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얼굴로 헷갈리게 하는 어른들
사람들은 아버지더러 애처가라고 했다. 술자리가 끝나면 아내를 위해 간식거리를 구입하고 집안일을 잘 돕는다고.
하지만 간식거리와 상관 없이 아버지의 음주는 대대적인 부부싸움으로 이어졌고, 아버지는 어머니께서 다음 날 끓여주시는 콩나물국을 당연한 듯이 드시고는 몇 주 동안이나 어머니와 냉전을 이어 가셨다. 집안일을 하시는 날에는 욕실이 얼마나 지저분했는지, 마늘 손질이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 크게 부풀려 생색을 내셨고.
사람들은 아버지가 나를 끔찍히 아낀다고 했다. 얼마나 내 자랑을 하시는지 동료 교사들도, 심지어 학생들도 내 이름을 알고 있다고. (사실 그런 자식 자랑은 민폐이지만 어쨌든 그 시절의 어른들은 그것을 미화하여 내게 전했다.)
하지만 집 안에서 아버지는 여성을 비하하는 모든 류의 욕설을 내게 사용하셨고, 술에 취하면 "딸년은 필요없다"며 아들 없는 신세 타령을 하셨다. 등교길에는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매일 차를 태워주시면서도 그로 인한 번거로움을 생색 내시며 간혹 아침에 기분이 불쾌하면 "오늘은 네가 알아서 학교에 가라"고 으름장을 놓기 다반사셨다.
사람들은 아버지에게 정이 많다고 했다. 돌아가신 큰아버지의 아들인 사촌오빠 학비를 전액 부담하셨고, 초라한 행색의 잡상인이 다가오면 주저 없이 물건을 사주셨으며, 가게에 들어가면 뭐라도 구입하지 않고서는 미안해서 나오질 못하셨다.
하지만 사촌오빠가 자주 연락을 하지 않자 "도와줘 봐야 남"이라고 손가락질하셨고, 불우이웃 돕기 바자회에서 내가 스웨터를 사 왔을 때엔 남이 입던 옷을 무엇하러 사느냐며 핀잔을 주셨으며, 추후에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시라는 나의 권유에는 "죽었는데 사회가 무슨 상관이냐"며 코웃음을 치셨다.
결혼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아 부모님을 모시고 이탈리아 여행을 간 적이 있다. 부모님께서 패키지 여행을 싫어하셨기에 항공편, 숙소, 현지 기차표, 박물관 입장권, 동선과 시간대별 일정을 모두 내가 직접 준비하였다. 여행이 즐거우리란 기대는 처음부터 없었다. 그 전에도 부모님과 함께 싱가폴과 일본을 여행한 적이 있었다. 싱가폴에서 호텔 직원이 늦장을 부려 로비에서 한참을 기다려야 했을 때 어머니는 내게,
"네가 말을 잘못한 거 아니냐? 뻔하지 뭐."
하셨고, 일본 식당에서 숟가락이 나오지 않자 아버지께서는,
"뭔 씨, 숟가락도 없이..."
하고 투덜거리시며 여행 내내 음식들에 코웃음을 치셨다. 평소에는 목욕탕을 즐기시더니 돌연 당신은 원래 뜨거운 물을 싫어하신다며 자연 온천도 이용하지 않으셨고.
이탈리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음식을 드실 때마다 코웃음을 치셨고, 어머니는 체력이 부친다고 하시면서도 동선과 시간의 고려 없이 여기저기 가보고 싶다는 요구사항만 많으셨다. 모든 여정을 내가 안내했지만, 폼페이와 바티칸만큼은 전문가의 설명이 필요해 보며 한인 투어를 신청하고 부모님께 미리 말씀드렸다.
그 중 폼페이 투어는 당시 나폴리에서 묵었던 한인 민박과 연계되어 있었다. 이탈리아 여행 내내 주로 한인 민박에서 묵었는데, 아버지의 선호에 따른 선택이었다. 한인 민박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아시자 마자 아버지께서는 무조건 한인 민박으로 숙소를 잡으라며, 그곳에서 한식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밖에서 다니는 동안은 쫄쫄 굶겠다는 거짓 선언까지 하셨었다.
나폴리의 한인 민박에 도착하자 마자 나는 폼페이 투어 예약이 제대로 되어 있는지 확인했고, 다음 날 폼페이에 도착해서는 가이드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확인을 위해 민박집에 전화하였으나 로밍 상태가 불량한지 통화 연결음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고, 들린다 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잠시 후, 한인 가이드로 보이는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민박집 이름을 대었지만 다들 고개를 저었고, 그중 한 명은 "아, 몰라요!"하며 내게 훠이훠이 파리 쫓는 손동작을 하였다.
예약된 시간이 어느덧 지났고, 이것이 어찌 된 일일지 곰곰 생각하며 휴대폰을 들여다 보는데 아버지는 한국인인 듯한 남성이 나타날 때마다 "가서 물어보라"고 재촉하셨다. 민박집과의 통화 시도와, 아버지의 재촉 사이에서 지친 나머지 나는 아버지께 "어차피 한국말로 물어보면 되니까 아빠가 좀 물어보라"고 하였다. 그러자 아버지는 코웃음을 치시고 가만히 서 계셨다.
몇십 분이 흘러도 통화가 되지 않고 가이드도 나타나지 않아 우리는 우리끼리 유적지 안으로 들어갔다. 전문적인 설명 없이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폼페이의 폐허 속에서 부모님은 용암에 녹아내린 구조물들을 가리키며 이따금 물으셨다.
"저건 뭐냐?"
모른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가끔은 또 이렇게 물으셨다.
"네가 예약을 잘못한 거 아니냐?"
그래서 결국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화창한 이탈리아 하늘 아래 유쾌한 관광객들 사이, 폼페이 유적은 반도 둘러보지 못한 채로 그 자리에 서서 엉엉 울었다. 그러자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역정을 내셨다.
"당신도 아까 얘랑 좀 같이 물어보고 그러지 그랬어!"
우리는 그 길로 다시 기차를 타고 나폴리의 한인 민박으로 돌아왔다. 가이드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곧바로 주인에게 말했다. 그러자 주인은 확인해 보겠다고 반사적으로 답하더니 곧 방으로 따라 들어아 이렇게 물었다.
"근데 투어 안 하시는 거 아니었어요? 아침에 아버님께 확인했더니 우리는 투어 같은 거 안 한다고, 따님께서 전부 직접 안내한다고 하셨는데요? 그래서 취소했는데..."
고개를 돌려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는 민박집 주인을 향해 사람 좋은 웃음을 허허 짓고 계셨다.
폼페이에서 나를 재촉하면서도 당신은 먼 산만 보시던 아버지
네가 예약을 잘못한 거 아니냐던 아버지
주인 앞에서는 이렇게 사람 좋은 척 웃고 계시는 아버지
나는 한숨만 쉬고 입을 다물었다. 주인이 문을 닫고 나가자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신경질을 내셨다. 그러자 아버지가 역공을 하셨다.
"다 지나간 일로 왜 짜증을 내! 그리고 나는 아침에 아무 말도 안 했어!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쟤(주인)가 괜히 나한테 저러는 거야!"
아버지의 말은 재고의 여지 없이 거짓말이었다. 갑자기 아버지를 누명 씌우겠다는 작전을 민박집 주인이 생각해낼 가능성도 거의 없거니와, 정작 주인 앞에서 아버지는 아무런 반론도 못한 채 웃고만 계셨으니까. 원래 아버지는 책임이나 비난을 면하기 위해 크고 작은 거짓말을 잘하시는 분이었다. 그렇대도 아버지의 거짓말을 믿는 척하지 않는다면 '애비를 못 믿고 남을 믿는다'며 아버지의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테고, 나머지 일정 내내 삐쳐 계실 터였다.
그래서 조용히 혼자 다짐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여행을 부모님과의 마지막 여행으로 하자고. (그러고 보니 그 다짐을 지키지 못했다. 앞으로도 완전히 지키지는 못할 것 같고.)
몇 년 후 이 일에 대해 아버지와 다시 이야기한 적이 있다. 신기하게도 아버지의 기억은 전혀 달랐다. 당신 때문에 투어가 취소되어 너무 미안한 나머지 내게 몇 번이나 사과하셨다고.
나는 단 한 번도 사과를 받은 적이 없는데 몇 번이나 사과하셨다고 기억하시는 점이 신기했다. 당신 때문에 투어가 취소되었다는 사실을 인정조차 하지 않았으면서 사과까지 하셨다고 기억하시는 점은 더더욱 신기했고.
아니, 어쩌면 사과했다고 기억하신다는 그 말씀도 거짓말일지 모르겠다.
이렇게 문장이 복잡해지는 만큼 거짓말이란 삶과 생각을 복잡하게 만든다. 아버지는 내게 복잡한 존재였다. 남들은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하는데, 어머니와 나에겐 나쁜 짓을 하니까. 그렇대도 당신이 기분 좋으실 땐 호의를 베푸셨는데 그럴 때마다 "나 같은 아빠가 어딨냐," "나 같은 남편이 어딨어," 하시는 생색에 이따금은 아버지가 세상 최고로 보이기도 했다.
이제는 더 이상 헷갈리지 않는다. 아버지는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욕심만큼 좋은 사람이 되지는 못하셨다. 사촌오빠의 학비를 대줄 때도, 잡상인의 물건을 사줄 때도,
역시 좋은 사람,
이라는 인정부터 바라셨다. 술자리 이후 귀갓길에 간식거리를 구입하거나 집안일을 열심히 하시는 건 기분이 좋을 때 하시는 일이었다. 기분 좋을 때 그 정도 호의쯤 베풀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나? 반면 기분이 나쁠 때 아버지는 어머니와 싸움을 벌이고, 냉전 기간 내내 집안일에서 손을 떼셨으며, 내게 어머니를 험담하시고, 가끔은 내 탓까지 하셨다.
기분 나쁠 때의 인격이 진짜 인격이다. 부모의 여러 가지 얼굴 중 자식이 가장 뚜렷하게 기억하는 얼굴은 평화로운 때가 아닌 '갈등 상황에서 어떤 얼굴로 어떻게 대처했나'이다. 아버지는 당신의 호의에 좋은 평가가 돌아오지 않으면 상대방을 흠집 내신다. 무(無)평가도 싫으신데 저(低)평가는 더욱 싫으실 터. 당신이 비난 들을 상황이 닥치면 주변에 만만한 아무에게나 화살을 돌리고 역정을 내신다.
폼페이 사건에 대해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마음에 품고 있는지도 모르고 나랑 엄마는 네 덕에 여행해서 고마워하기만 했다."
그러니까 부모인 당신께서 (속으로나마) 고마워하셨는데 자식으로서 그것도 모르고 불만을 품고 있었다니 아주 쪼잔하고 째째하다는 말씀이시다. 또한 자식이 그렇게 불만스러워하는지도 모르고 순진하게 고마워하기만 한 당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자기 연민의 논리이기도 하다. 신세 한탄은 자기애 충만한 어른들이 남에게 화살을 돌리고 동정심을 사기 위해 사용하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너는 고작 그런 일로!
난 왜 이다지도 사람 복이 없지?
그까짓 게 뭐가 대수라고! 우리 사이가 그거밖에 안 돼?
글쎄, 그까짓 거 대수는 아니지만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저지르신 수많은 거짓말 중 문득 한 가지가 생각나서 말씀드렸을 뿐이라고 아버지께 팩트 폭격을 가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공격을 이어갈 만큼 나는 에너지가 많지도 않다. 그래서 나도 가끔은 자기 연민에 빠진다. 건강한 애착관계가 형성되는 (대체로) 평온한 가정에서 자랐더라면 이후의 성장 과정과 인간 관계가 조금은 쉬웠을 텐데. 풍부한 내적 에너지를 지니고 더욱 다양한 도전과 경험을 시도하며 살았을 텐데. 어쩌다 나는 이렇게 서로 싸우고 뭉개고 헐뜯는 부모 밑에서 자라 마음의 그릇이 작아졌을까.
누구나 삶에 짐이 있듯이 그것이 나의 짐이다. 이제는 그 짐을 하나씩 내려 놓는 일이 인생의 낙이다. 나를 불쌍하게 하는 것이 나를 행복하게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