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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석 Sep 26. 2020

두 편의 일기

어른이 된다는 건, 성장한다는 걸까 무감각해진다는 걸까

까톡!

손을 뻗어 휴대폰을 확인한다.

어두운 자취방, 친구의 코 고는 소리만이 가득하다.

휴대폰 불빛에 눈살을 찌푸린다. 몇 시지.. 새벽 두 시네..

스크린에 보이는 한 통의 메시지,

"뭐함?"


나 : 엥? 그냥 누워 있지
테슬라(가명) : 만두(가명)네서?
나 : ㅇㅇ
테슬라 : 나 지금 고보대에서 산책 중인데 올래?
나: 이 시간에?
테슬라 : 그냥 산책하고 싶어서 옴 ㅋㅋ



뭐야, 새벽 두 시에?

무슨 일 있나?


답장을 남긴다,

'산책하고 있어, 갈게'





고려대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줄여서 통칭 고보대라 부르는 이 곳은 야간에도 문을 닫지 않아 주민들이 운동을 할 수 있게 만든 곳으로, 나 또한 근처에서 자취할 때 친구들과 조깅을 위해 자주 들르곤 했던 곳이다. 다만 밤 11시가 넘게 되면 학교 안 대부분의 가로등이 꺼지기 때문에 분위기가 상당히 스산해지는 게 이 곳의 문제라면 문제였는데, 테슬라를 만나러 학교에 들렀던 날도 어김없이 학교는 어마어마한 스산함을 풍기고 있었다.


학교 후문에 도착해 깊이 심호흡을 하고 운동장으로 냅다 달렸다. 다행히 운동장에는 서너 명의 사람들이 조깅을 비롯한 운동을 하고 있어 무서움을 덜 수 있었고, 그들 중 저 멀리 구령대에 앉아있는 테슬라를 발견하곤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뭐하냐, 산책하러 왔다면서. 좀 걸을까?"



날씨는 선선했고 시원한 바람이 적당히 불어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테슬라와 운동장을 두어 바퀴 걸었을까, 테슬라는 이렇게 늦은 새벽 산책을 하러 온 이유에 대해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사실 테슬라는 대학원생으로, 그의 랩실(그가 배치된 연구실)은 업무가 무지막지하게 많다. 나는 대학원을 다니지 않으니 (또 나는 인문대생이어서 공대 대학원 생활에 대해 잘 모른다) 모든 대학원생들(특히 공대)이 이렇게 무지막지한 양의 업무에 시달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내가 지켜본 테슬라의 대학원 생활은 가히 살인적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였다.


테슬라의 말에 의하면, 테슬라는 이 날도 새벽 1시가 되어서야 겨우 퇴근을 할 수 있었고 다음 날 9시까지 출근을 해야 했지만 도저히 그냥 자기가 아쉬워서 산책을 나온 것이라 했다.


"야 그거 아냐? 나 내일도 밤 11시 넘어서야 퇴근할 수 있어."

"할 건 많고, 시간은 없고.. 나 정작 내꺼 대학원 과제는 시작도 못했다. 2주 치 밀렸어."

"요즘은 잠도 잘 안 와. 근데 그러면 또 다음날 지장 있고. 진짜 빡세지 않냐."



테슬라를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말할 수 없는 답답함이 내 안에서 차오르는 느낌을 느끼곤 했다. 무얼까, 테슬라의 힘듬을 해결해 줄 수 없는 내 안의 무력함 때문이랄까? 왜냐하면 나는 늘 테슬라에게, '야 정말 힘들겠구나', '힘내라 그래도, 볕 들 날이 있겠지' 식의 위로만 해줄 수 있을 뿐이었으니까. 그의 상황을 충분히 공감할 수 없다는 것도 답답함을 느낀 원인 중 하나였던 것 같다.


그런데, 이 날은 조금 달랐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전처럼 답답함을 느끼는 대신, 뭐라고 표현할까, 편안함을 느꼈다. 아니, 편안함을 느꼈다기보다는 그냥 이렇다 할 감정의 변화가 없었다. 물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힘내라' 식의 위로를 해주기는 했지만, 내 안에서의 감정이 분명히 이전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그렇게,

테슬라와 헤어지고 만두의 자취방으로 향하던 길, 나는 더 이상 학교의 스산함을 느끼지 않았다.


머릿속이 다른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첫 번 일기] 2020년 7월 1일 수요일

(이 글은 요가 자격증을 취득하고, 한 달여 이상 대강 수업을 찾았지만 수도권에서 대강 수업을 구하지 못해 부산에서 첫 수업을 마친 후 쓴 일기이다)


무슨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그냥 너무 답답한 마음에 일기장을 꺼내 들었다. 일단 오늘은 지난 이틀간의 부산 출장(요가 출강)으로 골반이랑 허리가 너무 아픈 날이다. 월요일 아침 6시 반에 일어나서 요가매트랑 가방을 메고 양주에서 부산까지 가고 화요일에도 일정을 소화하느냐고 꽤 무리를 했으니 몸이 망가져도 이상할 게 없기는 하다. 오늘.. 멘탈이 나간 이유는 글쎄, 두세 가지 이유가 있으려나?

일단은.. 내 삶이 너무 고독하다. 음, 지금 꿈을 좇기 위해서 고군분투를 하는 와중인데 뭔가 베이스가 탄탄한 상태에서 (내 정서적 기반이 탄탄한 상태에서) 꿈을 좇는 게 아니라 마치 내 정서적 불충분성을 보완하기 위해서 (왜냐면 정서적으로 불충족성을 느끼면 삶이 너무 괴롭기 때문에) 기를 써서 꿈을 좇는 느낌이 강한 것 같다 사실. 예를 들면 지금 충분히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더 사랑받을 수 있는 조건인 '성공'을 위해서 맹목적으로 달리고 있는 느낌이랄까. 그러다 보니 월요일, 화요일 각각 2 타임씩 수업을 하고도 그걸 인스타에 '자랑'하듯이 올렸을 때 그때서야 기분이 좋았던 것 같다. (실제로 수업을 끝냈을 때는 오히려 공허함도 들고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음, 그러다 보니 내 시선이 계속해서 남들(타인)에게 향해 있고 자의적으로 계속해서 그들의 눈치를 보는 것 같다. 사실 수업을 제대로 끝냈다는 사실이 중요한 건데 남들이 그걸 긍정적으로 평가하면 기분이 좋아지고 그렇지 않으면 기분이 나빠지는 식이다. 이런 양상은 대단히 자기소모적이고 대단히 괴롭다. (생략)

수업은 잘한 것 같다. 회원님들 반응이 좀 미적지근한 게 신경 쓰이긴 하지만..? 이게 대단한 감정노동인 것 같다. 멘탈을 잘 잡고 본인이 만족할 수 있는 나만의 확고한 기준을 세우는 게 중요할 것 같다. (생략)










[두 번 일기] 2020년 9월 24일 목요일


부산에 다녀온 이후 많은 시간이 지났다. 6월 말에 부산에 다녀왔으니 그 이후 50여 일 정도의 시간이 흐른 건가. 체감상으로는 훨씬 더 된 것 같은데 50일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게 조금 놀랍기도 하네.

오늘 밤, 내 방 의자에 앉아 마음을 좀 비울 겸 노트를 꺼내 들었다. 으레 그렇듯 지난날 써왔던 글들을 하나하나 읽다 7월 1일의 글을 보곤 부산에 내려갔던 그때가 떠올라 웃음이 났다. (생략) 새록새록 떠오르는 기억들이 참 기분 좋더라.

근데 좀 이상하다. 잘 생각해보면 50여 일이라는 시간은 사실 옛일을 추억하듯 흐뭇하게 바라볼 만큼의 시간은 아닌 것 같아서 말이다. 아니 흐뭇하게 바라볼 만큼의 시간일 수는 있는데, 나는 약간 마치 정말 오래돼서 잊었던 기억을 다시 떠올린 것처럼 7월 1일의 일기를 읽었기 때문이다.

어제, 테슬라(가명)와 고보대에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참 기분이 묘했다. 코로나 사태로 지난 수 개월간 내가 많이 성숙했기 때문일까? 테슬라와의 대화를 통해 문득 내 스스로가 조금은 변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조금 무덤덤해졌달까? 예전에는 테슬라가 힘들다고 하면 나 자신도 막 같이 동요하면서 '와 그거 어떻게 버티냐. 진짜 힘들겠다' 이런 식으로 반응하곤 했었는데 이번에는 테슬라가 힘들어 죽겠다는데, 난 옆에서 '생각하기 나름일 거야. 괜찮아. 이게 항상 삶을 어떻게 바라보냐에 따라 세상이 달라 보이는 건지도 모르겠더라'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더라(실제로 이렇게 생각하기는 한다만). 예전이라면 그렇게 동요 없이 그런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을 거다. 그게 진짜 이상하다. 심지어 사실 나도 지금 많이 힘든데. 코로나라는 엄중한 상황에서 목 앞에 칼이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이상하게도 더 이상 '힘들다'라는 감정이 표층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마치 굳은살이 박인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이전 일기를 보고 신선한 기분이 들었던 거다. 불과 50일 전의 일기인데, 50일 전의 내가 지금의 나와는 사뭇 다르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생략)

이게 뭘까, 난 사실 좀 두렵다. 이게 성숙해진다는 것일까? 아니면 성숙해진다고 착각하며 또 다른 한 명의 어른이(좋지 않은 의미로) 되는 것일까. 무감각해지고, 예민하던 감정이 점차 무뎌진다는 게, 한편으로는 편하기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정말 많이 무서운 기분이 드는 밤이다.


ps. 근데 내가 '힘들다'라는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건 또 안다. 다만 그런 감정이 진짜 감정으로, 표층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어디에 쌓아두고 있는걸까?







과연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성장한다는 것일까, 무감각해진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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