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진석 Oct 19. 2020

요가에는 힘이 있다 1

아사나에 대한 고찰

요가를 하는 사람들은, 특히 요가를 오래 한 사람일수록 요가를 단순한 운동, 그 이상의 것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요가를 한다’는 표현을 할 때, ‘운동을 한다’는 표현 대신 ‘수련을 한다’는 표현을 주로 사용하곤 하는데, 이는 요가가 가진 고유의 성질에서 기인한 것으로 요가가 본디 육체적 수행 이면의 정신적 차원의 수행을 지향함과 관련이 있다.


‘수행’이라는 표현은 요가를 갓 시작한 사람들에게는 간혹 꽤나 난감한 표현으로 비치기도 하는데, 나 또한 요가를 시작하고 처음 1-2년여 정도는 도대체 왜 요가를 ‘수련’ 혹은 ‘수행’이라는 단어와 연관시켜 표현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수련을 거듭하며 요가를 하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지속적으로 관찰하였기 때문에 어렴풋이 ‘요가가 마음이랑 관련이 있어서 그런가 보다’하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그럼에도 내 마음 깊숙이에는 ‘왜 요가가 수행이지’ 하는 의문이 자리하고 있었고, 이는 내 눈에 비친 요가가 백번 양보해서, 하고 나면 기분이 편안해지는 것이기는 해도 어쨌든 몸을 움직이는 ‘운동’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요가 지도자가 되기로 결심한 이후, 요가 철학 등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면서 이러한 궁금증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아사나, 즉 요가 자세는 경험을 담는 그릇이다. 아사나는 특정 근육 또는 근육군을 강화하거나 스트레칭하기 위한 운동이 아니다. 비록 그러한 효과를 보일 수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요가 아나토미, 113p>



참 많이 감명하며 읽은 레슬리 카미노프Lesile Kaminoff와 에이미 매튜스Amy Mathews의 공저 <요가 아나토미>에는 ‘요가 자세는 경험을 담는 그릇’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 표현은 각각 호흡, 요가와 척추, 근육계, 골격계를 기술하는 장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동작의 해부학을 분석하는 ‘아사나의 내부’라는 장의 첫머리에서 사용된 것으로, 그들은 이와 같은 표현을 잠시 부연하며 아사나를 해부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언급한다. 이는 그들의 말에 의하면 “아사나가 최종 결과물이라기보다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114p). 그런데 아사나가 최종 결과물이 아니고 과정이라니, 과연 이게 무슨 말일까.






이는 사실 요가가 요가 동작을 바라보는 특유의 관점 중 하나로, 우리는 바로 이러한 관점을 이해함으로써 요가에 대한 행위가 ‘수련’이라 불리는 부분에 대한 중요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사나를 행한다는 것은 단순히 특정 동작을 한다는 의미를 넘어 연속적인 시간의 흐름에서 내가 움직이고 호흡하는 동안의 시간의 단면을 주체적으로 경험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말이 복잡하고 어려운 것 같으니 조금 풀어보자.


지금 끝없이 펼쳐진 초원에 덩그러니 서 있다고 상상해보자(난 어둑어둑한 저녁을 배경으로 한 초원을 떠올려보겠다). 앞을 봐도, 또 뒤를 봐도 눈앞에 펼쳐진 건 그저 광활한 초원이다. 우리는 이 초원에서 많은 것을 할 수 있지만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은 오직 이 끝없이 펼쳐진 초원에서만 진행된다.


이번에는 끝없이 펼쳐진 초원을 시간이란 개념으로 환산한 다음, 시간이 과거와 미래로 무한히 확장되는 것을 상상해보자. 이러한 견해를 현대 과학은 아마 부정할 테지만 요가에서는 시간을 시작과 끝이 없는 무한한 것으로 바라보는데(시간의 시작이라 일컬어지는 빅뱅이 138억 년 전에 발생했다 여겨지니, 나는 인간의 관점에서 이를 무한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생각한다), 아사나를 행한다는 것은 무한한 시간 속에서 내가 움직이는 찰나의 순간을 주체적으로 관찰하고 경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요가 동작은 무한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시작되고, 유지되고, 마침내는 해체(혹은 다른 동작으로의 전환)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계속해서 변화한다. 이것이 아사나가 최종 결과물이 아닌 과정이라 표현되는 이유이며, 요가는 아사나를 수행하는 동안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변화하는 나와 세상을 발견하고 경험할 것을 요구한다. (또한 수련을 통해 몸이 유연해지면 같은 동작에 대한 느낌이 점점 달라지기도 하는데, 변화에 대한 경험과 경험의 축적이 아사나를 '경험을 담는 그릇'이라 표현한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렇듯 아사나를 한다는 행위 자체가 유연성을 확보하고 근력을 강화한다는 운동으로서의 1차적인 목적 너머에, 무한의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과 나 자신을 발견한다는 일종의 깨달음을 요구하고 암시하기 때문에 요가를 ‘수련’으로, 또 요가를 하는 사람들을 ‘수련자’로 칭하는 것이다.





순간에 집중하고 변화를 관찰하는 것
그것이 아사나를 하는 목적이다.





음...


조금은 머리 아픈 이야기를 장황히 늘어놓았지만, 사실 이러한 부분을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꼭 알아야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쌩뚱맞게 무슨 소리냐 할 수도 있겠으나, 이미 글의 도입부에서도 언급했듯 나는 이러한 이론적 배경을 알기 이전에도 요가를 하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이 편안해지고 기분이 좋아지는 경험을 하곤 했었다. 단지 그때와 지금의 차이가 있다면 지금은 수련 후 왜 그런 느낌을 갖게 되었는지 조금 더 깊이 생각하고 설명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는 부분뿐일 것이다.



나는 요가란 철저히 개인적인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매트 위에서 숨을 쉬고 땀을 흘리는 행위에서 즐거움과 행복을 발견한다면 그로써도 더할 나위 없이 충분할 것이다. 하루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몸의 긴장을 푸는데 요가라는 도구가 유용하게 쓰인다면 그 또한 충분할 것이다. 이는 요가에 길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혹여나 이러한 사상적 배경에, 요가에 대한 즐거움의 통로가 막힐 우려 또한 있기 때문이다.


다만 수련을 하다 무언가 해소되지 않는 궁금증을 마주하거나, 예전 같지 않는 수련에 대한 열정에 슬럼프를 겪고 있다면, 그리하여 나의 글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그 길을 나아가게 하는 도구로써 사용될 수 있다면, 내 글은 그로써도 충분할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두 편의 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