게 인사했다.
그 시점이 언젠지 모르겠지만,
내가 2023년에는 잠실 사니까 연락하고 한번 보자고 했다.
또 한 명의 형이 있었는데 그 형은 누군지 잘 모르겠다.
암튼 오랜만에 두 분을 뵙고
누나를 만나니 좋았다.
올해가 가기 전에 두 분께 인사드리러 다녀와야겠다.
할아버지 할머니!!
너무 감사하고 사랑하고 보고 싶습니다!!
조만간 인사드리러 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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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하!
당신만의 의미 있는 인생을 사세요.
유캔두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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