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20일. 소파에 앉아 귤을 까먹으며 이런저런 생각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것을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옆에는 이미 과육을 잃어버린 채 자신의 속살을 여실히 드러낸 귤껍질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귤의 과육을 훔치던 저의 손톱은 노랗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몇 개째지? 족히 10개는 먹은 것 외에는 감이 오지 않았습니다. 귤이 당도가 높은만큼 칼로리도 높다고 하던데...... 에이 무슨 상관이야. 왼손으로 빠르게 귤의 배를 가르며 생각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머릿속에 스친 한 가지 생각에 아찔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눈을 감고 되뇌이듯 생각했습니다.
'지금 아직 12월이니 한국에 안 왔으면, 나 지금도 호주에 있겠구나.'
1달 반간의 호주 워킹홀리데이는 내게 멘탈이 무너지면 모든 게 무너진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2020년 2월 떠나 3월 말 귀국한 호주에서의 한 달 반의 시간은 저에게 쓰라린 기억 중 하나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19 사태와 호주발 산불의 영향으로 주변의 거센 만류가 있었음에도 이를 뿌리치고 호기롭게 출발한 호주 워킹홀리데이는, 당시에는 인정하기를 꺼렸지만 그들의 말처럼 엄청나게 가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저는 좌절감에 사로잡힌 채, 모든 계획을 호주에 묻고 한국 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기억이 이따금 되살아난 것입니다. 그때 한 번만 더 참고 견뎠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만약 그랬다면 지금 즈음 호주에서 많은 것을 경험하고 배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부질없는 후회와 함께 말입니다. 그런 생각과 후회가 이미 쏟아진 물을 주워 담으려는 시도처럼 의미 없는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뻗어나가는 생각의 갈래를 물리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어째서인지 어느새 저를 질책하는 채찍질이 되어 나타났습니다. 결국에는 약간 센치해짐과 동시에 우울해졌고 먹던 귤을 내려놓고 더 깊은 상념에 잠겨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한참 있었을까요. 처음에는 부유물로 뿌옇게 흐리던 저의 머릿속이 점차 앙금이 가라앉고 맑아진 물처럼 명료해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마음속에 그려왔지만 차마 용기 내어 꺼내지 못했던 한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국토종주를 하자."
이후 노트북을 꺼내 다방면으로 방법을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수로 국토종주를 하지?
여러 가지 방법이 떠올랐는데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걷기였습니다. 그러나 대충 생각하고 계산해도 걷는 속도로는 일정이 너무나도 길어질 것 같았습니다. 대충 부산까지 간다고 계산하면 600km 이상의 거리를 걸어야 하는데 군대에서 행군을 했을 때 30km를 8시간 동안 갔던 것 같으니까 부산까지 가려면 넉넉잡고 20일 이상의 시간을 쏟아야 합니다. 더군다나 행군을 했던 때를 되뇌어보면 8시간씩 20일 이상 걷는 것은 체력적으로도 상당한 무리가 있을 것 같았습니다. (행군 후에 부대원들이 한동안 절둑거리며 걸었던 것이 여전히 머릿속에 새록새록합니다.)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 자전거로 국토종주를 하는 방법에 대해 알게 되었고, 마침 집에 아버지 소유의 놀고 있는 자전거가 있다는 생각이 미치자 이거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금 더 광범위한 조사로 자전거로는 초보자 기준 6일 정도의 여행 일정으로 인천에서 부산까지 주파가 가능하다는 부분과, 국내 자전거길이 인천에서 부산까지 뚫려 있어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로 국토종주에 도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최종적으로 자전거로 국토종주에 도전하고, 기한은 6-7일. 인천에서 부산까지 이어진 자전거 국토종주길에 도전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사실 혼자서 일을 진행할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자전거 초보인데다 난생처음 해보는 종류의 도전인 만큼 여러 부분에서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친구 한 명을 섭외하여 코로나 상황이 누그러지는 시기에 국토종주를 하자, 하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몇 가지 복병이 발생했습니다.
첫 번째는 제 체력이었습니다.
아버지께 자전거를 사용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고, 자전거를 정비한 후 총 3번의 자출(자전거 출동..? 출사, 사진을 찍으러 간다는 표현처럼 자전거를 타러 나간다는 표현입니다)을 떠나봤는데 각각 20km, 20km, 30km를 주행했습니다. 국토종주가 시작되면 633km를 주행하기 위해 하루에 100km 내외의 거리를 달려야 하는데 저는 30km를 달리고도 체력의 무리가 오는 걸 느꼈습니다. 실제로 그 다음날 허벅지가 무겁게 뻐근해서 자전거 타는 것을 스킵할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아직 국토종주까지 시간적 여유가 있기 때문에 차례차례 40km, 50km 순으로 주행 거리를 늘려가며 체력을 보강할 생각입니다.
30km 주행 후 힘을 잃은 손가락
두 번째는 역시 코로나입니다.
2020년 12월 29일 현시점에서 전날 코로나 확진자는 1046명을 기록하며 아직도 코로나는 기세등등한 등 그 공격세가 매섭습니다. 정부는 제약회사와 협의를 진행하며 백신 접종 시작일을 계속해서 앞당기고 있지만 현재 영국을 시작으로 세계에 점차 퍼지고 있는(우리나라도 이틀 전 변종 사례가 생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변종에 대한 공포가 새로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뉴스에서는 변종 바이러스도 코로나 바이러스이기 때문에 백신이 효과가 있을 것이다, 하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지배적이지만 런던을 포함한 영국의 지방들이 4단계 봉쇄령을 내린 것으로 알고 있어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많이 불안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도 국토종주에 기한을 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코로나가 잠잠해지기를 차분히 기다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는 같이 국토종주를 결심했던 친구의 결정 번복입니다.
저에게 가장 큰 타격을 주었고 '아, 나도 포기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들게 했던 친구의 결정입니다. 국토종주길은 재밌는 구간만큼 힘들고 지루한 구간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또 말이 633km를 6일 동안 주파하는 것이지, 자전거를 꾸준히 타지 않은 사람에게는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많은 부분을 시험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같이 국토종주를 할 친구가 있다는 것은 저에게 상당한 정신적 버팀목이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친구가 사라지고 그 길을 온전히 저 스스로 맞이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정신이 아득했습니다. 과연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과 함께 말이죠.
그러나 포기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혼자 그 길을 달려야 한다고 생각하면 기대감보다는 두려움과 걱정이 먼저 몰아치지만,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은 아직 여유롭고 자전거 안장 위에서 훈련하는 시간이 늘어나다 보면 어느새 자신감이 들어 두려움이 줄어들지 모르겠지요. 그런 나를 믿고 우선은 앞으로 나아가 볼 생각입니다.
앞으로 이 매거진에서는 제가 자전거 국토종주를 준비하는 모든 과정, 그리고 국토종주길에서 만나게 될 수많은 이야기들을 시간별로 차례차례 기록하고자 합니다.
과연 이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까요? 제가 국토종주를 마치고 났을 때(혹 실패할지도 모르지만요) 저에게 어떤 드라마틱한 삶의 변화가 있으리라 생각하진 않습니다. 다만 조금 더 나를 신뢰할 수 있는 나 자신을 기대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아니 어쩌면 이 길의 끝에서, 633km라는 장정의 마지막 순간에 부산에서 먹게 될 뜨끈한 국밥 한 그릇을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30km 행군 후에 즐겼던 따뜻한 샤워가 지금도 잊혀지지 않을 만큼 그날의 국밥은 또 얼마나 잊지 못할 맛을 저에게 안겨줄까요.
앞으로 얼마나 걸릴지 모를 이 여정의 시작이지만, 저의 매거진을 읽으며 함께 가보시는건 어떨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