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

잔상의 그림자

by 진작
*여운
:1. 아직 가시지 않고 남아 있는 운치.
:2. 떠난 사람이 남겨 놓은 좋은 영향.
:3. 소리가 그치거나 거의 사라진 뒤에도 아직 남아 있는 음향.


무심코 던진 말이

누군가에겐 강한 잔상을 남긴다.

찍혀버린 도장 같은 말은

시간이 지나면 지워지겠지만

눌려져 버린 깊이만큼 패어있는 그 말은

손끝으로 스쳐도 느껴질 만큼의 강한 잔상을 남긴다.

해가 사라져도 그림자가 지는 것처럼.





며칠 전,

촬영을 하기 전 출연배우들이 모여 리딩을 했었다.


'주인공'역에는 나이가 품격 있게 스며드신 할아버님 이셨고,

그 할아버님의 '아들'역을 하게 된 를 포함하여

'딸' 역, 그리고 '아역배우' 한 명.

마지막으로 무표정으로 앉아 계시는 주인공'친구' 할아버님이 계셨다.


간단한 자기소개 후.

본론으로 들어가 리딩을 시작했다.

무덤덤하게 읽어 내려가시는 주인공 할아버님 대사가 던져졌고,

단 한마디 건네는 친구 역의 할아버님 대사가 그 대사를 받았다.




"에이... 괘씸한 것들 다 키워 놨더니..."



"요즘 애들 다 그렇지 뭐...

너도 뭐 이상한 거 할 생각 하지 말고

그냥 집에서 쉬어... 애들한테 피해 주지 말고.

이렇게 살다 가는 거야."




이렇게 살다 가는 거야.

이렇게 살다 가는 거야?

이렇게... 살다가... 가는 거라고?



분명 리딩을 하기 전 대본을 받고 나서

내 눈으로 확인했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저 대사일 뿐이니까. 문제 삼을 이유도 전혀 없지.

하지만,

그 대사를 소리로 전달하여 귀로 들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대사를 하신 할아버님은 어떤 마음이셨을까.


일이니까.

평소대로 연기하듯 내뱉으셨을 수도 있고,

순간의 감정을 다해 한마디를 건네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그걸 듣고 있는 나에게는 그 대사 한마디가

파도처럼 다가왔다.


아니

파도라기 보단... 뭐랄까...

가만히 앉아 저 멀리 하늘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스며들어온 밀물에 바지 밑단까지 젖어버린 기분이었다.


축축하거나,

찝찝했다는 것이 아니다.


따뜻했지만

들어오는 밀물에 뒷걸음질 쳐야만 하고

그나마 가까운 곳에서 바라보던 하늘을

더 멀리서 봐야 한다는 게 씁쓸했다.


절대불변 아닌가.


인간은 누구나 세상을 떠난다.


그러면 안 되는 거지만 그 대사를 듣고 난 뒤,

나의 대사가 오기까지

짧은 시간 동안 잊고 있었던 지난 몇 가지 기억들이 지나갔다.


몇 년 전 어느 문화센터에서

어르신들을 모시고 산타 되어보기라는 수업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쉽게 말해, 산타 연기를 알려주는 것이다.


산타 연기?

생각해보면,

산타 연기는 고작 30대 초반이었던 그때의 나보다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산타의 이미지에 도달해 계시는 어르신들이 이미지적으로는 이미 완성형이셨다.

연기를 알려드린다기보다는

소통의 시간들이었고, 우리가 생각하는 산타에 대한

강연을 하는 느낌이었다.


이야기를 나누기 전 산타가 되고 싶은 이유에 대해 질문을 건네었었다.




"왜 이번 크리스마스 때 산타가 되고 싶으세요?"



"죽기 전에 한번 해보고 싶었어..."




(저한테 왜 그러세요.......................)

짧은 순간이었지만

훅- 들어온 몽글몽글한 마음은

애써 분위기 반전을 위해 부탁드린 박수로

힘겹게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냥저냥 이렇게 살다 가는 것

죽기 전에 해보고 싶었던 것들을 다 해보고 가는 것

차이를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니다.


몇 년이 지난 할아버님의 말씀이 지금까지

나의 마음에 여운이 남아 잔상이 생겼었고,

그 잔상에 한 번씩 해가 뜰 때면 그림자가 생기곤 했었다.


두 분은

해야 할 말씀을 하셨었고,

하고 싶은 말씀을 하신 것이다.


보고 들었던 나조차도

들어야 했고,

들렸을 뿐.

그 말들에 무게를 달지 않으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 그게 무게를 달아야만

말의 질량을 알 수 있는 건가.




어느 날

그 말 한마디에

그림자가 지는 날,

밀물에도 뒷걸음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즐겁게 사셨으면 좋겠어요.

가는 것보다

남아 있는 것을 더 많이 생각하셨으면 좋겠어요.

그냥 30대 청년의 어리광스런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