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병원을 가게 될 줄이야
모든 게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특정 순간들이 찾아온다. 대부분 그 순간들은 현실에서 굳이 생기지 않아도 될 일들이며 보통은 우려했던 일들을 말한다. 그럴 때면 난 잠시 5초 눈 감고 뜨면 꿈이었으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나의 평온한 하루였었다고 인지하고 싶었다. 하지만 물리적인 시간 5초로는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일어난 일은 5초 더 진행되어 있을 뿐이었고, 엎어진 물은 5초 더 멀리 흘러갔을 것이다.
단 5초의 기적을 바라는 건 욕심일 수도. 그럼에도 난 단 5초에 내 인생을 바꿀 다짐들을 되뇌었다. 이렇게도 살아봤으니 저렇게도 살아갈 수 있겠지. 암요- 그렇고 말고요.
약간의 비장함을 가지고 세브란스로 향했다. 말이 좋아 비장함이지 두려임이 조금 더 컸던 건 사실이다. 애써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들을 이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도장 같은 시간들.
수차례 지나갔던 길이거늘. 멀리서 바라만 보던 건물에 내가 들어가게 될 줄이야.
유난히 파란 오늘의 하늘을 잊지 못할 것 같다.
담당 교수님을 만나 뵙고 이런저런 설명을 듣게 되었다. 생각보다 모양이 많이 좋지 않고 위치도 크기도 좋지 않다며.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서 수술을 해주시겠단 말씀까지. 가장 두려웠던 사실은 목소리의 변화였다.
암이 신경과 매우 가깝다고- 하물며 붙어 있거나 전이가 되었을 수도 있다며- 공포스러운 말을 듣는 내내 앞으로 무대 위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라는 두려움이 커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해낼 수 있을 거란 다짐을 반복했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검사들. 검진 병원에서 준 자료를 더해 추가 검사를 더 진행하게 되었다.
이유는 반대편에도 의심 가는 부분이 있으며 전이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CT까지 찍어야 한다 했다.
9시 30분에 시작했던 진료와 검진은 12시가 넘어서 끝나게 되었다. 기록과 기억을 남기기 위해 써 내려간 글이니 만큼 나와 같은 사람들이 도움이 될까 오늘을 기록해 본다.
담당 교수님과 진료가 끝나면 수술 상담 코디네이터 분 께서 상세히 오늘의 일정순서를 알려주신다.
순서가 적힌 종이를 보며 게임 속 미션을 깨듯 하나씩 하나씩 진행해 나가면 된다. 나름 쏠쏠한 재미가 있다. 이렇게라도 재미와 성취감을 찾지 않으면 오늘 오전이 내내 슬프게만 흘러갈 것 같았기에.
그렇게 나의 미션은 시작되었다.
1. 외래원무과 (5층) -1차 수납
2. 채혈실 (2층) - 혈액검사, 소변검사 (금식 유지 *물 가능)
3. CT 접수실 (2층) -접수만 (혈액검사 결과 후 진행 가능)
4. 초음파센터 (5층) - 갑상선초음파
5. 심전도실 (5층) - 심전도 검사 ( 본관 연결통로 끝에 위치)
6. 영상의학과 (2층) - X-ray : 가슴/목 사진
7. CT촬영 (2층) - 촬영
8. 초음파센터 (5층) - 추가 조직검사 진행(왼쪽) 세침검사
9. 상담실 (5층) - 수술 날짜와 수술 전 주의 사항
원래 없었던 검사들이 추가되며 다소 복잡하게 왔다 갔다 했지만, 대학병원은 상당히 친절한 사람들로 가득하기에 어렵지 않게 잘 찾아가며 순서대로 진행했던 것 같다. (미션 완료-!!)
전절제가 될지. 반절제가 될지는 4월 중순에 결과를 들으며 결정이 될 것 같다. 사실 절제의 크기도 중요하지만 여전히 나는 목소리가 중요했다. 고집처럼 훈련해 왔던 지금까지의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혹시나 바뀔 앞으로의 날들에 어떻게 대처할 것이며 이겨낼 거란 다짐을 수십 번 수백 번 했다.
6월 말쯤 수술이 잡혔다.
공연연습이 한창 진행될 시점이라 혹시나 더 빨리 받을 수 있게 된다면 당장 내일이라도 가능하다고 부탁을 드렸다. 제발 수술이 당겨지길 바라며-
차라리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좋겠다란 생각을 했다. 잠시 눈 감은 5초의 시간은 그저 나의 삶에서 흘러간 5초였을 뿐. 달라지는 건 없었다. 꿈이었다 한들 그 5초는 나의 시간임이 분명하다. 방법이 딱히 떠오르지 않을 땐 그저 받아들이고 헤쳐나갈 수 있는 해법만 찾는 게 좋은 것 같다. 나의 시간을 사랑하고 아껴줘야지.
5초의 기적은 4초 뒤에 일어난다.
...1...2...3...4........ 다시...1...2...3........4......다.. 시......(ㅋㅋㅋ)
악몽이라면
하루빨리 깨어날 수 있게 해 주소서.
좋은 꿈이라도
하루빨리 깨어날 수 있게 해 주소서.
그저 현실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