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쓰던 글이 통째로 날아가 처음부터 다시 쓰게 되었네요. 수정만 거치고 엔터만 누르면 발행이 되는 것이었는데 말이죠.. 그러나 주제가 주제인 만큼, 조금 더 생각하고 보완해 쓸 수 있는 기회라 여기고 다시 열심히 써볼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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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공황발작을 경험한 건 10대 중반 무렵이었다.
여름 방학이 한창이던 어느 무더운 날 오후, 집 앞에서 10여분 거리에 있는 마트로 향하고 있던 중이었다. 더운 날씨 때문이었을까, 그 날 먹었던 점심이 더부룩했기 때문이었을까, 별안간 알 수 없는 극도의 공포가 언급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금씩 숨이 가빠오더니 이내 온몸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점차 눈앞이 캄캄해지고 다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균형을 잡기가 힘들었다. 거리에는 네다섯의 사람들이 눈에 띄었고 본능적으로 그들의 눈을 피해 안전지대로 대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트로 향하던 발걸음을 집으로 돌려 필사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한참을 달려 기다시피 현관 앞에 도착한 나는 현관문을 통과하여 신발장 앞에 기절하듯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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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기억은 대체로 희미하다. 유년 시절의 그것은 특히 더한데, 지금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유년 시절에 대한 기억이란 단순히 몇 가지 단편적인 조각들뿐이다. 강아지를 아주 많이 좋아했었다는 것과 두세 명의 친한 친구들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가족들에 대한 몇가지 기억정도..?
하루는 일을 마치고 퇴근한 아버지께 달려 안기려든 적이 있었다. 딴에는 아버지가 반가워 그런 것인데, 피곤한 아버지께 달려든다는 이유로 할머니께 제지당했다. 아버지는 아무런 감정 없는 표정으로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고, 나는 할머니의 손에 여러 차례 회초리를 맞고 울음을 터트렸다. 할머니께 매를 맞은 이유는 ‘피곤한 아버지를 귀찮게 한다는 것’이었다.
또 하루는 큰아버지가 집에 오셔서 로봇 장난감을 선물로 주신 적이 있었다(어린 시절 나는 로봇 장난감을 정말 좋아했다). 선물을 건네받은 나는 그 장난감이 퍽 마음에 들었던 모양인지, 그 자리에서 상자를 뜯어 장난감을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던 모양이다. 그러다 로봇으로 식탁을 치는 일이 발생했는데, 그 바람에 식탁의 갈색 칠이 조금 벗겨졌다. 하필 식탁에서는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고, 식탁의 칠이 벗겨진 일로 아버지는 크게 성을 내셨다. 상황을 중재하기 위해 큰아버지가 나섰고, 아버지는 큰아버지께 ‘나는 원래 애들을 싫어한다’고 대답하셨다. (이런 어른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 걸 보면, 아이들에게 정말 정말 말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문제는 아버지 뒤에는 항상 할머니가 계셨다는 점이었는데, 할머니는 늘 아버지의 눈치를 보기 급급하셨고, 아버지의 기분 상태에 따라 나를 대하는 태도가 180도 달라지곤 하셨다. 어느 때는 허용이 되는 행동들이 또 어느 때는 허용이 되지 않는 일들이 비일비재했고 ('피곤한' 아버지께 달려드는 행동처럼) 허용이 되지 않는 모든 행동에는 손찌검을 비롯한 체벌이 따랐다. 어머니는 일을 위해 늘 밖에 계셨기 때문에 사실상 나는 할머니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고, 결과적으로 수시로 잦은 폭력에 노출되곤 했다.
이러한 가정환경 속에서 성장하며 나는 점차 말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피하게 되었고, 이런 양상은 조금씩 더 굳어져 종국에는 나 스스로가 나의 감정을 파악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람들과의 교류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고,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나는 점차 사람들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끊임없이 사람에 목마르네, 이 갈증이 언젠가 나를 태워 죽일까 두렵다."
아니, 어쩌면... 내가 끊임없이 목이 마른 것은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사막 탓이 아니라, 같은 곳을 빙빙 도는 나 자신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 눅눅한 침대보 위에서
어느 날의 일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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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것은 10대의 마지막 무렵이었다. 수능이 끝나고, 고등학교의 졸업을 앞둔 상황에서 문득 지난 10대 시절을 되뇌어 봤는데, 그동안 내가 뭘 했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교우관계도 원만하지 않았고, 이렇다 할 취미생활도 없었다. 꿈도, 목표도 없었다. 지난 3년간 내가 해온 일은 오직 학교에 가서 잠을 자고, 집에 와서는 새벽 늦게까지 게임을 하는 무의미한 생활뿐이었다.
이번에는 앞으로의 20대 생활을 떠올려 보았다. 대학에 가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보다 넓은 세상에서 나를 성장시켜야 할 텐데, 도저히 그럴 자신이 없었다. 언제 다시 공황발작이 일어날지 모르고, 나는 그래서 사람들과 대화조차 제대로 못하는데 어떻게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간단 말인가. 먼저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문제부터 해결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포기하고 재수를 하기 위해 절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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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이후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그 여정을 계속 이어 오고 있다. 사실 20대에 내가 내린 모든 선택은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다는 생각의 연장선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사학과에 들어간 것도, 노래를 부르는 동아리에 들어간 것도(사람들 앞에 서는 것이 극도로 두려웠기 때문에 공연을 꼭 해보고 싶었다), 요가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도, 지도자의 길을 선택한 것도, 심지어는 이 곳에 내 생각과 내 치부를 드러내는 글을 쓰는 바로 이 선택까지 말이다.
나는 요가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브런치 채널을 개설했고, 처음에는 요가와 관련된 생각이나, 그로 인한 나의 성장기를 기록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머지않아, 나의 모든 글이 은연중에 계속해서 나의 치부와 나의 열정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대놓고(숨기지 않고), 어쩌면 나의 가장 깊숙한 은밀한 내면을 다뤄보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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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누구에게도 쉽게 공개하지 못했던 나의 치부를 인터넷이라는 열린 공간에 투고한다는 것은 상당 부분 부담이 되고 두렵기도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첫 단추를 잘 꿰어야만 옷을 제대로 입을 수 있다는 오랜 말이 있듯, 이 매거진에서는 가장 심부에 있는 나에 대한 이야기를 밝히는 것을 시작으로 요가와 나에 대한 보다 깊은 사색들을 이어가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