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사스에서 김광석을 거쳐 미세먼지 시대까지
1970년대 어느 녹음실, 캔사스의 기타줄이 떨려오는 저녁. "Dust in the Wind"—바람 속의 먼지. 그 시절, 먼지는 철학이었다. 존재의 덧없음을 노래하는 시어, 별빛 사이를 떠도는 우주적 고독의 은유. 창밖으로 스며드는 황톳빛 바람도 그저 자연의 일부였다. 마스크라는 단어조차 생소하던 시절, 먼지와 함께 숨쉬는 것이 당연한 일상의 리듬이었다.
김광석의 목소리가 울려퍼지던 1990년대 어느 작은 무대. "먼지가 되어"라는 간절한 속삭임 속에서, 사라짐은 아름다운 체념이자 낭만적 갈망이었다. 그 시절의 먼지는 순수한 시였다. 햇빛이 창틈을 비스듬히 가로지를 때 춤추는 미세한 입자들, 그것들은 기침을 만드는 침입자가 아니라 빛과 어우러진 자연의 서정시였다.
하지만 2025년 어느 아침, 스마트폰 화면에 뜨는 붉은 숫자들. 미세먼지 농도 130, 매우 나쁨. 2.5마이크로미터의 침입자들이 폐포 깊숙이 스며들어 염증을 일으킨다는 의학적 진실 앞에서, 먼지는 더 이상 시가 아니다. 마스크를 겹겹이 둘러싸고, 공기청정기의 푸른 불빛 아래서 숨을 고르는 현대인들. 먼지가 되고 싶어하면서도 먼지 한 알갱이조차 용납하지 않는 시대의 아이러니.
그 시간, 들판 끝자락에서는 여전히 농부의 발걸음이 황토를 일으킨다. 트랙터 바퀴가 지나간 자리마다 피어오르는 누런 구름들 사이로, 굽은 등의 실루엣이 걸어간다. 경보 따위는 사치스러운 걱정, 보리싹의 푸른 숨결을 확인해야 하는 손끝의 의무가 더 절실하다. 마스크 한 장에 의지해 밭고랑을 가로지르는 발걸음에는 김광석이 노래했던 그 먼지의 체념이 아직 살아 숨 쉰다.
도시 한복판 건설 현장, 시멘트 가루가 햇빛과 춤춘다. 노동자의 마스크 너머로 스며드는 회색빛 입자들. 이것들은 캔사스가 노래한 우주의 먼지도, 김광석이 꿈꾼 낭만의 먼지도 아니다. 그저 생계를 위한 필연의 동반자들. 먼지경보 아래서도 멈출 수 없는 망치질의 리듬, 그 사이로 새어나오는 것은 체념도 낭만도 아닌 묵묵한 현실의 무게.
"내가 먼지가 되어 당신 곁으로 간다"고 누군가에게 말한다면? 그 한 마디가 공기 중에 떠오르는 순간, 사랑의 언어가 현실의 필터를 통과하며 겪게 되는 기묘한 변조. 당신의 눈동자 속에서 잠깐 머뭇거리는 당황의 빛깔. 공기청정기가 켜진 방 안에서, 먼지가 되어 간다는 사랑의 서약이 로맨틱한 고백인가 아니면 위험한 예고인가 하는 질문이 피어오른다.
창밖으로 스며드는 황톳빛 석양을 바라보며, 바람 속의 먼지가 되고 싶다는 고백을 되뇌인다. 하지만 문득 깨닫는다. 우리는 이미 먼지였다는 것을. 별이 죽으며 뿌린 탄소와 수소의 일시적 집합체, 우주의 먼지가 잠깐 빌린 형태로 살아가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다만 그 먼지의 의미가 달라졌을 뿐이다. 어떤 시대에는 철학이었고, 어떤 시대에는 낭만이었으며, 지금은 경계의 대상이 된 것일 뿐. 그리고 어떤 이들에게는 여전히 일상의 동반자이자 생존의 조건인 것일 뿐.
나는 그저 황야에서 불어오는 먼지바람으로 남고 싶을 뿐이다. 도시의 검은 매연이 아니라, 선인장 가시에 걸렸다가 다시 날아가는, 뜨거운 모래와 차가운 별빛이 만나는 경계선을 떠도는 자유로운 입자로.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누군가의 노랫소리 속에서 잠깐 머물다가 다시 바람이 되어 사라지는 그런 존재로.
스테레오에서 흘러나오는 마지막 기타 코드가 공기 중에 흩어진다. 그 소리 사이로 스며드는 것은 시대의 아이러니인가, 아니면 변하지 않는 인간 존재의 본질인가. 우리는 먼지를 꿈꾸고, 먼지를 두려워하며, 먼지와 함께 살아간다. 각자의 시간 속에서, 각자의 이유로.
마치 먼지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