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배우인 내가
연락처를 바꾼다는 건 쉬운 결정이 아니다.
그동안 뿌렸던 프로필과 관계성들을 생각해본다면
가능하면 안 바꾸는 게 좋다.
주위에서의 만류에도 어쩔 수 없이
학창 시절부터 줄곳 써오던 번호를 바꾸게 되는 계기가 있었다.
번호를 바꾸기 전.
바꿔도 괜찮을 타당한 이유들을 늘어놨다.
"이참에 관계 정리도 하고 좋잖아?"
"어차피 연락 올 사람만 오는데 뭘."
"요즘은 톡으로 하니까 괜찮아."
"아무도 관심 없을 거야."
이러한 이유들과 억지로 타협하며,
눈물을 머금고 수년 전에 수십 년 쓰던 번호를
버리고 지금의 번호로 바꾸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였다.
번호를 바꾸고 난 뒤 오는
모르는 사람들의 연락들.
희○아.
희○이 번호 아니에요?
희○이 아니에요?
도대체 희○씨는 누구일까.
평소 호기심 많은 무명배우인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희○씨를 머릿속에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몇 번 오고 말겠지 했던 연락들이
계속해서 이어졌고, 그 연락들은 충분한 단서가 되었다.
희○씨의 포인트 적립 문자나 대출 문자까지.
나는 그분의 직장 내 직급과 남은 대출금액까지
의도치 않게 알게 되었다.
희○씨는 알고 있을까...
연락 온 몇몇 사람들에게 간곡히 부탁도 해봤었다.
희○씨에게 제발 바뀐 번호로 정보 수정 좀 해달라
전해달라고...
보통 배우들이 하는 연기훈련 중
'관찰하기'라고 있다. 다양한 캐릭터를 분석하고 표현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훈련 중 하나이다.
나는 눈으로 보지 않고 '관찰하기' 훈련을 했고,
그 훈련은 나를 배우가 아닌 탐정으로 만들고 있었다.
희○씨는 엄청난 '인기쟁이'다.
그녀를 찾는 남자들이 많았다.
늦은 시간 전화가 가끔 온다.
희○씨가 아닌 굵직굵직한 남자목소리가
들렸으니... 상대도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어떤 관계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정체모를 남자들이 새벽에 나의 단잠을 깨우고는
희○씨를 찾는다.
잊을만하면 한 번씩 전화가 온다.
어제 새벽 3시.
"희○아."
"희○씨 번호 바뀌었어요..."
"뭘로요?"
"네?... 그야 저도 모르죠...(저도 알고싶어요 이젠)"
"아... 네... 죄송합니다."
우리 인기쟁이 희○씨 덕분에
오랜만에 밤늦게 오는 전화에 설렐 뻔했다.
이럴 거면 희○씨 지금 쓰는 번호를 알려줬으면 좋겠다.
오늘은 희○씨 찾지 마요. 다들!
푹 잘 생각이니까-
명탐정 원식.
아니.
무명배우 원식인 나는
'인기쟁이 희○씨'의 인기가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