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시절 기록 한 장
"지금은 비가 애매하게 오니까 조금만 더 지켜보자, 급할 거 없어. 미리 걱정하지 마."
B는 외부 미팅이 있을 때마다 동행해 준다. 며칠 전, 업무차 성수에 들러야 할 때도 그 애는 흔쾌히 운전대를 잡았다. 두 시간에 걸친 기획 회의. 기존에 잡았 던 단행본 컨셉는 다소 변경되었고 예상치 못했던 내용 이슈도 생겼다. 미팅을 끝내고 에이전시 사무실 밖을 나서면서 머리는 더 복잡해졌다. 명쾌하게 정리되는 것 없이 뒤죽박죽 할 일들이 꼬인 기분. 그 상태로 두 시간을 넘게 기다려 준 B를 마주했다.
그날 성수에는 비가 내렸다. 저녁이었고 식당가에는 사람이 북적거렸으며, 모두들 드문드문 내리는 여우비에 미리 챙겨 온 우산들을 하나 둘 펴고 있었다. 할 일은 순서 없이 머리 안에서 뒤엉켰고, 하필 둘 다 우산은 없었다. 아스팔트 바닥이 축축해지자 나는 지레 조급한 마음이 생겨, 우산을 사야 하지 않겠냐며 부산을 떨었다. 주변 가까운 편의점은 어디에 있는지, 우산은 살 수 있을지, 밥을 먹고 나올 때까지 그치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그러자 그 애는 손을 꽉 잡고 말했다. '조금만 더 지켜보자. 미리 걱정하지 마!'
식당에 걸어 놓은 대기 예약 순서를 기다리며, 우리는 약간의 비와 함께 기 꺼 이 거리를 걸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곧 쏟아질 것 같던 비는 싱겁게 그쳤다.
위험을 대비하는 습관은 문제가 닥쳤을 때 꽤 편리하지만, 미리 걱정하는 버릇은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과도 닮아 있다. 그러니까 언제나 대비와 걱정을 잘 구분해야 하는데, 편리와 괴롭힘을 명확하게 나누는 것은 아직도 훈련이 필요하다. 가끔은 과거 B가 내게 말했던 말들을 떠올려보곤 한다. '필요'에 대한 영역이다. 그 애는 자신이 내게 꼭 필요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했고 나는 어떻게 사람을 필요 여부로 가르냐며, 너무 정 없다고 나무랐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면, B는 내게 꼭 필요한 사람이고 나는 그걸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문제가 생길 기미만 보여도 플랜을 A부터 C까지 짜려고 드는 내게 지금 순간을 '충분히' 즐기라고 말해주는 사람은, 그리고 그 말을 믿고 그대로 실천하면 마음속 너울이 정말로 잔잔해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 사람은 그 애가 유일하다. 아무도 이토록 마음이 평온해질 수 있는 방법을 내게 설명해주지 않았다. 혹은 설득해 주지 못했다.
여전히 사람을 곁에 두는 많은 이유 중 하나로 '필요'를 꼽는 것은 어감이 어색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B가 필요하다. 커다란 손을 잡거나 템포가 느린 숨소리를 듣고 있으면 내 주변으로 빠르게 돌아가던 공기도 그 애의 주변 기류를 타고 찬찬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는 미리 할 걱정들을 잠시 뒤로 미뤄놓고 그 순간에만 볼 수 있는 불빛과 하늘과 사람의 표정 같은 것들을 경험할 수 있다.
"일도 똑같이 생각해. 급할 거 없어, 알겠지?" B는 가끔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들을 해준다. 듣고 싶은데 엎드려 절 받기는 싫은 말들, 그렇지만 정말 꼭꼭 필요해서 억지로라도 해달라고 떼쓰고 싶은 말들. 3월이 끝나면 나는 또 어떻게, 얼마만큼의 걱정을 미리 당겨 안고 있을까? 그래도 지금보다는 덜 급했으면, 그리고 나 역시 B에게 누구보다도 필요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_필요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 [23년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