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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gi Sogi Nov 13. 2020

반항.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스펙>

스펙은 영어단어 Specification의 준말이다. 직장을 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학력·학점·토익 점수 따위를 합한 것 등 서류상의 기록 중 업적에 해당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해당 단어는 2004년 국립국어원에서 펴낸 신어 자료집에 등록되어 있다. [위키백과]


<Spectification>

(자세한) 설명서, 사양 [옥스포드 영어사전]
설계·제조·시공 등 도면으로 나타낼 수 없는 사항을 문서로 적어서 규정한 것. [두산백과]




모든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고서부터 각자 하나 이상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이를 확장 내지 축소시키며 세상을 살아간다. 정체성은 그 종류에 있어 자신이 남성이다, 여성이다 하는 성적 정체성에서부터 이 세상에서 나와 나를 포함한 인류가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고찰하는 보다 고차원적인 정체성까지 그 종류는 다양하겠으나, 본 글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정체성은 주로 사회에서 개인이 가지는 지위나 자격에 관한 바에 대한 정체성으로 필자는 편의상 이를 ‘사회 정체성’이라 명명하여 사용하도록 하겠다.     


한 개인은 세상을 살아감에 따라 적어도 한 가지 이상의 사회 정체성을 보유하며 이러한 정체성은 더러는 직업(ex. 변호사, 교수, 경찰, 회사원 등)으로, 더러는 사회적 지위(ex. 한 가정의 가장, 어머니, 초등학생, 대리, 과장 등)로 표출되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생성 내지는 확장되고 축소 내지는 폐기되며 변화한다. 이러한 사회 정체성은 다른 종류의 정체성과 마찬가지로 특정 시기에 한 개인이 자신은 누구인지를 파악하는 중요한 장치로써 기능하기 때문에, 개인에게 있어 자신이 원하는 사회 정체성을 보유할 수 있는가, 혹은 그렇지 못하는가 하는 부분은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감정인 두려움, 슬픔, 분노와도 깊게 관련하여 있다.


2014년 서울에 있는 모대학에 입학할 당시의 대학가의 분위기와 지금 시점의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는 부분에 대해 친구들과 여러 번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어쩌면 14년도에 대학에 입학했던 우리 학번이 ‘학부생 1학년이 도서관보다 주점에 많이 왕래했던’ 마지막 세대인지도 모르겠다고 말을 하던 한 동기의 말이 떠오른다. 실제로 내가 느끼기에도 지금의 대학가는, 특히 대학에 갓 입학한 새내기에게서조차 캠퍼스의 낭만에 대한 기대랄지 하는 부분이 쉽사리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불과 6년간의 시간인데도, 학생들의 심리적 흐름이 눈에 보일만큼 대학가는 정말 많이 그 고유의 채도를 잃어버렸다.     


나는 지금, 대학교 4학년생의 취준생(취업준비생의 준말)이다. 한때 "문송합니다(문과라서 죄송합니다)"라는 표현이 대학가에 유행처럼 번졌을 때, 그 뜻(문과는 이과에 비해 취업이 어려움을 자조적으로 표현한 신조어)을 듣고 씁쓸한 미소를 지어야만 했던 역사학과 생도인 나는 생존문제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3학년 무렵부터 진로를 바꿨고 지금은 학업을 병행하며 요가강사로 활동하는 중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바라보는 나의 미래는, 그리고 내 주위에 보이는 많은 대학가 학생들의 미래는 너무나도 암울하게만 보인다.     


무엇이 우리를 이토록 무채색의 인간이 되도록 강요하였는가. 왜 청년들은 꿈을 잃고 그저 철밥통으로 여겨지는 공무원이 되기를 희망하거나 수십 수백 대의 일의 경쟁률을 가진 대기업 입사에 목을 매는가. 누군가의 말처럼 요즘 젊은이들은 "꿈과 패기가 없기 때문"이고 "힘든 일은 하고 싶어 하지 않는 배부른 세대"이기 때문일까? 어느 날 교정에서 '청년의 특권은 불의에 분노하고 슬퍼함에 있음'을 이야기하시던, 그러나 '요즘의 청년들은 너무나도 유순한 게 가끔은 조금 징그럽다'라고 이야기하시던 어느 교수님의 음성이 귓가에 쟁쟁하다. 왜 우리는 우리의 특권인 분노와 슬픔을 잊어버렸는가. 왜 우리는 이토록 무기력하게 스스로가 무채색의 인간이 되어가는 것을 방종하고 있는가.      


나는 청년세대에 속한 구성원이지만 결코 청년의 입장을 옹호하거나 대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기성세대가 지적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나 스스로 어느 정도 공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말 기성세대의 언급대로 ‘꿈과 패기가 없는 것’이 사실이고, ‘힘든 일은 하고 싶어 하지 않는 배부른 세대’ 일지도 모른다. 다만, 어째서 우리 청년세대가 이처럼 무채색의 인간이 되어 버렸는지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기성세대와는 의견이 조금 다르기에 이에 대한 나의 의견을 밝히는 것을 이 글의 주된 목적으로 삼겠다.    



"나는 모든 문제를 사회구조 탓으로 돌리는 데 동의 안 해요. 그러나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불교의 가르침에도 동의하지 않아요. 사회 시스템이 잘못되었다고만 생각하면 내가 뭐라고 생각해도 벗어나지 못해요. 또 마음의 문제라고만 생각하면 사회적 문제가 어떻든 상관이 없어요. 진짜 진실은, 그 중간 어디쯤에 있어요."   <유시민 선생님 [알쓸신잡2, 강남편]>   



개인에게 있어 스스로 ‘자신이 누구인가’를 판단하는 부분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는 이러한 판단이 개인의 정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며, 개인은 스스로 합당하고 적합한 정체성을 보유했다고 믿는 경우 행복한 반면 그렇지 못한 경우는 불행하다고 느끼게 된다. 문제는 이러한 개인의 판단이 상당 부분 사회의 요구 내지는 사회가 믿는 가치에 준거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조선 후기 사회에서는 ‘충’과 ‘효’가 으뜸 되는 사회적 가치였기 때문에 충과 효에 수반한 행위를 한 개인은 스스로도 대단한 만족감을 느꼈으며 사회로부터도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부모의 3년상을 치르기 위해 회사를 그만둔다는 사람에게 차가운 시선을 보낼 것이며 이러한 차가운 시선을 몸소 받았을 때 자신의 자존감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는 '경쟁'이라는 가치를 숭상하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그리고 이 경쟁이라는 가치는 능력 있는 사람들이 먼저 성공의 기회를 쟁취한다는 능력주의와 결합하여 경쟁 속에서 능력 있는 사람이 부를 획득한다고 믿는 새로운 가치체계를 만들었다. 이를 통해 자연스레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칭호가,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능력이 없거나 혹은 능력을 사용하지 못할 만큼 게으르다는 멍에가 씌워지게 되었다.


문제는 사람들은 태어나서부터 평등한 위치에 있지 않다는 점에 있으며, 위에 언급한 우리 시대의 새로운 사회적 가치가 우리 스스로 이질적이라 털어내기에 우리 안에 너무나도 깊숙이 자리 해 있다는 점이다. 수능시험과 같은 예외적인 '평등한' 경쟁의 기회 외에는 살면서 어떠한 평등적 경쟁을 겪어오지 못한 우리지만, 우리는 되려 스스로를 사회가 부여한 가치체계 속에서 평가하고 재단하고 있는 것이다. (교수님의 표현대로) 징그러운 지금의 청년들은 꿈과 희망을 잃어버린 채 수백 대 일의 공무원 준비를 하는 현 시국의 처참함에 대해 사회에 분노하고 슬퍼하기는커녕, 능력이 부족하고 '노오오력(개인의 실패를 노력의 부재 탓으로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를 풍자한 표현. ex. "너는 노오력이 부족해서 안된거야.")'이 부족한 자기 자신을 탓한다. 누가 청년들을 이토록 무채색의 인간으로 만들었는가. 


나는 비판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으며, 스스로의 가슴에 상처를 내고 자신의 마음에 멍을 내는 지금 내 주위 무채색의 청년 세대가 너무나도 안쓰럽다. 누가 청년들을 한낱 기계의 사양을 표현하는 스펙이라는 단어로, 스스로를 가리키게 만들었는가.


인류 역사를 통틀어 어떠한 사회도 단 하나의 문제점 없이 완벽 그 자체로 존재한 바 없음을 역사를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고 표현한 니콜라이 네크라소프의 표현처럼, 작은 골방에 틀어앉아 자기계발에 목을 매는 것보다 이렇게 슬퍼하고 분노하는 길을 택해야겠다 판단했다. 이는 내가 믿기에, 청년이 청년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우리의 중요한 권리이기 때문이며 이것이 결국 건강한 민주주의를 만들기 위한 길임을 믿기 때문이다. 



끝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미소를 잃어가고 연락이 뜸해지는 내 친구들을 떠올리며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고, 내가 사랑하는 나의 나라가 일본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앞서 언급한 유시민 선생님의 표현과 함께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나는 모든 문제를 사회구조 탓으로 돌리는 데 동의 안 해요. 그러나 일체유심조, 모든 것이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불가의 가르침에도 동의 안해요. 진실은, 그 중간 어디쯤에 있어요."



알쓸신잡 영상출처 - https://www.youtube.com/watch?v=Fs0qitF-qWM&ab_channel=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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