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나지 않는 비

25층에서 들리지 않는 빗소리, 잃어버린 것

by 김진

'빗소리를 찾아가다 만난 내 어린 시절'


아파트 25층에 살 때는 비가 세차게 몰아쳐도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빠른 속도로 낙하하는 빗줄기, 더욱이 아파트의 견고한 창은 외부 소음을 단단히 막아주기 때문에 빗소리도 덩달아 차단됐다. 빗줄기를 때려줄 지붕도 없고 빗줄기가 부닥치는 지면도 거리가 너무 멀다. 25층의 비 오는 날은 뭔가 아쉬울 따름이었다.

자연과의 교감을 잃어버린 채, 보이기만 할 뿐 들리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삶. 고층 건물의 창문 너머로 보이는 빗줄기는 마치 우리가 잃어버린 감각들을 상기시키는 유령 같다. 아무리 비가 쏟아져도 그 소리조차 들을 수 없는 이 높은 곳에서, 우리는 얼마나 더 고립되어야 할까.


어린 시절 귓속을 파고들던 빗소리가 아직 환청처럼 뇌리에 남았다. 시골 원두막 함석지붕을 두드리는 빗방울의 리듬,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의 박자, 풀잎과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 소리와 어우러진 빗소리의 화음을 알고 있다. 지나치지만 않는다면 자연이 서로 몸을 부대끼는 것처럼 좋은 소리도 없어 보인다. 마음속에 담아둔 이런 소리들이 내 삶의 큰 밑천으로 남았다.


갈증에 시달리는 영혼이 바싹 메마른 땅처럼 쩍하고 갈라지기 직전, 어느새 그 선명한 빗소리가 내 안에서 되살아나 적신다. 무뎌진 감각을 깨우고, 흐리멍덩한 육신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다시 또렷해진 눈동자로, 나를 재정비할 기회를 마련해준다. 빗소리가 내게 말한다. 아직 나는 가슴이 뛰고 있고, 느낄 수 있으며, 기억할 수 있다고. 곧 생의 단비를 몸소 맞게 될 거라며 내 어깨를 다독인다.

25층에서 맞이하는 비, 아무 소리 나지 않는 비처럼 세상이 무미건조해진다. 35층이 세워질 테고 77층이 세워질 테니, 그 안에서 기약 없이 기울어지지 않도록 어서 만반의 준비를 다 하자.


비가 온다고 했다. 오늘도 우산을 들고 나가본다. 빗소리를 찾으러. 그리고 나는 끝없이 걸으리라. 그 어린 시절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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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