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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 Sep 09. 2020

효능감을 뺏지 말고 주세요

내 자식은 나 없이 못한다는 부모의 오만

ㅣ자꾸 "너는 못한다"고


신생아에게 모유로 한 끼 식사를 먹이는 데에는 40분이 걸렸다. 왼쪽 가슴 20분, 오른쪽 가슴 20분, 총 40분 간의 수유가 끝나고 나면 젖량을 늘리기 위해 유축을 해야 했다. 수유 후 유축을 하면 산모의 몸에서는 '아기가 빈 젖을 또 빠는구나. 젖을 많이 만들어야겠네' 하고 인식하여 모유 분비량을 점점 늘린다. 유축을 하는 데에는 역시 왼쪽 가슴 20분, 오른쪽 가슴 20분이 걸렸다. 유축 후에 유축 기구를 깨끗이 씻고 유축된 모유를 냉장고에 잘 보관하고 나면 어느새 총 90분이 훌쩍 흘러가 있었다. 신생아는 두세 시간마다 깨어나 젖을 찾으니, 다음 수유까지는 길어 봐야 한 시간 반이 남은 셈이다. 그럼 그 한 시간 반 동안 산모는 밥을 먹든지, 밀린 잠을 자든지, 집안일을 하든지 한다.


딸아이가 태어나고 첫 2주는 산후조리원에서 보냈고, 다음 2주 동안은 어머니께서 올라와 계셨다. 나는 어머니의 끝없는 잔소리와 비아냥이 평소 스트레스였기에 한사코 거부하였으나 "너 혼자서는 못한다"며 부득부득 올라와 계셨다. 어머니는 매 끼 다양한 반찬으로 식탁을 꾸미셨다. 하지만 식탁이 차려졌다 해도 나는 재깍 밥을 먹지 못했다. 아기가 깨서 울면 젖을 물렸고, 유축을 거른다 해도 수유만으로 40분이 소요되므로 이미 수유가 시작된 후에 어머니께서 식사를 차리시면 밥이 30분 이상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면 어머니는 재촉을 하셨다.

"얼른 와, 국 다 식어."

"얼른 와, 식으면 맛 없어."

"얘! 너는 종일 애만 붙들고 있니?"

그렇다. 완전 모유수유를 하는 산모는 종일 애만 붙들고 있는다. 그게 문제인가? 어른 밥이야 나중에 먹어도 될 것을 굳이 지금 차리셔서 재촉하시는 이유가 뭐람? 속으로만 의아해하며 계속 수유를 하고 있노라면 어머니는 구시렁구시렁 신경질을 내시고 쨍그랑쨍그랑 식기를 부딪쳐가며 먼저 식사를 하셨다. 한 번은 유선염에 걸려서 식탁 앞에서 엉엉 운 적이 있다. 가슴 통증이 엄청나기도 했지만, "내가 모유수유를 못 했으니 너도 못 할 것"이라고 주문을 외우시던 어머니께서 내가 드디어 젖몸살이 나자 "거 봐라, 넌 이제 젖 못 먹이겠다"고 말씀하시는 통에 쌓였던 울분이 터져나오기도 했다. 우는 나를 보며 걱정이 된 남편은 밥을 몇 숟갈 먹다 말았다. 남편이 먼저 식탁을 뜨자 어머니는 쨍그랑쨍그랑거리며 식기들을 치우시다가 목소리를 낮추어 나를 나무라셨다.

"네가 안 먹으니까 쟤도 안 먹잖아!"


낮이고 밤이고 수유는 나의 담당이었기에 어머니가 하실 일은 요리나 청소, 빨래였는데 한 번은 난데없이 남편의 옷장에서 셔츠를 죄다 꺼내어 일일이 손빨래를 하셨다. 문 닫힌 욕실 안에서 혼자 빨래를 하시며 얼마나 시끄럽게 신경질을 내시든지. 어머니는 계획하신 2주가 지나자 곧바로 댁으로 내려가셨다. 어머니께서 한바탕 폭풍을 일으키고 가신 덕분인지 아기와 단 둘이 보내는 시간은 상대적으로 잔잔하고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하지만 어머니께서 "너 혼자서는 못한다"며 가사도우미를 고용하게 하셨기에 도우미 아주머니께서 일주일에 세 번씩 집을 들락날락하셨다. 그마저도 나는 두 달을 견디지 못하고 아주머니를 해고하였다. 아주머니의 청소 소리에 아기가 잠에서 깨었고, 아주머니의 커다란 목소리에 아기가 잠에서 깨었고, 아주머니의 오지랖에 내가 지쳤기 때문이었다.


"아니, 애기 욕조가 왜 이렇게 생겼어요? 이걸 돈 주고 샀어요?" (네, 돈 주고 샀어요. 아기가 태어나자 마자 산부인과에서 목욕했던 욕조랑 똑같은 제품인데 혼자 목욕시키기 편해서 샀어요.)

"아니, 침대 말고 바닥에 눕혀요. 그게 더 편하지 않나?" (아니요. 침대가 편해요.)

"아니, 에어콘을 왜 틀어요? 애기 추울 텐데."


있는 힘을 다해 젖을 빠는 아기의 이마에는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다음 해 여름, 돌쟁이가 되어 매일같이 밖으로 나가자 조르는 아이를 데리고 나는 자주 산책을 다녔다. 아이는 걸음마를 하여도 내게 안겨 있기를 좋아했기에 거의 항상 아이를 안고 다녔다. 습한 폭염에 힙시트 위로 안긴 아이는 아직 새털 같은 머리카락이 땀에 흠뻑 젖곤 했다. 당시 아이가 자주 입은 옷은 반팔 또는 민소매 바디수트였는데 몇몇 동네 어른께서는 하얗게 드러난 아이의 팔다리를 어루만지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이고, 애기를 왜 이리 벗겨 놨어?"

"그래도 양말은 신겨야지."

"애들한텐 오뉴월도 없다는데."


글쎄, 1년 동안 아이를 키워본 결과 내 아이에겐 오뉴월이 명확히 있었다. 아이를 예뻐하며 나의 안부까지 챙기시는 다정한 어른이 훨씬 많이 계셨지만 열 분 중 한두 분은 불필요한 아는 척을 하셨다. 얼마나 아는 척을 하시든, 당신들 손에 자란 아이는 세상 수많은 아이 중 단 몇 명에 불과하다. 그것도 요즘 세상이 아니라 30년도 전에 키우셨다. (죄송하지만) 30여 년 전에 애들 몇 명 키우신 걸로 아는 척을 하시기엔 세상 아이들이 너무도 각양각색이고 육아 기술이 빠르게 발전한다.


우리 가족은 한국에서 자가용이 없었다. 하지만 양가 부모님의 차를 얻어 타는 경우가 왕왕 있어 아이를 위해 카시트를 장만했었다. 자가용도 없으면서 카시트를 샀다고, 그것만으로도 비아냥을 들었다. 어쩌다 타는 카시트에 아이는 적응하지 못해 한참을 울곤 했다. 그러면 친정 부모님이든 시부모님이든 나를 채근하셨다.


"답답하니까 저러지. 얼른 벨트 풀어주고 안고 있어라."

"사고 안 날 거라니까 그러네?"

"애를 잡네, 애를 잡어."


한 번은 아이가 울음을 그치지도 않고 잠들지도 않자 아버지가 길가에 차를 세우고 소리를 버럭 지르셨다.

"안아 주라니까! 애미라는 게 못돼 쳐먹어 갖고!"

글쎄, 그 순간 나의 관점에서 못돼 쳐먹은 사람이 누구인지 굳이 가리자면, 아이의 투정을 견디지 못하여 아이의 안전을 타협하려 들면서, 아이의 안전을 지키고자 하는 쪽을 못돼 쳐먹었다고 비난하시고, 그렇게 고함을 치며 아이를 더 크게 울려 버리신 아버지였다. 양치하기 싫어서 우는 아이를 치과에서 배운 대로 무릎 사이에 눕혀 이를 닦일 때, 양가 부모님 모두 우리 부부더러 "애를 잡는다"고 하셨다. 애를 잡는 듯이 보여도 안전과 건강에는 타협하지 않는 것이 요즘의 육아다. 얼마나 오래 울든 끝까지 원칙을 지키면 아이도 언젠가는 울음을 그치고 습관을 형성한다. 덕분에 딸아이는 유년의 나처럼 유치가 몽땅 삭거나 썩어 있지 않다.


"애가 우니까 안쓰럽잖니."

"걱정이 돼서 그러지."

"이런 거 없이도 너네는 잘 컸잖아."


어른들의 오지랖은 애정 어린 걱정, 연륜이 묻어나는 지혜로 포장된다. 어떻게 미화되든 오지랖이 싫은 이유는 그 저변에 오만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내 경험이 진리라는 오만,
내 관점이 옳다는 오만,
너보다 내가 잘 안다는 오만.

그리고 오지랖에 누군가가 동조라도 해 주면 그들은 자기 효능감을 느낀다. "거 봐, 내 말이 맞지" 하면서.



ㅣ도움도 불편할 때가


산후조리가 끝나고 나서도 어머니는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도와주시겠다며 가끔씩 들러 반찬을 주시고 청소를 해 주셨다. 차라리 아이와 단 둘이 있는 편이 평화로웠지만, 그리고 당신의 도움이 없인 내 살림이 돌아가지 않는 듯 여기는 어머니의 착각이 불쾌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연신 고맙다며 꾸역꾸역 도움을 받았다. 그것이 어머니께서 궁극적으로 원하시는 것이니까.

도와주고 찬사를 받는 것,
"내 딸은 혼자 못해. 그러니까 내가 필요해"라는 확신을 갖는 것,
그런 식으로 자기 효능감을 느끼는 것.

그것이 어머니가 원하시는 거였다. 그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당신이 차린 식탁에 재깍 착석하지 않으면, 맛있다고 엄지 손가락을 곧바로 치켜 세워주지 않으면, 그렇게 관심을 받지 않으면, 어머니는 슬슬 신경질에 발동이 걸렸다. 산후조리 기간에 그러셨듯이.


그런 생활에 익숙해질 즈음 나는 통번역일이 늘어났고, 몇 번은 어머니께 아이를 맡기고 밖에 나가 일을 했다. 관심과 찬사를 받고 싶어 하는 어머니의 욕구를 충족시켜 드리고자 연신 고맙다고 하루에 20만원씩 일당을 챙겨 드렸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해열제를 잘못 먹여도, 당신 마음대로 아이의 머리를 싹둑 잘라 놓아도 아무런 불평조차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어머니의 도움은 오래 가지 못했다. 아이를 맡기기 위해 일정을 확인할 때마다 어머니의 목소리엔 성가신 기색이 역력했다.


"그 날은 이런 계획도, 저런 계획도 있었는데... 어쩔 수 없지 뭐... 애 봐야지, 뭐."


그러다 한 번은 아이의 기저귀를 갈다가 버럭 신경질을 내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그 후로는 아이를 맡기지 못했다. 어머니의 상습적인 신경질이 두려워 유년기 내내 눈치를 살폈던 나로서는 더 이상 그 손에 모른 척 아이를 맡길 수 없었다. 어머니는 마음 그릇이 작았다. 가끔 요리나 청소를 도와주고는 고맙다, 최고다, 찬사를 듣는 정도만이, 딱 그 정도만이 어머니의 그릇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었다. 반면 반나절 내내 아이를 먹이고 씻기고 어르고 달래는 일은 어머니의 그릇에 넘치는 일이었다. 그것이 어쩌다 한 번 하는 일이라 해도. 그래서 보란 듯이 신경질을 내셨다. 이것 보라고,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힘든 일을 하고 있다고, 얼마나 힘든지 얼마나 고생인지 똑똑히 보고 고마워 하라고, 마치 그렇게 말씀하시듯이 신경질을 내셨다.


이후로는 남편이 쉬는 주말에만 번역일을 받아서 했다. 그 생활이 더 편했다. 미국으로 이사하고 나서는 아이를 프리스쿨에 보내고 여러 가지 다양한 활동을 했다. 그 생활은 더더욱 편했다. "넌 못해"를 되뇌이며 효능감을 갈취하는 어머니가 더 이상 옆에 계시지 않으니 영혼에 조금씩 날개가 돋았다. 그렇게 평온한 생활이 이어지던 어느 날 어머니께 카톡 메시지가 왔다.


"타국에서 고생할 네가 너무도 걱정되는구나. 곁에 있으면서 마음껏 도와주고 싶은데."


헛웃음이 났다. 신경질 섞인 당신의 도움이, 자기 과시와 인정 욕구 가득한 당신의 도움이 진정 도움이라고 생각하시나? 마음껏 도와주실 수 있을 때엔 그렇게 성가셔 하시더니. 정작 곁에 있으면 다시 신경질이나 내실 거면서, 자기 자신을 아직도 이렇게나 모르시나.


전혀 고생 없이 편히 지내고 있다고 답장을 드렸다.


요리를, 청소를, 빨래를 해 주셔도 어머니의 도움이 불편한 이유는 역시 저변에 오만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내 도움이 엄청나지?
나 없으면 안 되겠지?
거 봐, 내 말이 맞지? 넌 못한다니까.


부모는 자식으로부터 효능감을 앗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자식에게 효능감을 주는 존재여야 한다.

너 혼자서도 할 수 있어.
이제 엄마가 도와주지 않아도 충분해.
그래도 어려우면 언제든 말해. 서로 알려주며 같이 해 보자.


그런 겸손한 도움이 대대손손 이어진다면 좋겠다. 내리사랑이라는 순리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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